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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과 낙엽깔린 아차산 입구 도로풍경
 단풍과 낙엽깔린 아차산 입구 도로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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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산이라면 아주 좋지, 내 등산 실력이 별로거든.”

지난 11월 4일 화요산행은 나지막한 아차산 등산 어떠냐고 물으니 몹시 반가워하는 옛 친구와 함께한 산행이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경북 안동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눌러 앉아 30여년을 살아온 오래된 옛 친구입니다.

그가 상경할 때면 어쩌다 만나긴 했지만 함께 등산할 기회는 없었던 친구지요. 2년만에 만난 친구는 그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약간 창백한 얼굴이었습니다. 일행 4명은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에서 만나 워커힐 아파트를 지나 가로질러 아차산으로 올랐습니다.

모처럼 옛 친구와 함께한 산행

산행은 아차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안동 친구의 상태만 괜찮으면 망우리까지 종주할 생각이었습니다. 안동 친구는 서울에 살 때 한 번도 아차산에 오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긴 그가 서울에 살던 시절만 해도 아차산에 등산하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지요.

아파트 뒷길로 나와 워커힐로 통하는 도로를 건너면 곧바로 아차산으로 오르는 산길입니다. 도로 인도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어서 가을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습니다. 산길로 접어들자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쳤습니다. 인근에 사는 아주머니들과 노인들은 벌써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인가 봅니다.

산길에도 낙엽이 수북합니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이 겨울을 재촉하는 모습처럼 쓸쓸했습니다. 조금 올라가자 옛 아차산성 터가 나타났습니다. 성터는 길가에 울타리가 세워져 있고 위쪽에 성벽이 조금 남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어린이대공원과 광진구 일대
 아차산에서 바라본 어린이대공원과 광진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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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제1보루
 아차산 제1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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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삼국시대 때 고구려와 신라백제가 첨예하게 맞섰던 곳이라지 아마?”
“그렇다는구먼, 저 한강 건너 한성에 있던 백제의 개로왕이 남진정책을 폈던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더구만.”

함께 산을 오르는 친구들이 먼 곳에서 온 친구를 위해 설명을 해줍니다. 안동친구는 다른 친구들의 자상한 안내와 설명에 고마워하고 있었지요. 그렇게 옛 친구와 함께 오르는 아차산은 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정다운 풍경으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여긴 뭐야? 유적지 발굴을 한 곳인가?”

왼편에 불쑥 솟아 있는 작은 언덕 아래쪽에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안내판에는 ‘아차산 제1보루’라고 쓰여 있었지만 울타리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바로 오른편 작은 봉우리가 제5보루였는데 그곳엔 울타리가 세워져 있지 않아 올라가 보니 돌무더기 하나만 덩그렇게 쌓여 있었습니다.

보루는 보루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낮은 봉우리에 쌓은 소형 석축산성으로 일반 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군사시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제5보루는 발굴이 이루어진 곳인데도 석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 저쪽 좀 봐? 전망이 참 좋지? 저 아래가 구리시고 아파트가 꽉 들어찬 곳이 덕소야. 그리고 그 뒤쪽으로 제일 높은 산이 예봉산, 맞은편 높은 산이 검단산이야.”
“우와! 정말 전망이 좋구먼, 높지 않고 가까운 곳에 이렇게 전망 좋은 산이 있을 줄이야!”

안동 친구가 감탄을 합니다. 제5보루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정말 멋진 풍경이었습니다. 다른 일행들도 새삼스럽게 강과 산과 도시가 어우러진 동쪽 지역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경치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경치 좋고 옛 고구려의 유적지기 즐비한 아차산길

아차산에서 용마산으로 이어진 능선길에는 옛 고구려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어떤 보루는 발굴이 끝난 것도 있었지만 한창 진행 중인 것도 있었지요, 아차산과 용마산 사이의 깊은 계곡이 긴고랑입니다.

고구려의 옛 유적지 아차산 제5보루
 고구려의 옛 유적지 아차산 제5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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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마을과 한강너머 예봉산과 검단산
 골짜기 마을과 한강너머 예봉산과 검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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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긴고랑으로 이어진 고갯길을 지나 용마산으로 올랐습니다. 오르막길은 대부분 바윗길이어서 낮은 산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암벽길의 스릴을 느낄 수 있었지요. 용마산에서는 광진구 쪽으로 치우쳐 불쑥 솟은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그냥 망우리 쪽으로 걸었습니다.

“저쪽 정상으로 가지 않으려면 이 봉우리가 제일 높은데 이곳에서 정상주 한 잔씩 하는 것이 어때?”

역시 술을 즐기는 일행이 정상주 얘기를 꺼냈습니다. 술 생각과 함께 배가 고팠던 게지요. 산행을 늦게 시작해서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동쪽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네 사람이 각자 준비해온 과일과 간식들을 꺼내놓으니 여느 음식상 못잖게 푸짐합니다. 내가 준비해 간 복분자 술을 꺼내 놓자 다른 친구가 매실주를 내놓았습니다.

높고 험한 산에서라면 이정도 술도 삼가야 할 양이지만 이 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험한 곳도 없고 그냥 능선길을 산책하는 정도였으니까요. 복분자 술은 일행들이 그저 작은 소주잔으로 딱 한 잔씩 마실 양만 준비했습니다. 정상주는 한 잔씩만 마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매실주는 그 양이 약간 많았습니다.

“어! 기분 좋다. 모처럼 산위에서 마시는 술이라니, 옛 친구들과 함께 오른 산 위에서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맛이 아주 각별한 걸.”

일행들은 복분자주와 매실주를 마시며 몹시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나도 오늘 정말 기분이 좋구먼, 좋은 친구들에 경치 좋고 유적지도 많아 볼거리도 많고, 이 산 이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등산코스로 딱이네, 딱!”

모처럼 등산을 함께한 안동친구도 정말 좋아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친구도 좋고 술맛도 좋은 산 위에서 마시는 복분자주와 매실주

간식과 술을 나누어 들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이곳에서부터는 거의 내리막길과 평지길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내리막길에서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경치도 그만이었습니다. 광진구 아차산 공원길로 내려가는 길에서 곧바로 올라 망우리 묘역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무덤과 뒤편의 갈참나무
 무덤과 뒤편의 갈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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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산 능선
 용마산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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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은 군데군데 무덤을 옮겨간 흔적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무려 40여 만기의 무덤들이 있었지만 공원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많이 줄어든 모습이었습니다. 무덤들의 모양도 매우 다양했지요, 왕릉처럼 커다란 무덤이 있는가 하면 아주 작고 초라한 무덤들도 많았습니다.

“죽은 후에 왜 저렇게 요란한 무덤을 만들어 놓는지 모르겠어? 무슨 역사적인 인물도 아닌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어쩌면 자손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거나 일종의 보상심리 같은 것이 작용해서일 거야?”
“난 그래서 미리 아들들에게 말해 놓았어, 나 죽으면 무덤 같은 것 만들지 말고 화장해서 산에 뿌리라고.”

일행들은 하나 같이 거대한 무덤에 호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망우산 보루를 지나 얼마지 않아 도로가 나타났습니다. 봄철 한식 때가 되면 성묘객들로 넘쳐나던 시절에 만들어진 도로일 것입니다.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은 그야말로 룰루랄라 산책길이었습니다.

“앗! 여기 좀 봐? 죽산 선생 어록비잖아?”

안동 친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일행들을 불렀습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 어록비를 발견한 것입니다. 다른 일행들은 무심코 그냥 지나친 것입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어록비에 새겨져 있는 글입니다. 자유당 정권에 의하여 빨갱이라는 누명이 씌워져 사형을 당한 죽산 선생의 어록비는 그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세상을 살다가 갔는지를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죽산 조봉암선생 어록비
 죽산 조봉암선생 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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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선생 묘역
 죽산 조봉암선생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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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 암울하던 시절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선현들이 어디 죽산 선생뿐이었겠어?”

일행들은 죽산선생의 어록비를 읽으며 옛 시절을 떠올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죽산선생은 일행들이 아주 어린 시절에 돌아간 분이지만 모두들 그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옛 시절과 오늘의 현실을 생각나게 한 선현들의 무덤과 망우리의 유래

망우리 고갯길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문일평 선생이며 지석영의 묘까지 수많은 선현들의 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망우리 고개 저 너머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서는 고운 빛을 잃은 단풍 너머로 동구릉 쪽 산자락이 손짓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고개가 왜 망우리 고개인 줄 알아?”
“망우리라는 지명에 유래가 있는 모양이지?”

망우리라는 이름의 유래를 가르쳐주기 위해 꺼낸 말에 일행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옛날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과 종묘를 세웠는데 왕실 묘역을 정하지 못해 걱정이 많았다는구먼, 그런데 좋은 묘역을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동구릉 터를 발견하여 왕실 묘역으로 정한 다음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갯마루에서 '이제야 근심을 털어버렸다'라고 하여 잊을 망(忘) 근심할 우(憂) 자를 써서 망우리라고 했다는 거야.”

일행들이 모두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느 곳의 지명이나 마을 이름들도 대개 전해 내려오는 유래가 있을 것입니다. 이곳 망우리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실 묘역 동구릉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지요.

망우리 고갯길 너머로 바라보이는 마을과  동구릉 뒷산
 망우리 고갯길 너머로 바라보이는 마을과 동구릉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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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남북문제 등 국민들의 근심거리가 많은데 정부에서 하는 짓을 보면 답답하기만 하고, 그런 모든 근심거리를 싹 씻어 내릴 수 있는 묘안이라도 나왔으면 좋겠구먼. 이 태조가 이 고개에서 근심을 털어버렸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야.”

고갯길에 내려서자 샛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들과 인도에 떨어진 은행잎들이 늦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아차산, #용마산, #망우리, #옛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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