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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6.4.

 

 하루 내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전철은 책을 느긋하게 읽을 수 있는 곳입니다. 쇠바퀴와 쇳길이 부딪히며 내는 치치 소리 시끄럽고, 간첩신고 하라는 방송이 아직도 끊이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손전화 받는 사람 많은 가운데, 옆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밟고 치고 미는 사람 많은 전철입니다만, 마음을 그러모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서서 가며 책을 읽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버릇을 들이면 괜찮아집니다. 버스는 너무 덜컹거릴 뿐더러, 운전기사가 지나치게 마구 몰아서 책을 읽기 아주 나쁩니다. 자가용을 몰면 책은 못 읽습니다. 집이나 일터에서는 수많은 일거리가 끊이지 않으니 책에 마음을 쏟기 어렵습니다.

 

일거리가 줄거나 고된 일을 마친 뒤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는 일이 한결 낫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전철은 책을 가까이하는 소중한 곳이 되기도 합니다. 가방에 책 한 권 언제나 챙겨 놓고 있다면. 가방 없는 빈손이라 해도 한손에 책 하나 들고 움직일 만큼 매무새를 추스를 수 있다면.

 

 

(2) 2008.9.20.

 

 차소리 시끄럽지, 손전화 소리 귀 따갑지, 사람들 수다 쟁쟁거리지, 우리 스스로 부처님처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책읽기는 어렵습니다. 자리에 앉기 쉽지 않으나 자리에 앉아도 옆에 앉은 이들이 밀거나 다리 벌리거나 신문 펼치면 고달픕니다.

 

서서 책을 읽는 동안, 밀고 치는 사람들한테 부대낄 때에도 힘이 듭니다. 잠깐 눈을 쉬고자 고개를 들면 수많은 광고판으로 눈이 아프고, 고개를 숙여 창밖을 내다보면 이번이 어느 역에 서는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역마다 역이름 적어 놓은 자리가 너무 작고 글씨도 너무 작습니다.

 

 덜컹거림은 버스와 견주면 많이 적다고 할 전철일 텐데, 아예 없지 않을 뿐더러 썩 밝지 않은데다가 깜빡거리는 다 된 형광등이 제법 많고, 땅밑으로 들어가면 형광등 불빛은 흐려서 눈이 아픕니다. 더군다나 공기는 얼마나 나쁜지요.

 

 그렇지만, 바쁜 도시사람들로서는 일터에서 책을 못 읽고 집에 가도 책을 못 펼칩니다. 일을 마치고 책을 구경할 책방 나들이를 해 볼 엄두는 얼마나 낼 수 있을는지요. 그나마 저녁에 술 한잔 걸친 뒤에라도 전철에 몸을 싣고서 겨우겨우 책 한 쪽이나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달파도 벗이요 힘이 들어도 동무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사람들 북적이고 담배 냄새며 화장품 냄새며 갖가지 냄새가 범벅이 된 타는곳에 멀뚱멀뚱 다리 아프도록 선 채로 지하철이나 전철을 기다리며 책장을 펼치고 있으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입니다. 온갖 힘겨움과 고달픔을 잊고 책나라로 뛰어듭니다.

 

그러다가 사람물결에 휩쓸려 전철칸으로 빨려들어가서 손잡이 하나 못 잡고 허우적거리노라면 애써 펼치고 있던 책은 구겨지고 몸도 구겨지고 마음도 구겨집니다. 그나마 나 혼자 구겨지지 않고 전철에 탄 모두가 구겨지니 마음을 달랠 수 있으려나요. 뭐, 조금도 마음을 달랠 만한 일은 아닙니다만.

 

 언제나 머나먼 전철길을 달리기 때문에(인천으로 돌아올 때는 끝에서 두 번째), 오징어가 된 채로 웬만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숨통이 트이고 책을 펼칠 자리도 넉넉해집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몸 고단함이 크기 때문에 책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어서 눈이나 감고 잠들어 버리고 싶은데, 감기는 눈을 부릅뜨거나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새힘을 북돋우면서 글줄 하나라도 읽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책 하나에 담긴 빛접은 줄거리를 새기자고, 달콤한 알맹이를 맛보자고, 시원한 이야기에 젖어들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십 분, 또는 이십 분, 이렇게 눈 부릅뜬 채로 책에 묻히고 있으면 어느새 없었던 힘이 차츰 솟습니다.

 

구부정했던 어깨가 펴집니다. 후들거리던 다리에도 힘이 오르고, 뒤숭숭하고 띵하던 머리도 살살 깨어납니다. 이윽고 마지막 역에 닿아 마지막 사람물결과 함께 전철역을 빠져나오면, 개미새끼 하나 없이 어둡고 고즈넉한 골목길. 홀로 골목길을 거닐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옆지기나 아기하고는 함께 나들이를 할 수 없던 날, 혼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빠는, 옆지기한테든 아기한테든 무어 선물할 만한 것 하나 손에 들고 있지 못합니다. 그저, 다시 찾은 맑은 마음과 몸뚱아리 하나로 집 문을 따고 들어가서, 하루 내 아기와 씨름한 옆지기를 달래고, 칭얼거림으로 엄마를 들볶은 아기 기저귀를 갈고 빨고 널고 말리고 개고 씻기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3) 2008.11.12.

 

 볼일이 있어 옆지기와 아기까지 함께 전철을 타고 서울 외국어대 있는 데까지 나들이를 합니다. 퍽 먼길이라서 아기도 걱정이고 옆지기도 걱정입니다. 이러한 걱정은 용산역에서 내려 뒷간을 갈 때부터 조금씩 불거지고, 서울역부터 땅밑으로 파고드는 전철을 타고 달리는 내내 깊어집니다. 아기도 힘들고 옆지기도 힘겨워, 같이 나들이를 하자고 이끈 아빠는 참 바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듭니다.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길기 때문에, 책을 세 권 가방에 챙겼지만, 머나먼 길을 오가는 동안 책은 겨우 두 번 펼칠 뿐입니다. 그나마 돌아오는 길에 아기며 옆지기며 고단한 잠에 깊이 빠져들었기에, 두 사람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책을 펼쳤습니다.

 

 갓난쟁이하고 나들이를 가야 할 때에는 책 펼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니면 두 사람을 돌보면서 둘 모두 새근새근 잠들고 나서야 비로소 애 아빠는 잠을 좇으면서 그 작은 틈을 쪼개어 책을 펼쳐야 하는지.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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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책읽기, #전철, #지하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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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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