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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료채취(sampling)가 북미관계와 6자회담을 흔들고 있다. 9·19 공동성명의 2단계 이행초기 완료를 향해 가던 6자회담이 빨간 신호등에 걸린 것이다. 북미 양국이 이 사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다시 파란 신호등으로 바뀔 수도 있고, 빨간 신호등이 계속 켜져 있을 수도 있으며, 자칫 후진하는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다.

 

먼저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12일 담화부터 보자. 북한은 "최근 6자회담 10·3 합의 이행 지체"의 책임이 시료채취를 거부한 북한에 있는 것처럼 "그릇된 여론을 내돌리는 세력이 있다"며, 지난 10월초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 때 합의했다는 내용을 일부 공개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미는 우선 검증문제와 관련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상황에 대하여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나라는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탈퇴하고 NPT밖에서 핵시험을 진행하여 핵무기보유국임을 선포한 나라이며 6자회담은 현재 9·19공동성명 리행의 두번째 단계에 있다. 이것이 무력화(불능화) 단계에서 핵신고서에 대한 검증의 방법과 범위를 규제하는 특수상황이다.

 

그에 따라 핵신고서의 정확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10·3합의의 완전한 리행을 전제로 취하게 될 검증조치들이 문구로 합의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검증대상은 2007년 2·13합의와 10·3합의에 따라 궁극적으로 페기하게 될 녕변핵시설로, 검증방법은 현장방문, 문건확인, 기술자들과의 인터뷰로 한정되며 검증시기는 10·3합의에 따른 경제보상이 완전무결하게 결속된 이후로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힐의 평양방문 때 합의한 '검증 양해서'를 통해 "검증 전문가가 시료를 채취하고 이를 북한으로부터 반출해 분석하는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합의되었다"고 반박했다.

 

그런데 국무부의 해명은 두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하나는 "검증과 관련해 북한과 계속 협의해왔고 앞으로도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인데, 이는 양측의 이견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국무부도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기본적으로(basically)' 합의되었다는 의미 역시 완전한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북한의 약속 위반' 주장은 무리

 

그렇다면, 북한이 약속을 뒤집은 것일까? 아니면 미국이 이중 플레이를 한 것일까?

 

이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제시했다.

 

그는 11월 4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북미간의 비공개 합의문에는 시료채취에 관한 언급이 없이 과학적 절차라고만 돼 있다"는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의 지적에 "그렇다"고 확인했다.

 

이러한 남-북-미 3자의 설명을 바탕으로 '퍼즐 맞추기'를 해보자. 일단 검증 문서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미국 국무부가 10월 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공식 삭제하면서 발표한 '미북 검증 양해 문서'이다. 이 문서에서는 검증방법과 관련해 "시료채취와 법의학적 활동을 포함한 과학적 절차의 사용에 관한 합의"로 나와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서, 즉 비공개 양해 문서에는 시료채취가 빠진 채, '과학적 절차'만 언급되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면, 북한이 약속을 뒤집은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잠정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테러지원국 해제에 따른 강경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합의되지 않은 '시료채취'를 10월 11일 발표문에 포함시킨 것이다. 만약 시료채취가 포함되지 않은 검증 합의서를 내놓으면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면, 강경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사안을 북한과의 추후 협의 과제로 넘긴 것이다. 일단 '과학적 절차'라는 표현이 담긴 만큼, 추후 협의를 통해 시료채취를 관철시켜보겠다는 계산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뉴욕을 방문한 북한의 리근 외무성 미주국장을 힐과 성김이 만나 검증 문제를 협의했다는 것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파장은 어디까지? 그리고 해법은 어디에?

 

주목할 점은 한국 외교부도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 장관은 북-미 간의 비공개 합의문에 시료채취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북한이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자, 비난의 화살을 북쪽으로 돌렸다. 6자회담 한국측 수석대표인 김숙 한반도 평화교섭 본부장이 13일 오전, "어제 북한은 최근 미국과 합의한 중요한 내용들을 공개적으로 부정했다"고 말한 것이다.

 

일단 북한은 중유 및 에너지 설비·자재 보상이 늦어짐에 따라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폐연료봉 인출 속도를 절반으로 늦췄다고 발표했다. 또한 "경제보상이 계속 늦어지는 경우 무력화 속도는 그만큼 더 늦추어지게 될 것이며, 6자회담의 전망도 예측하기 힘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쁜 시나리오는 한미 양국이 북한의 발표를 약속위반으로 규정하고 중유 및 에너지 설비·자재 제공을 '시료채취' 허용과 연계시키는 경우에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불능화 속도 조절 및 중단 정도가 아니라 다시 원상복구 카드를 꺼내들 공산이 크다.

 

해법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일단 합의 사항에 충실해야 한다. 시료채취 및 법의학적 활동 등 과학적 절차의 구체적인 내용은 3단계 협상 의제로 넘기고 2단계 조치부터 이행을 완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과 5자 모두 한발씩 양보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시료채취를 '앞으로' 논의할 핵무기 및 핵물질 폐기 단계에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지금' 분명히 밝혀야 한다. 반면 5자는 약속한 경제보상 조치를 신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이것만이 또 다시 6자회담이 좌초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그:#북핵 검증, #시료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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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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