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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이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표시하는 지표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이유는 그것이 계량화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처럼 입학심사를 점수제의 필기시험으로 한정하고 추천장이나 면접과 같은 주관적인 요소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선택방식을 채택할 정도로 높은 교육제도가 발호한 나라에서는, 학력을 계량화가 가능한 ‘통계’에 의해 뒷받침되는 객관적이고 신뢰도가 높은 지표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주 이야기되는 것처럼, 통계란 국가가 통치하는 인구에 대해서 갖는 집적된 지식이고, 학력은 통계를 통해 권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학력사회는 통계로 대표되는 국가의 관리제도뿐만 아니라 근대화 일반의 승리를 보여 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전근대적인 제도가 해체되고, 근대적인 통치원칙이 관철될 때에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학력사회이다.

- 사카이 나오키, <일본, 영상, 미국: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

 

수능, 해마다 예외없이 되풀이되는 통과의례

 

과연 수능이란 통과의례는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 관문일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수능을 치르지 않는다고 또는 수능에 실패했다고 해서 어른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전세계적으로 입시가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무엇을 위한 통과의례일까?

 

사카이 나오키의 말에 따르면 학력이란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표시하는 지표에 해당한다.

이는 곧 학력에 비례해서 사회적 위치가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똑똑하고 유식한 사람이 더 출세하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학력이란 형식에만 매몰되어 정작 교육 시스템은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단 사카이 나오키 뿐만 아니라 미셸 푸코, 노암 촘스키 등 수많은 지성들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교육제도의 유사성을 감안하면 사카이 나오키의 쓴소리가 우리에게도 약이 될 거란 점은 불문가지다. 

 

사카이 나오키가 지적한 일본 교육제도의 특징(예컨대 입학심사를 점수제의 필기시험으로 한정하고 추천장이나 면접과 같은 주관적인 요소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선택방식)은 한국 교육제도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요즘엔 면접이나 논술의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사회봉사활동까지 평가 기준으로 삼는 미국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먼 것이 사실이다.

 

입시에서 필기시험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개개인의 능력을 점수로 계량화해서 평가하는 데 그만큼 익숙하다는 의미이고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사카이 나오키가 "국가가 통치하는 인구에 대해서 갖는 집적된 지식"으로 규정한) '통계'를 바탕으로 개개인을 차등화해서 대학(결국 사회)에 재배치한다는 의미가 된다. 알고 보면 시험을 치르고 나서 반대급부처럼 주어지는 성적표란 것도 거대한 통계 자료에서 떼어낸 편린(片鱗)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개인의 능력을 점수로 계량화해서 대학(결국 사회)에 재배치하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학력에 의한 계층화가 시작되는 셈이다. 그런데 사카이 나오키에 의하면 학력에 의한 계층화가 인종에 의한 계층화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한다.  

 

미셸 푸코 역시 <감시와 처벌>에서 시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험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의 기술을 결합시킨 것이다. 시험은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이다. 그것은 개개인을 분류할 수 있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가시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규율의 모든 장치 안에서 시험은 고도로 관례화되어 있다. 시험에는 권력의 의식(儀式)과 경험의 형식, 힘의 과시와 진실의 확립이 결합되어 있다. 규율·훈련 과정의 중심에 있는 시험은 객체로 인식되는 사람들의 예속화를 나타내는 것이자, 예속된 사람들의 객체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카이 나오키가 말한 학력사회나 미셸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모두 지배권력에게 유리하게 짜인 통치의 편의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고발의 의미로).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발상이 전근대적 제도를 해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탈근대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는 이 시점에서 과연 유효하냐는 점이다.

 

그나마 "영어 몰입 교육" "허울 뿐인 공교육 강화" "국제중학교 설립" "자립형 사립고" 등의 각론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현정부의 교육정책은 이런 최소한의 문제의식조차 싹 틀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럴 때일수록 최소한 관련서적은 찾아 읽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루소의 <에밀>, 김상봉의 <학벌사회>, 노암 촘스키의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화이트헤드의 <교육의 목적>,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등을 추천하고 싶다.


일본, 영상, 미국 :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

사카이 나오키 지음, 최정옥 옮김, 그린비(2008)


태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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