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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시험 준비하는 수험생들
 수능시험 준비하는 수험생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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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찾아오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그리고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전교 꼴등에게도 수학능력시험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잔혹하게도.

꼴등. 반 꼴등도 아닌 전교 꼴등. 이 땅의 학생들에게 이 낙인만큼 잔인한 게 또 있을까. 벌써 15년이 흘렀다. 대한민국에서 수능이 처음 실시된 1993년 여름, 나는 수원의 모 고등학교 3학년 전체 꼴등 언저리를 맴도는 '문제' 학생으로서 수능을 치렀다.

그 해,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은 8월과 11월 두 번의 수능을 치를 수 있었다. 200점 만점의 두 시험 결과 중 좋게 나온 점수로 대학 입시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지만 8월 시험에서 100점 맞던 학생이 11월 시험에 150점 맞는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입시에서 드라마틱한 역전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 법이다. 기회가 많더라도, 대개 1등이나 꼴등이나 예상했던 수준의 점수를 받는다.

수능 104점, 내신 14등급... 날 위한 대학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해 두 번의 수능에서, 고교 3년 내내 그랬듯이 전교 꼴등 수준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았다. 8월에 102점, 11월에 104점. 내신은 15등급 중에서 14등급. 대학으로서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나로서는 대학에 가겠다고 우길 수 없는 그야말로 우스운 성적이었다.

대학 입시 원서 작성을 위해 친구들이 열심히 교무실을 들락거릴 때 난 늘 교실에 앉아 도시락만 까먹었다. 대학이 날 부르지 않듯, 담임 선생님 역시 날 부르지 않았다. 그 해 겨울, 나는 단 한 장의 대학 입시원서도 쓰지 않았다.

억울하지 않았다. 안타깝지도 않았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고작 단 하루, 수능 시험 날 이전과 이후의 세상은 논두렁과 아마존강만큼 차이가 컸다.

바야흐로 노래방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지던 그 때. 나는 88라이트 담배 연기 내뿜으며, <스틸 하트>의 'She's gone'를 부르기 위해 노래방 마이크 붙잡고 꽥꽥 소리를 내지르면서 10대와 작별하고 20대를 맞이했다.

10대와 함께 꼴등에게는 너무 가혹했던 '고난의 행군'도 끝이었다. 3년 동안 아침 7시부터 밤 10시, 11시까지 학교에서 생활했다. 아침에 지각해 교문에서 몽둥이찜질 받은 뒤 교실로 들어가면 담임 선생님이 또 때렸다. 공부 시간에 존다고 맞았고, 자율학습 시간에 떠든다고 얻어 터졌다. 검푸른 멍 자국은 3년 내내 허벅지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털량 보존의 법칙'의 믿었던 고난의 시절

수능 시험장에서의 수험생.
 수능 시험장에서의 수험생.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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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숨이 막혀 실업계고로 전학을 보내달라고 울며 학교에 부탁도 했었다. 유도를 배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노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1학년을 마친 뒤에는 문과로 가고 싶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선생님은 "너 같이 공부 못한 애들은 이과를 가야 그나마 대학에 갈 수 있다"며 날 이과로 보냈다.

물리학의 3대 법칙은 질량보존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 그리고 '털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선생님의 농담을 그대로 믿었다가 매 맞았던 기억이 있을 만큼 내 이과 재능은 형편없었다.

'털량 보존의 법칙'은, 성년이 된 사람의 몸에 난 털의 수는 평생 바뀌지 않으므로, 대머리는 빠진 머리카락만큼 신체 다른 곳에 털이 많이 나 있다는 우스갯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우와!"를 연발하며 이 터무니없는 말을 믿어 버렸다.

어쨌든 19살의 겨울이 가고 20살의 봄이 왔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으로 떠났고, 꼴등인 나만 들판에 홀로 남겨졌다. 외롭고 쓸쓸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게 놓인 길은 재수뿐이었다.

문과로 방향을 틀었으나 공부를 워낙 못했기에 학원도 다닐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라도 해야 학원에 다닐게 아닌가. 홀로 도서관으로 가 중학교 1학년이 본다는 녹색 표지의 ○○기초영어를 보며 독학을 했다.

언어영역 공부한다는 셈치고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을 읽었다. 1994년 여름은 살인적으로 더웠다. 나는 안 되는 머리로 수학문제 푸느라 더 더웠다. 독학은 힘들었으나 때리는 사람이 없어 고교 시절보다 편했다. 

다시 수능을 봤다. 점수는 기적같이 수십 점이 올랐다. 대학 입시 원서 쓰러 고등학교를 찾았을 때 "너 어떻게 커닝했냐?"는 질문을 받을 만큼의 수직 상승이었다. 하지만 내신 14등급은 고정불변이었다. 어쨌든 '털량 보존의 법칙' 따위를 그대로 믿었던 나는 수능을 세 번 치른 뒤에야 역사학을 선택해 대학에 들어갔다.

15년 전 일을 다시 떠올려보니 재밌지만 한편으론 가슴이 아프다. 공부를 못해 늘 꼴등을 맴돌았기 때문이 아니다. 팔딱이는 물고기처럼 반짝 거려야 마땅했던 10대의 마지막 3년을 학교에 갇혀 보냈다니. 다시 돌아오지 않아, 마중 나갈 맞이할 수도 없는 그 시절이 가슴에서 서걱거린다.

인생 길고 역사는 더 길다... "당당하게 살자"

그 시절, 나는 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권상우)처럼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라고 속 시원하게 외치지 못했던 것일까. 나에게 매질하던 선생님을 향해 "사람 그만 좀 때리라"고 왜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때 꼴등인 내게 필요했던 건 어쩌면 점수와 학력이 아니라, 당당함과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수능이 끝나면 어떤 이는 환한 웃음을 짓고, 어떤 이는 좌절의 눈물을 흘리는 등 수많은 이들의 감정이 교차할 것이다. 교차점의 한 복판에 선 이들에게, 이미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의 '훈수'는 그리 큰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한 마디 하자면, 수능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선일 뿐이라는 것이다. 빨리 출발한다고 1등 하는 것도 아니고, 좀 늦게 출발한다고 망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말했듯,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 그래서 1등이든 꼴등이든 우리는 좀 더 당당해져야 하고, 더 큰 자존심을 가칠 필요가 있다. 

15년 전 '털량 보존의 법칙'을 믿었던 전교 꼴등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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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수능, #대학 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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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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