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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미소 속에 늦가을의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아내의 미소 속에 늦가을의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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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동산 단풍이 고운데 같이 산책이나 나갑시다."

외출에서 돌아온 내게 아내가 다시 산책을 나가자고 합니다. 점심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내다본 뒷동산 풍경이 너무 곱더랍니다. 그래서 내가 외출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나 봅니다.

신사복을 벗어 놓고 간편한 차림으로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뒷동산으로 오르는 길가의 아파트 울타리엔 빨간 장미꽃들이 너무 많이 피어 있어서 계절을 헷갈리게 합니다. 잎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빨간 장미꽃들이 너무 대조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며칠 동안 뒷동산 공원산책을 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입동이 지났으니 이제 겨울의 문턱인데 저 장미꽃들은 날씨가 따뜻해서 봄철로 착각하고 있나봐?"

아내도 모처럼의 뒷동산 산책길이라 장미꽃들을 처음 본 모양이었습니다. 장미꽃이야 본래 12월에도 어쩌다 한두 송이씩 피어나는 꽃이지만 한꺼번에 무더기로 피어난 것은 아무래도 낯선 모습이었지요.

숲속으로 들어서자 늦가을과 초겨울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아직 노랗고 빨간 색으로 숲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는 풍경은 늦가을 모습이었지요. 그러나 발바닥에 밟혀 바스락바스락 부서지는 낙엽들은 아무래도 초겨울 모습이었습니다.

"어머! 저 나무 좀 봐? 단풍이 너무 곱네."

아내의 호들갑에 바라본 공터가 붉은 색으로 가득합니다. 옛 시설물들을 철거하여 휑뎅그렁한 넓은 공터 한 가운데 서있는 벚나무는 아직 새빨간 잎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단풍도 곱고 하늘도 참 곱다. 아! 어느새 가을이 가고 있네. 저 벌거숭이 나무들 좀 봐?"

그 벚나무 뒤편으로 바라보이는 맑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이 아련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뒤편 숲에 서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은 잎이 모두 떨어져 벌거숭이로 서있는 모습이 어김없는 초겨울의 풍경이었지요.

아파트 울타리에 무더기로 피어난 장미꽃들과 단풍든 은행나무
 아파트 울타리에 무더기로 피어난 장미꽃들과 단풍든 은행나무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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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화려한 단풍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화려한 단풍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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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한 곳에 이르자 은행나무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 은행나무들도 어떤 것은 노랗게 물든 잎들이 그대로인 나무들도 있었지만 어떤 나무들은 잎이 모두 져버린 모습입니다.

"아! 샛노란 은행잎들, 나 여기 좀 앉아있다 갈래."

아내가 은행잎이 수북한 나무들 밑에 주저앉았습니다. 주변은 온통 은행잎 천집니다. 노란 융단이라도 펼쳐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자! 여길 보세요? 김치!"

아내가 생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내의 표정이 금방 사색하는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잎이 저버린 은행나무들을 쓸쓸한 눈길로 바라보던 아내가 이번에는 은행잎들을 하나 둘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다른 풍경을 몇 컷 사진에 담았지만 그때까지도 아내는 아직 은행잎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당신 그 나이에 갑자기 소녀 같은 표정이네. 당신 혹시 가을 타는 것 아냐?"
"가을을 탄다고? 오늘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정말 옛날 소녀 때처럼 마음이 좀 그러네. 나 정말 가을여잔 가봐? 호호호."

가을 타는 여자냐는 놀림에 아내의 사색이 깨진 듯 했습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이렇게 고운 낙엽 위에 앉아있으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것 아닌가."

문득 신석정님의 '임께서 부르시면'이라는 시 한 구절을 읊조린 아내가 부스스 낙엽을 털고 일어났습니다. 손에는 여전히 곱고 노란 은행잎 몇 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단풍 고운 정자 앞 공터에서 노인들도 가을이야기에 젖었습니다
 단풍 고운 정자 앞 공터에서 노인들도 가을이야기에 젖었습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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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은행잎을 골라 손에 든 아내
 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은행잎을 골라 손에 든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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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남자의 계절인데 당신이 왜 나보다 더 감상에 젖고 그래?"
"계절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담, 이 은행잎 단풍과 낙엽 분위기가 나를 그렇게 만들잖아요?"

아내는 아직도 샛노란 은행잎 낙엽의 감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 아내뿐이겠습니까? 이런 풍경 속에 있으면 누구라도 감상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발길에 바삭바삭 부서지는 낙엽소리가 처량합니다. 봄에 피어난 저 잎들, 봄에는 연초록 싱그러움으로, 여름엔 정열적인 풍성함으로. 가을엔 겨울을 준비하느라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던 것들입니다.

나뭇잎들로서는 한 생을 마감하고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일 테지요. 다음 세대를 위해서 나뭇가지로부터 자신을 훌훌 털고 떠나는 모습이 쓸쓸하지만 어찌 보면 숭고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저리 가볍게 털고 일어날 수 있다면 세상은 한결 밝은 모습이겠지요.

저 하늘 어디 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있겠지요
 저 하늘 어디 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있겠지요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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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가 서있는 언덕에 오르니 노인들 몇이 단풍나무 옆에 둘러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정자 안에는 할머니 두 분이 쓸쓸하게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여름엔 많은 노인들이 모여들었던 정자입니다.

"올해도 다 갔어, 입동도 지났는걸, 세월 참 빠르기도 하지."
"그러게 말이야, 이 언덕에 올라오는 것도 며칠 안남은 것 같구먼."

두 노인이 정자 옆에 서있는 단풍 짙은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습니다.

"며칠 안 남긴? 내년 봄이면 또 올라올 텐데."
"내년 봄?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나? 올겨울을 무사히 넘겨야 내년 봄이 있지."

올겨울을 걱정하는 노인은 다른 노인들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은 듯 창백한 모습이었습니다. 짙게 물들었던 단풍잎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는 계절이어서인지 노인들의 마음도 사뭇 쓸쓸함에 젖어들고 있는 듯 했습니다.

쓸쓸히 앉아 있는 노인의 눈길 끝에는 어느 계절이 머물고 있을까요?
 쓸쓸히 앉아 있는 노인의 눈길 끝에는 어느 계절이 머물고 있을까요?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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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 위로 올라서자 맞은편의 북한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공터 바로 아래는 산동네 주택들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고 어느 집 지붕 위에는 빨아 널어놓은 아기 기저귀들이 옛 풍경인양 정답습니다.

공터 한쪽에는 벤치가 놓여 있고 벤치 위에는 무성하게 넝쿨줄기를 뻗은 등나무 잎이 이제야 조금씩 노란 빛으로 물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등나무 아래 벤치에 홀로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쓸쓸한 모습에서는 벌써 저만큼 다가오고 있는 추운 겨울이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뒷동산, #산책길, #소녀,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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