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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날인 11월 5일, 두 가지 중대 조치를 공개적으로 시사하고 나선 것이다.
 
하나는 만약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가 동유럽 미사일방어체제(MD) 배치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유럽을 겨냥한 중단거리 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한 경고다. 다른 하나는 총리로 있으면서 '상왕(上王)' 역할을 해온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한 수순밟기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연방의회 연설에서 밝힌 이러한 두 가지 조치는 이미 '말싸움을 통한 제2의 냉전'을 시작한 미러관계는 물론이고 세계질서 전반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러시아가 미국의 쇠퇴를 틈타 본격적으로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를 다극체제로 재편하려는 시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냉전의 망령을 불러온 1차 책임은 나토 확대와 동유럽에 MD 배치를 강행하려고 한 부시 행정부에게 있다. 그루지야의 '장미 혁명'과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그리고 코소보 독립의 지지·승인 및 동유럽 MD 배치 등 일련의 러시아 포위정책은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푸틴을 러시아의 영웅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힘을 회복한 러시아는 반격에 나섰고, 힘이 빠진 미국은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푸틴, 2009년 러시아 대선 출마?

 

일단 관심의 초점은 푸틴이 2009년 대선에 출마할지 여부에 모아진다. 이와 관련해 메드베데프는 11월 5일 연설에서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해 주목을 끌었다. 핵심 내용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자유 신장, 대통령 임기 연장(4년→6년), 의회에서 야당의 대표성 강화, 지방정부의 자율성 증대 등이다.

 

이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대목은 대통령직 연장이다. 메드베데프가 내년에 사임하고 푸틴이 대통령직에 복귀하기 위한 수순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크렘린 대변인은 개정된 헌법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메드베데프 국정연설 다음날인 11월 6일, 러시아 언론은 크렘린의 내부 문건을 인용해 메드베데프가 내년에 사임하고, 푸틴이 대선에 출마하는 방안이 이미 논의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메드베데프는 지난 11일 실제로 의회에 대통령 임기 연장안을 제출했다.

 

올해 56세인 푸틴이 2009년 대선에 출마해 당선하면, 그는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연임할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 2021년까지 러시아의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메드베데프가 여러 가지 정치개혁안을 발표한 것은 '러시아가 권위주의로 회귀했다'는 서방세계의 비판에 물타기를 하면서, 푸틴의 대통령직 복귀에 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총리직에서 벗어나 경제위기 책임론을 피하고, 대통령직에 복귀해 오바마의 미국을 상대하는 데 전념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바마

 

오바마의 애칭은 '검은 케네디'이다. 그만큼 미국 국민들의 오바마를 향한 사랑과 기대가 크다. 그러나 오바마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잘 풀지 못하면, '검은 카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바마가 2012년 재선에 실패하고, 신냉전과 신보수주의 시대를 열었던 '레이건의 귀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12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다시 안보를 전면에 앞세우면서 정권탈환을 노릴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러시아의 푸틴이 대통령 권좌에 복귀하는 것은 초읽기에 들어간 분위기이다. 헌법 개정을 통해 2009년에 출마하든, 2012년 대선에 나서든, 그의 복귀는 '여부'가 아니라 '시점'으로 모아지고 있다. 만약 미러간에 '제2의 냉전'이 현실화되고, 푸틴이 재출마해 당선하면, 미국에서 '제2의 신보수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아진다. 오바마의 4년이 너무나도 중차대한 까닭이다.

 

1차 관건은 동유럽 MD이다. 러시아가 미국이 이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유럽을 겨냥한 탄도미사일 배치에 들어가겠다고 공언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계획을 철회하면, 폴란드와 체코의 반발은 물론이고 미국 국내 안보파들로부터 거센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또한 '푸틴과의 기싸움'에서 밀렸다는 비판도 쏟아질 것이다. 한마디로 '오바마의 딜레마'이고, 이 딜레마는 당선 직후부터 불거지고 있다.

 

오바마는 당선 직후 폴란드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가졌다. 그런데 통화 내용에 대한 양측의 설명이 상반된다. 오바마 측근은 양국관계에 대해 폭넓게 논의했지만, 부시의 MD 배치 약속을 재확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크 카크진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오바마가 MD 계획이 계속될 것임을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반된 설명은 MD에 대한 오바마의 입장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오바마는 원칙적으로 MD를 지지하지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기술적인 성능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실전 배치에 앞서 더 많은 시험평가가 필요하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다. 이에 따라 오바마는 카크진스키와의 전화통화에서 MD 계획은 원칙적으로 계속될 것이지만, 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의 입장에서 최선은 부시가 동유럽 MD의 명분으로 내세운 이란 핵문제를 조속히 해결해 동유럽 MD 배치도 전면 재검토하고 러시아의 미사일 배치도 '평화적으로' 막는 것이다. 그러나 이란 핵문제 해결은 대단히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앞으로 미러간의 협상이 주목된다. 러시아는 이미 동유럽이 아니라 이란에서 가까운 아제르바이잔에 MD 배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동유럽 배치를 추진해왔다. 동시에 동유럽 MD 기지에 러시아 관료를 초청해 러시아를 겨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협상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푸틴의 노림수는 한마디로 양수겸장이다. 오바마가 러시아의 요구대로 동유럽 MD 계획을 철회하면 외교적 승리가 되고, 계속 밀어붙이면 푸틴은 이를 명분삼아 미사일을 배치하고 대통령직 복귀를 서두를 수 있다. '제2의 냉전'은 미소 냉전의 승리자였던 미국에게는 패배를 의미하는 반면에, 패배자였던 러시아에게는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제2의 냉전', 한반도 냉전종식으로 막을 수 있다

 

만약 유럽에서 미사일 위기가 재발해 미국과 러시아가 '제2의 냉전'으로 돌입한다면, 그 불똥은 유라시아 동쪽 끝에 있는 한반도에까지 튀게 될 것이다. 반면 한반도에서 냉전이 해체된다면, 미러간의 '제2의 냉전'도 막을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다. 오바마의 미국은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클린턴 행정부 때 MD가 부활하고, 부시 행정부가 거침없이 밀어붙인 중심에는 '북한'이 있었다. 냉전의 해체와 1차 걸프전 승리로 적을 상실한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그 친구들은 북한을 주적으로 삼아 MD 명분을 확보하고자 했다. 안보 공세에 밀린 클린턴 행정부도 MD 구축 검토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0년 들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급진전되면서 클린턴은 MD 구축을 서두르지 않고 차기 정부의 과제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시 행정부는 전임 정부의 대북 협상의 성과는 무시하고, '북한위협론'을 근거로 MD 구축을 천명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는 패트리어트를,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는 지상배치방어(GMD)를 배치했다. 그리고 이란 핵문제가 불거지자, 이를 근거로 동유럽에도 MD 배치를 강행하려고 한다. 냉전이 청산되지 않은 한반도를 MD로 다시 분열시키더니, 냉전이 끝난 유럽에서는 냉전의 망령을 다시 불러오고 있는 셈이다.

 

북핵 해결과 한반도 냉전해체가 '제2의 냉전'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우선 북핵 해결은 동유럽 MD의 구실로 작용해온 이란 핵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다. 북핵 해결을 직접대화와 다자주의를 병행해 시도하는 것은 이란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반면에, 오바마의 이란과의 직접대화 노선을 반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반발을 일정 정도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핵 해결과 한반도 냉전종식이 이뤄지면, 미국이 MD를 추진할 이유도 그만큼 약해진다. '북한위협론'은 MD 구축의 최대 명분으로 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반도 냉전해체의 '넘침 효과(spill-over effect)'는 중동을 지나 유럽까지 갈 수 있다. 북핵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가 빠르면 빠를수록 미국에게도 큰 이익인 것이다.


태그:#오바마, #푸틴,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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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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