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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의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설거지를 함께 하며 모처럼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당시 <피플>에 실린 사진이다.
▲ 망중한 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의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설거지를 함께 하며 모처럼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당시 <피플>에 실린 사진이다.
ⓒ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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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를 훌쩍 넘긴 그들은 여전히 노래한다. 살갑게도 서로를 '신랑', '각시'라고 부른단다. 요샛말로 하면 '닭살 커플'이다. 사랑을 노래하고, 고향을 노래하고, 통일을 노래한다.

"늙어서 그런지 각시라는 말이 따뜻하고 정겹다. 요즈음 우리는 종종 함께 노래를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걸터앉아서 찬송가, 가곡, 유행가를 가리지 않고 1시간 남짓 부른다. 단골 레퍼토리 중에는 '사랑이여', '목포의 눈물', '두만강', '신라의 달밤' 그리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있다"(<동행>388 쪽)

나와 '같은' 가치와의 '동행'

두 사람은 62년 5월 10일 결혼했다.
▲ 동반자 두 사람은 62년 5월 10일 결혼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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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저자 이희호는 '그녀'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라는 대명사가 갖는 차별성과 일본식 번역이라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그'라고 호칭한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그'의 남편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착오 없으시길 바란다.) 결코 가부장제적인 전통 아래의, 내조만을 직업으로 삼는, 이름 없는 '김대중의 안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전인격의 발현인 이희호다. 하지만 그는 김대중의 동지였고, 김대중의 평생 반려였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불과 얼마 뒤의 일이다.

"휠체어에 일주일, 바퀴 달린 보조 보행 기구로 일주일을 보냈다. 매일 퇴청 후 들르는 남편이 농담을 했다. '당신이 나를 무척 사랑하는가 봅니다.' '아픈 사람에게 웬 사랑 타령이세요.' '나를 얼마나 좋아하면 고관절까지 따라서 다치니 말이오.'"(332 쪽)

물론 농담일 것이다. 하지만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그 의미는 남다르다. 그들은 '사소한' 고통마저도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나는 겨울이라도 안방에 불을 넣지 말도록 일러두었다. .....식구들은 내가 안쓰러운지 자꾸 불을 넣으려고 했다."(173 쪽)

'유신독재' 시절의 일이다.

"(1980년) 12월 초순이 제일 힘들었다. 카터와 레이건의 정권 인수 기간 사형설이 끊임없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즈음 나는 머리숱이 한 웅큼씩 빠져 가발을 쓰고서야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칼날 위에서 산 시간들이었다."(221 쪽).

'김대중 내란음모'가 아닌 '전두환 내란' 사건 때의 일이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격리되더라도 단 일분일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지금은 유명해진 900여 통의 옥중서신이 그 증거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평등했다. 자택의 공동문패다.
▲ 동행 두 사람은 처음부터 평등했다. 자택의 공동문패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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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둘은 처음부터 평등했다.

"'우리 대문에 당신과 내 문패를 나란히 답시다.'
'.....?'
‘부부는 동등하다는 걸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입시다.'"(118 쪽)

여담이지만 지난 10월 동교동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뵙는 자리가 있었다. 그 때 나는 "제가 태어나던 해가 1963년인데, 그때 처음 동교동으로 이사오셨더군요?" 했더니 조용히 웃으셨다.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인 45년 전의 일이었다. 부부 공동문패는,
"옥중서신의 서두인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와 함께 우리 부부의 동반자관계를 설명하는 상징이 되었다."(119 쪽)

예수님을 믿는 그들에게 적합한 표현이 될지는 의심스럽지만, 그들은 철저한 '인과'와 '인연'에 묶여있다. '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나'의 외로움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는 철저한 실존이다.

전두환 내란 정권은 그들을 집요하게 회유했다. 그의 독백성 질문이다.

"만약 그 때 거듭된 고난으로 지쳐서 집요한 회유에 굴복하고 협력했더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비루해졌을까."(205 쪽)
"나도 인간인데 어찌 살고 싶지 않았겠소. 해외로 나가 가족들과 조용히 살까 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205 쪽).

김대중의 답이다.

그래서 그들은 끝내 이기고 승리했다. 마침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됐다.

"당신이 없었으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겠소."(323 쪽)

1997년 그날의 기쁨을 이 정도로만  표현했다.

6.15공동선언 5주년을 맞이해 독일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김대중-이희호 부부. 외국 언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이라고 보도했다.
▲ 고난과 영광 6.15공동선언 5주년을 맞이해 독일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김대중-이희호 부부. 외국 언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이라고 보도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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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사실상의 '공동 수상'임을 인정한 외국 언론이 있었다. 중국의 인민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스다이차오(時代潮)>는 이렇게 논평했다.

"이희호 여사는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노력을 평생 대통령과 함께 해 온 만큼 노벨 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이다."

앤소니 기든스가 그랬던가? 우리 시대의 결혼은 친구 같은 동지적 결합과 세상에 맞서는 진지를 구축하는 듯한, 그런 형태의 두 가지 결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친밀성의 구조변동' 혹은 '고전적 의미의 사랑의 결핍'이다. 그들은 이런 구분마저도 사랑의 힘으로 통일시켰을까?

"2007년 9월 내 생일에 평생 처음으로 남편에게서 옷 선물을 받았다. 그와 함께 직접 의상실에 갔다. 이것저것 입어보고 그가 좋아 보인다고 말하는 걸 맞추어 입었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다."(386 쪽)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침대에 걸터앉아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걸까?

나와 '다른' 가치와의 동행

그는 끊임없는 차별과 공포에 시달렸다. 그와 김대중은 어쩌면 사랑의 밀어조차도 속삭일 수 없었으리라. 입이 있되 말할 수 없었다. 때때로 필담만이 유일한 대화였다. 대화를 위해서 학교도 아닌 가정집에 칠판이 필수가재도구였다.

그는 끊임없는 감시와 도청과 미행과 격리, 연행, 폭력, 구속, 고문 등 국가폭력 시대와 동행했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동행했다. 사실 모교인 이화여대조차도 그를 졸업생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나도 이대 졸업생이에요.' 청와대 시절 어느 날, 대통령 행사에 참석한 당시 장상 이화여대 총장에게 내가 넌지시 말했다. 이화여대에서는 그 후 부랴부랴 자료를 찾고 증언을 들어 졸업생으로 인정하고 명예박사 학위(철학)도 주었다."(60 쪽)

정치적 조작에 따른 지역감정 그리고, 그에 따른 차별은 인용하지 않겠다. 다만 그들은 부정선거와도 동행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운명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 후보가 첫 출마한 1971년, 그는 주소지인 동교동 제1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쳤다. 그런데 "우리 표를 포함해 2000여 매가 무효로 처리되었다. 선거관리위원장의 법정 도장이 아닌 다른 도장을 찍은 투표용지였다는 것이다."(109 쪽)

이희호씨(왼쪽에서 세번째)가 윤보선-공덕귀 부부와 아들 김홍업, 김상현, 권노갑씨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 주도 혐의로 체포된 김대중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 동지 이희호씨(왼쪽에서 세번째)가 윤보선-공덕귀 부부와 아들 김홍업, 김상현, 권노갑씨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 주도 혐의로 체포된 김대중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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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었다. 김대중을 정치적으로 돕는다는 이유만으로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상도동 비서는 국회로 가는데 동교동 비서는 형무소로 간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보통 사람들은 동교동에만 다녀가면 다음날 해고됐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헌신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과도 늘 동행해야 했다.

"(1974년 김홍일씨 결혼식) 고심 끝에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 양가 직계가족만 참석하기로 하고 정일형 박사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비가 그치지 않아 거실에서 식을 올렸다. 집 밖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경찰과 정보원이 하객보다 많았다."(151 쪽)

대통령에 당선된 1997년 12월 19일, 그의 표현은 이렇다.

"이 순간부터 '미행'이 '경호'로 바뀌었다."(320 쪽)

그렇다고 '나와는 다른 가치', 독재와 국가폭력, 부정과 부패, 거짓과 기만이 판치던 시대에도 진정으로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시민'이 있었다. '국민'이 늘 그들과 함께 했다. 그래서 그는 늘 가장 소외되고 힘든 삶을 꾸려가는 일들과 함께 했다. 그렇게 함께 하면 고통도 때론 즐거웠다.

그렇게 해서 '그날'이 왔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10 항쟁이 있었다. 1987년 "남편의 나이 이제 62세, 박정희가 18년 집권하고 운명한 나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야 출발선에 다시 선 것이다. 나 역시 자유로워져 1987년 7월부터는 다이어리가 존재한다. 나는 그동안 압수수색이 두려워 기록을 하지 않고 살았다. 사화가 많았던 조선 시대에 글을 숭상했으면서도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277 쪽)

비로소 나의 언어와 나의 글을 찾았다. 나와 다른 가치와 동행하면서 끝내 떨쳐내고 비로소 '모국어'를 되찾은 것이다.

우리시대의 '새로운' 역할 모델

우리 사회에 정치인 아내로서의 역할 모델, 좁게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적절한 역할 모델이 있을까? 일부 언론이 제시하는 대로 현모양처 형의 '신사임당 모델'은 어떠한가?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육영수 여사 모델'은 어떠한가? '여성 정치인'이 아닌 '정치인의 동반자'로서, 이 두 모델 말고 새로운 모델의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여성운동가였다. YWCA 총무를 지낸 사회운동가였다. 1950년대 이미 미국유학을 마친 보기 드문 인텔리면서도 강단과 운동 사이에서 운동을 선택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 빈곤과 노동 등 사회적 차별에 분노하고 행동했다. 김대중의 아내가 아닌 독자적인 '이희호'로 활동하던 1960년대 10년여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성평등의 기틀을 마련한 1989년의 '가족법 개정'에 대해 그렇게도 기뻐한 그였다. 청와대에서의 대부분 활동도 사회복지 관련 분야였다.

감대중 도쿄 납치생환 기념미사에 참석해 기도하는 김대중-이희호 부부.
▲ 생환 감대중 도쿄 납치생환 기념미사에 참석해 기도하는 김대중-이희호 부부.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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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그는 자칫 김대중이라는 큰 그늘 아래 잊혀지기 쉬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두 아이를 둔 '홀아비'를 반려로 선택했었다. 그럼에도 그는 같은 것은 함께 하되, 다른 것은 분명 다른 길을 걸었다. 주일이면 "그(김대중)는 두 아들과 서교성당으로 가고, 혼자 창천교회로 간다"(120 쪽)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와대 시절 그는 스스로 '영부인' 대신 '여사'를 선택했다.

"각료의 배우자를 임명장 수여식에 초청해 함께 참석하게 했다. 공직을 수행하는 엄숙함을 부부가 공유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322 쪽).

평등의식과 공적 책임을 일관되게 지켜온 '여성운동가'의 자세다.

그는 독립적 퍼스트레이디의 역할 모델로서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여사에게 애착을 갖는다. 미국 유학 시절인 1957년, "그와 악수하던 손의 따뜻한 감촉이 생생하다. 나는 유엔 '세계인권선언'을 주도했던 그를 존경했으므로 뜨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여성과 흑인 등 소수자 그룹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이였다. 피부색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그의 메시지는 강렬했다."(49 쪽)

그는 또한 힐러리 클린턴(Hilary Clinton)에 대해 애정을 드러낸다. 더구나 힐러리도 "엘리너를 가장 존경하는 영부인으로 꼽는다. 백악관 시절에 미국의 낙후된 의료보험을 개혁하려다 힐러리가 부딪힌 저항과 좌절 그리고 언론과의 불화를 보면 미국에서도 이제 엘리너 루스벨트 같은 퍼스트레이디는 나오기 쉽지 않을 것 같다"(52 쪽) 그가 꿈꾸었던 퍼스트레이디의 역할과 못다 이룬 미련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읽혀진다.

우리 시대의 바람직한 퍼스트레이디 모델을 위해 조금만 부연해보자.

"내(힐러리 클린턴)가 과감하게 발을 내딛고 보면, 그곳에는 벌써 그분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엘리너는 민권, 아동 보호, 난민, 인권 같은, 나한테 중요한 문제들을 많이 옹호했다. 엘리너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나름대로 규정하려 든다는 이유로 언론과 정부 일각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공산주의 선동가라는둥 참견쟁이 할망구라는둥 온갖 험담을 들었다."(힐러리 로댐 클린턴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 10 쪽)

다음은 이런 모델의 반대편에 있는, 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 여사에 대한 재밌는 인상기다.

"그(부시)는 포크로 장난을 하다 포도주 잔과 부딪쳐 '쟁' 소리가 나자 잘못을 저지르고 혼날까 봐 엄마를 쳐다보는 아이처럼 부인 쪽을 보았다. 로라 여사가 콧잔등에 손을 얹으며 눈으로 ‘제발’ 하고 타이르는 모습이 재미있었다."(372 쪽)

과문한 탓이겠지만,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여사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 '영부인', 또는 '여사'의 회고록다운 회고록이 출판됐을까? 대통령의 아내로서 전통적인 내조에 묻히고 말진 않았을까? 앞으로 어느 퍼스트레이디가 이 책을 뛰어넘는 삶과 공생애에 대한 자서전을 펴낼 수 있을까?

이희호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
▲ <동행> 이희호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
ⓒ 웅진지식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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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자서전은 '내조 기록'이 아니다. 공적 생애에 대한 기록이다. 한 여성운동가의 자서전을 뛰어넘어 한 '휴먼 비잉(human being)'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은 끊임없는 공작정치시대의 슬픈 기록이다. 국가폭력 시대를 살아온 산 증인이 슬픔과 분노와 희망으로 쓴 기록이다. 민주화 운동기와 정치적 시민혁명의 또 다른 기록이다. 시대와의 동행, 현대사와의 동행기다.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들과의 동행 기록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자서전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우리의 미래를 사는 사람들에게 한 삶의 모델로 작용하길 희망한다. 감히 세상의 절반인 딸과 어머니들이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데 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어쩌면 '이희호 모델'을 기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마지막이다.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최후의 독후감은 이렇다.

'이 책으로 그의 삶은 한 사람의 아내라는 '일상성'을 뛰어넘어, 비로소 '보편성'을 획득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역사 속으로 자랑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덧붙이는 글 | 그는 오늘(11일) 자신의 85년 생애와 그와 함께 한 46년의 동행을 4년 동안 정리한 <동행> 출판기념회를 서울 여의도 63빌딩 2층 국제회의장에서 갖는다.



태그:#김대중, #이희호,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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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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