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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럴 줄 알았다. 뭔가 허전했다. 지난 8월 국방부가 '야심 차게' 발표한 '불온도서' 23선 말이다. 24선이었어야 했다. '불온' 중에서도 지능적으로 '불온'한 도서 한 권이 빠졌던 거다. 제목부터 '불온'하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오마이뉴스> 해외통신원으로 미국 소식을 전하고 있는 미디어학자 강인규가 바라본, 생경한 미국 이야기다.

눈만 뜨면 신문이나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미국' 이야기지만 합리적인 시각을 갖춘 것들은 많지 않다고 강인규는 말한다. 미국은 그래서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라고. 그런데 왜 하필 스타벅스 일까.

지난해 말까지 내가 살았던 도시, 파리에도 흔하지는 않지만 스타벅스가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에서도 특히 인파가 몰리는 구역은 개선문으로부터 링컨가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1km 남짓. 미국의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맥도날드와 커피숍 체인점 스타벅스도 이즈음에 자리했다.

갓 취업한 아르바이트생조차 거리낌 없이 '찍어내는' 음식

소설가 하재봉은 장편소설 <콜렉트 콜>에서 '가난한 여행자들이 가장 저렴하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맥도날드를 이용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샹젤리제 맥도날드는 늘 북새통이었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일수록 패스트푸드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맥도날드는 부자와 빈자를 구별하는 바로미터 중 하나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샹젤리제의 맥도날드도 태반이 아랍, 아프리카계 이민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파리 시내보다는 시 외곽(방리외) 거주 프랑스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맥도날드의 패스트푸드는 여타 간이음식점의 음식보다 덜 비싸지 않다.

지난해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47개국 환율을 맥도날드 '빅맥' 햄버거 가격으로 환산해 비교하는 '빅맥 지수'를 발표했다. 1위의 아이슬란드는 7.61달러, 14위의 미국은 3.41달러 그리고 한국은 3.14달러로 16위를 차지했다. 4천원이 넘는 돈이다. 돈이 없어 햄버거로 끼니를 때웠다는 말은 그래서 핑계에 불과하다.

품질 대비 가격의 문제도 있겠으나 내가 특히 맥도날드의 패스트푸드를 기피하는 이유는 '규격화'다. 빵과 상추, 패티 심지어는 케첩의 양까지 정해진 규격에 따라 '조립'되는 햄버거는 오늘 갓 취업한 아르바이트생조차 거리낌 없이 '찍어낼' 수 있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대량생산되는 공산품과 다를 바 없다.

맥도날드 뿐 아니라 이를테면 '셰 끌레망'이나 '비스트로 로맹'과 같은 프랑스의 유명 레스토랑 체인점을 내가 기피했던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레스토랑 체인점들이 똑같은 질과 양의 고기에 똑같은 소스를 부어주는 모양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같은 이유로 나는 샹젤리제의 스타벅스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다. 굳이 스타벅스가 아니더라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는 사방에 널렸던 거다.

'된장녀' 여파로 '발견'한 스타벅스

좀더 솔직해지자. 한때 대한민국을 뒤흔든 '된장녀 신드롬'을 나는 프랑스에서 들었다. '된장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해방된 파리에서 벌어진 '야비한 카니발(마르탱 브로사)'이었다. 나치 독일이 전쟁에 패하고 물러난 1944년의 여름, 머리를 박박 깎인 여성들은 거리로 내몰려 이른바 '조리돌림'을 당했던 것. 점령 프랑스에서 독일인 병사를 사랑한 여성들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꼴라보(대독협력자, 프랑스판 친일파)들조차 너나없이 레지스탕스로 둔갑하는 마당에 매를 맞은 것은 여성들이었다. 해방의 기쁨과 배신자 처벌로 들뜬 분위기에 휩싸인 군중은 이렇게 나약한 자부터 응징했던 것. 프랑스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다. 

거시적 안목으로 볼 때 이 사회에 악덕을 행하는, 하고많은 무리 중 하필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희생양 삼아 억압을 분출했다는 점에서 해방 프랑스의 삭발 당한 여성과 대한민국의 '된장녀'는 닮았다고 생각했다.

각설하고, 이른바 '된장녀'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 속에 스타벅스는 상위에 랭크돼있었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었을 스타벅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였다. 샹젤리제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하게 된 계기도 순전히 '된장녀' 여파였다는 말. 아니었다면 눈에 띌 만한 외형을 스타벅스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샹젤리제의 한산한 스타벅스를 바라보며 의문은 증폭됐다.

강인규는 이렇게 말한다.

"자판기 커피를 비운 종이컵에 가래와 담뱃재를 터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터프가이'들로서는 '똑같은 커피'에 4천 원 이상의 '거금'을 쓰는 여성들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스타벅스 커피가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소문(물론 사실이 아니다)은 이들이 이른바 '된장녀'들을 공격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나는 스타벅스에서… 22쪽)"

지난해 7월 잠시 귀국한 나는 홍대 앞 스타벅스를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으나 문을 열고 들어가 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체인점에 대한 불신과 함께 '된장녀 파동'이 내 뇌리에는 꽤나 오래 남았던 모양이다. 동시에 호기심 하나로 시도해볼 만큼 스타벅스라는 공간이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커피보다는 커피를 마시는 자신에 취해 있는 듯

전면이 유리로 장식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스타벅스의 조명은 눈이 부실만큼 밝았다. 흥미로운 것은 스타벅스를 채우고 있는 고객이었다. 선입견일 수도 있겠으나 빈 자리 하나 찾을 수 없이 왁자한 홍대 앞 스타벅스의 고객들은 하나같이 세련돼 보였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짐작컨대 압구정동 스타벅스와 똑같은 맛의 커피를 마신다는 것 이외에 특유의 즐거운 표정이었다. 공간이 주는 쾌적함을 십분 즐기는 듯 보였는데 이것은 내게 미국의 사회비평가 어니스트 반 덴 하아그의 '미술관 속물취향(snobbery)'을 연상케까지 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동기에서 사람들은 미술관을 드나들겠지만 미술관의 보물을 보고 즐기는 데는 속물취향이 한몫한다는 이론. 반 덴 하아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관의 그림을 본다기보다는 그 그림을 보는 그들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며 '그들이 실제로 보는 것은 화가가 그린 그림 자체가 아니라 화가의 명성과 명패일 뿐'이라 했다.

홍대 앞 스타벅스의 고객들은 커피보다 담소보다 스타벅스의 커피를 마시고 있는, 혹은 스타벅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자신에 취해있는 듯 보였다면 과장일까. 같은 맥락에서 시인 허연을 인용한다.

허연은 신작 시 <파이트 클럽>에서 '내 진짜 모습은/ 스타벅스 커피와/ 스웨덴제 가구와/ 흰 셔츠에 넥타이'라 노래했다. '스웨덴제 가구', '흰 셔츠에 넥타이'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는 걸 보면 스타벅스 커피는 격조인 동시에 자조다. 시인에게는 자조에 더 가까웠으리라.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저자와 함께 들어간 스타벅스

이런 내가 스타벅스의 문턱을 넘은 일이 있다. 그것도 스타벅스가 영업을 시작하는 아침 7시까지 거리를 배회한 끝에. 어쩌자고 그랬을까. 이게 다 <나는 스타벅스에서…>의 저자 강인규 때문이다. 지난 2005년부터 <오마이뉴스>가 매년 개최하고 있는 세계시민기자포럼 기간이었다. 강인규는 지난해 발제자 자격으로 포럼에 참가했다. 발제가 끝난 날 밤에는 술판이 벌어졌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강인규와 나는 새벽 6시가 넘는 시간까지 술을 먹고 있었다. '동지'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술집에서 가까운 숙소로 돌아가기 직전 강인규는 불쑥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지자고 했다.

평소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는 이만큼 솔깃한 제안도 없었겠지만 동시에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지성'으로 무장한 듯한 남자 강인규가 스타벅스에? 편견으로 점철된 발상이지만 '강인규 같은 남자'는 스타벅스 '따위'에 눈길도 주지 않을 줄 알았던 거다. 뒤통수를 맞았다 할까.

그냥 밤을 새도 힘겨운데 술까지 먹어 노곤할 대로 노곤해진 나이 마흔 주변의 두 남녀는 그리하여 인근 스타벅스의 문을 두드렸다. '오늘의 영업'까지는 30분 가량이 남았으니 그때 다시 들러달라고 종업원은 친절하게 말했다. 강인규는 밖에서 기다리자 했고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취향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니까. 그리고 새로운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30여 분을 서성인 끝에 우리는 당당히 스타벅스에 '입성'할 수 있었다.

강인규에 따르면 스타벅스의 커피 맛은 괜찮은 편이지만 결코 뛰어나지 않다. 스타벅스는 그러나 '좋은' 커피가 아닌 '다른' 커피를 판다고. 다양한 에스프레소 음료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커피마저 오래 볶은 원두를 사용해 미국인들이 전에 보지 못한 진한 커피를 만들어낸다는 것.

한편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담아주는 일회용 컵은 '그란데', '벤티'와 같은 이탈리아어로 불리고 있을 뿐 아니라 커피 또한 '카페모카', '카페라떼', '캐러멜 마키아또' 등 생소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미국적 생활양식'을 전파하며 '세계화'와 동의어가 된 맥도날드와 달리 스타벅스는 '미국화된 유럽'을 전 세계로 재수출하고 있다고 할까.

미국에서조차 '이국적'으로 통하는 스타벅스의 분위기는 유럽의 카페문화에 오히려 가깝다. 강인규에 따르면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커피숍'이라는 공간은 생소했다. 커피는 식당이나 집에서 음식과 더불어 마시는 '기능성 음료'에 가까웠고 유럽이나 한국과 달리 미국에는 찻집에서 친구들과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애당초 스타벅스는 전혀 미국적이지 않은 기반에서 시작된 거였다.

스타벅스는 철저히 '무관심을 파는 커피숍'

이런 추측을 뒷받침 하는 농담을 나는 파리에서 들은 일이 있다. 커피 '아메리카노'의 기원에 얽힌 진담 같은 농담. 이탈리아인들에 따르면 '커피 맛을 알 리가 없는 미국인 관광객'들이 로마를 산책한 뒤 찻집에서 커피를 주문하곤 했다. 이탈리아에서 커피는 에스프레소다.

짙은 보리차 같은 묽은 커피에 익숙한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에스프레소 특유의 쓴맛은 견딜 수 없었을 터. 미국인들은 급기야 에스프레소와 함께 온 물을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찻집 주인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타서 내놓으며 '아메리카노'라 불렀다. 물론 가격은 에스프레소의 두 배.

앞서 나는 스타벅스를 일러 '미국화된 유럽'이라 했다. 전혀 미국적이지 않은 유럽을 미국의 지형에 맞게 변형시켰다는 말인데 지난 2006년 8월 13일자 <워싱턴 포스트>의 사설을 보면 명확해진다. <워싱턴 포스트>의 파리 특파원은 '파리지앵의 주된 활동은 카페에 죽치고 앉는 것'이라 했다. '그 누구도 프랑스인보다 잘 할 수 없는 특기가 바로 카페에 앉아 시간 보내기'라며 이것은 곧 '빈둥거리기의 미학'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다.

"… 파리지앵들은 일이나 조깅을 하는 대신 카페에 앉는다. 일렬로 늘어선 카페의 의자들은 극장과도 같은 파리의 거리를 향해 열려있다. 의자에 앉은 프랑스인의 자세는 지극히 여유로워서 툴루즈 로트렉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은 파나셰(맥주와 레모네이드의 혼합주)를 마시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 흥미를 자극한 것은 사설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최첨단 산업 도시에서 날아온 미국인 특파원은 이런 프랑스인들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그런데 왜 그들은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 자문하며. 미국인 특파원은 카페의 프랑스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해주기를 바랐던 걸까.

"무선인터넷이 설치된 카페라는 작은 안내문이 붙어있는 카페에 앉은 파리지앵 중 어느 누구도 노트북을 소지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미국에서처럼 과중한 업무가 동반되지 않은 일상은 시간낭비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인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사치가 바로 '시간'이라는 것을 여전히 간파하지 못한 '신세계'의 특파원은 '문제'의 사설을 이렇게 마무리 했다.

"프랑스인들은 단지 크루아상을 '발명' 한 후 인간문명의 황혼을 기다리고 있다."

유럽식 커피숍을 표방했다는 스타벅스는 그래서 전혀 유럽적이지 않은, 실용적인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인들 다수는 커피숍에 혼자 와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간다. 한국이나 유럽의 커피숍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마 미국 커피숍의 적막함에 놀랄 것이다. 신문을 뒤적이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노트북을 들여다본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매장은 구석구석마다 전원코드를 마련하고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다. 손님들 가운데 상당수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강력한 '대화의 매개체'를 컵에 담아주더라도 입을 열기는 어려울 것이다.(나는 스타벅스에서… 19쪽)"

세계시민기자 포럼이 끝난 후 나는 강인규를 부산에서 다시 만났다. 강인규는 이번에도 해운대 스타벅스로 나를 인도했다. 서너 시간 전부터 스타벅스에 죽치고 있으니 '알아서' 찾아오라는 '친절한 명령'과 함께. 물어물어 스타벅스를 찾아갔더니 무심한 강인규는 왁자지껄한 공간 속에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앉아있었다. 노트북에 코를 박고 연신 자판을 눌러대며. 강인규에 따르면 스타벅스는 철저히 '무관심을 파는 커피숍'이었던 거다.

"미국인들은 돈을 내고 산 무관심의 안락함 속에서 제 할 일을 하다 소리 없이 하나둘 일어섰다.(나는 스타벅스에서… 24쪽)"

강인규와 함께 감행한 두 차례의 스타벅스 '탐험' 끝에 나는 마침내 스타벅스와 화해할 수 있었다. 편견의 눈으로만 스타벅스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모든 미국영화는 쓰레기라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후 혼자서 딱 한 번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셔봤다. 그러나 두 번은 못 가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타벅스를 나왔다. 스타벅스의 쾌적한 환경에서는 커피와 함께 하는 담배 한 모금의 기쁨이 '민폐'가 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진지한 학문 탐구 대상이 된 소소한 일상

나는 앞서 강인규의 <나는 스타벅스에서…>가 불온하다고 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만 마시면 될 것을, '화장실 줄서기' '재채기', '미국인들의 연애'와 같은 소소한 일상이 진지한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액면 그대로 말하자면 저서는 스타벅스로 시작해 스타벅스로 끝난다. 총 25개의 '불온한 상상'으로 구성된 저서는 그러나 시작과 끝에서 단 두 번 스타벅스를 말한다. 때문에 '정교분리'나 '미국의 대통령 선거', '의료제도' 등에 관한 23개의 '불온한 상상'이 스타벅스의 구석 자리에 앉은 한 남자의 단상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스타벅스에 앉아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 미국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글 여기저기서 저자의 '사소한 일에 목숨 걸기' 근성이 발휘되는데 이것은 저자가 '글을 쓰는 내내 소심한 눈을 유지하려 애쓴' 결과일 터. 남자의 성격을 말할 때 '소심함'은 악덕이나 동시에 사람과 사물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하는 미덕이라고 저자는 믿기 때문이다.

강인규의 또 다른 미덕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섬세해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내용을 기품 있는 문장으로 보완할 줄 안다는 거다. 기품 있는 강인규의 문장은 '겸손한' 시선을 통해 빛난다. 책에서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 이외에 닮고 싶은 문장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주는 덤이다. '문장은 곧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 미국, 미국 문화 읽기

강인규 지음, 인물과사상사(2008)


태그:#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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