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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과 관련해 일본의 주장을 뒤집는 문서가 공개됐다.

 

<조선일보> 4일자 보도에 따르면 독일 외교부 장관 키데를렌-베히터 보고서로 불리는 이 문서는 빌헬름 2세도 읽고 서명했다. 특히 이 자료는 당시 구미 열강이 모두 한일합방을 승인했다는 일본측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다.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정상수 교수가 공개한 이 문서는 “한일합방이 되더라도 한국에서의 영사재판권과 수교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시 독일의 주장이 담겨있다.

 

이 문서는 합방 조약이 발표되기 이틀 전인 1910년 8월 27일 독일제국의 신임 외교부 장관 키데를렌-베히터가 총리 베트만-홀베크에게 보낸 보고서로, 황제 빌헬름 2세도 이 문서를 읽고 서명을 남겼다.

 

한편 이와 관련해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고종의 행동을 둘러싼 논란이 많다. 그러나 최근 자료에 의하면 고종 역시 한일합방을 일본의 억지와 강제에 의한 부당한 조약으로 인식, 끝까지 저항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앞서 고종은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체결한 을사조약 역시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얼마 전 출간된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을 보면 당시의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고종은 을사오조약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국왕이 날인하지도 수결하지 않은 조약을 어찌 유효라고 할 수 있는가. 더욱이 저들이 국새를 훔쳐 찍었으니 절대 국가 간 조약이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협박이요, 강압에 의한 국권 탈취였다. 그래서 고종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재위 43년 동안 외우내환의 대다수가 일제 침략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500년 조선 왕조의 최후

 

경술국치, 소위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것은 1910년 8월 22일이었다. 일본은 일주일간 이를 극비에 붙여 두었다가 8월 29일에야 공포했다. 음력으로 7월 25일이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사사건건 자신들의 일에 반대하던 고종을 덕수궁에 연금해 이태왕이라 부르고 순종은 창덕궁에 유패시켜 이왕이라 부르게 됐다.

세월이 물 흐르듯 하여 경술년 음력 7월을 맞게 되었다. 나라가 망한 것이다. 통감 데라우치가 조선 총독이 되고 국호는 대한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바뀌었다. 금상 황제(순종)는 격을 낮추어 이왕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한일합방을 민의에 의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일진회로 하여금 합방 상소문을 올리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 민중의 요구에 의해 한일합방이 된 것처럼 꾸민 것이다. 기가 막힌 노릇이요, 500년을 이어온 조선 왕조의 수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일본의 앞잡이가 되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있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고자 스스로 앞장선 것이다. 경술년 7월 대한이 망한 뒤 작위를 받은 사람이 모두 72명이다.

고려가 망할 때 이성계의 새 왕조에 봉사할 수 없다하여 두문동에 은거해 지조를 지킨 충신이 72명이었다. 이를 두문불출이라 하며 두문불출한 충신을 고려 충신 72현이라 불렀다. 정확히 말하면 90명이었다. 그러나 12명은 이름이 전하지 않아 72명이라 칭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왕조가 망할 때는 왜 이다지도 반대 현상이 일어났을까? 충신 72명도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매국노 72명이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 왕조가 멸망할 때 일제가 주는 치욕의 작위를 받은 매국노의 총수는 76명, 그 중 2명이 거절하고 6명이 반납했으니 실제 그 수는 68명이었다. 거기다 뒷날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4명이 탈락해 64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수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나라와 민족이 짓밟히고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운 사리사욕에 있다. 그러고도 조선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염치 좀 있으세요? 부끄러움을 알자!

 

이제 몰염치에 대해서 말해보자. 몰염치. 국어사전을 보면 ‘염치가 없음’을 뜻한다. 염치란 무엇일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바로 염치다. 그렇다면 몰염치는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이다.

 

간혹 ‘친일파 재산 환수’와 관련한 뉴스가 방송되곤 한다. 알다시피, 친일파 문제가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친일파=상류층’으로 인식되곤 한다. 물론 예외인 경우도 많다.

 

문제는 친일파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염치가 없다. 상식대로라면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야 옳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따지고 묻는다. “우리 재산을 돌려달라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냐? 당신들도 그렇게 했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제 화가 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그런 몰염치한 인간들에게, 제대로 된 나라와 법을 만들어주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제발, 염치 좀 있게 살자. 염치없던 인간들로 인해 망했던 조선 왕조를 기억하자.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

박성수 지음, 왕의서재(2008)


태그:#조선, #고종, #한일합방, #남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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