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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떨어지는 낙엽에서 세월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 시인은 은행나무 밑에서 노랗게 늙어가는 나이듦을 노래했지만, 아직도 푸른 풀 내음이 더 좋은 것을 어찌할까? 노란 것은 노랗게 빨간 것은 빨갛게 파란 것은 파랗게 익어가는 것이 가을인데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푸름을 뽐내고 있는 가로등 아래의 콩잎들이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기쁜 일인가? 아니면 슬픈 일인가? 한 여성학자는 나이듦에 대한 미학을 이야기하였지만 나에겐 전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큼 앞으로 살기 어려운 나이가 된 후의 느낌은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다. 이제 하나씩 둘씩 버리면서 생의 마감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오히려 더욱 커진다. 건방지게도 아니 어줍게도 말이다.

 

자만인지는 몰라도 나의 삶이 세월을 낭비하며 살아온 삶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리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가 나에게 자꾸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내 등 뒤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산다는 것은 나를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진작부터 생각을 해 왔건만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다가온 오십대의 나이가 너무 부담스럽다.

 

모를 일이다. 그렇게 고민한다고 이렇게 준비한다고 아름다운 죽음을 거룩하게 맞이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죽음은 어차피 비극이고 초라해지기 마련인데. 마지막 숨을 막 몰아쉴 때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일까? 이별일까? 그리움일까? 아니면 고통이나 두려움일까? 하기야 죽는 사람에게 이러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마음의 미망(迷妄)들이 한 동안 내 뇌리를 지배한다. 그렇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삼겹살 한점에 한 잔의 소주를 마시자 뇌가 하얗게 비어버린다. 그래 맞아. 내가 죽는 순간에 나의 뇌를 하얗게 비워 놓는 것이 바로 나의 영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내 영혼을 괴롭히고 수없이 더럽혔던 생각과 행위를 다 지워버리는 것이 바로 죽음 직전에 해야 할 마지막 나의 일이다. 뇌의 모든 기억들을 휴지통에 비워놓고 다시 포맷을 하는 것이다. 아니 나이가 들어가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몸도 마음도 비우는 것이리라.

 

이런 준비작업이 바로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동안 나로 인해 빚어진 온갖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고 닦아내는 일들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기억을 백지상태로 비울 수가 있다. 심리학자에 따르면 우리는 기억하기보다는 잊어버리기 더 어렵다고 한다. 흔히들 망각이 쉽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잊어버리기가 어렵고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 더 사는 시간이 덤이 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준비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조금 나이를 먹어가면서 별별 생각을 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어쩌랴? 마음 따라 마음 길을 함께 걸어갈 수밖에. 다시 돌아올 내년 가을을 맞이하는 자세를 조금이라고 정숙하게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수밖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작은 화두(話頭)라도 붙들어 잡고 잠 설쳐가며 끙끙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뼈다귀 하나에 생명을 거는 강아지처럼 살아온 지난 세월과는 달리, 기름진 뼈다귀를 보고서도 초연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혹시 저승길 떠나는 길에 놓여있는 유혹과 미혹에 눈멀지 않고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말이다.

 

가을이면 생각나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가 오늘은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오늘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면서 자주 가는 술집 좌석을 예약하라고 여러 번 당부하던 아내의 모습에서 나이듦에 대한 조급함이 잠시 드러난다. 2시간이 훨씬 넘게 걸리는 통근을 20년 동안 통근한 아내에게 삶의 진지함이 두려울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같이 늙어가면서 같이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음의 미학을 조금이라도 덜 부담스럽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가? 이 가을 이 나이에 30년 전의 노래를 같이 떠올릴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가? 아름답게 그리고 즐겁게 또한 우아하게 삶의 모서리를 무딘 정으로 다듬어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잠시 미치도록 화려하게 물든 감잎이 나를 앞세우고 저만치 멀어져 간다.

 

오늘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들으면서 잊혀진 기억들을 안주삼아 아내와 소주나 한잔 해야겠다.


태그:#잊혀진 계절, #죽음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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