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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창덕씨.
 서창덕씨.
ⓒ 강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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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 제가 간첩이라고 해 갖고 형제간도 떠나불고, 출소해서 어렵게 찾은 아들도 간첩 아버지 둔 적 없다고 만나주지 않았어요. 제 소원이 있다믄 형제간들한티 이제 간첩 아닝께 나랑 따뜻한 밥한끼 먹자고 하고 싶고, 아들한티도 아부지 소리 한번 듣고 잡습니다. 눈물빽에(밖에) 없는 저의 억울함이 풀어지게 판사님이 도와주세요."

지난 24일 오후 2시,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형사합의부, 판사 정재규) 법정에서는 '개야도 납북어부 조작간첩' 서창덕씨의 눈물어린 최후진술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오늘 10월 31일, 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이날 오후 4시, "장기간에 걸친 수형생활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이 심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며 "본 법원의 이번 무죄 판결로 그동안 가졌던 심적 고통에 자그마한 위로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서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오늘 이 판결은 서창덕씨가 1984년 5월, 전주보안대에 끌려가 33일 동안 인간으로서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모진 구타와 고문을 당하면서 허위자백을 강요 당하고, 그 자백만으로 법원으로부터 '간첩'임이 인정되어 10년형을 선고 받은 지 무려 24년 만의 일이다.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이 사건은 연평도 부근에서 조업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된 사실 밖에 없는 어부 서창덕을 17년이 지난 1984년, 전주보안부대가 느닷없이 체포하여 33일 동안 고문수사를 한 끝에 간첩으로 조작한 일명 '조작간첩사건'이다. 당시 검찰과 법원이 서창덕에 대한 수사기록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고문 당했다는 피해자의 호소에 귀기울였다면 당연히 이미 무죄가 났어야 할 사건이었다.

한글 모르는 이의 간첩 진술서

특히 서창덕씨는 구걸을 해야 할 만큼 극심한 가난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했다. 전주보안부대는 그를 상대로 그가 작성하지도 않았던(할 수 없었던) 진술서에 강제로 무인을 찍게 하였다. 노동당, 지령, 포섭 등등 그 단어의 의미는 고사하고 그 단어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던 그에게,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간첩죄'를 씌워 버리고 말았다.

"1967년 납북되었을 당시 북한에 포섭되어 국가기밀을 탐지하라는 지령을 받고 한국에 귀환한 뒤 15년 동안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까지 보안부대 수사관들이 그에게 어떤 모진 일을 저질렀는지는 차마 말하기조차 낯부끄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지인들은 서창덕씨와 함께 배를 타거나 방위근무를 했다는 이유로 보안대에 끌려가 1주일이 넘도록 구타 당했다.

결국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의 진술서를 무조건 베끼게 하여 그것을 간첩죄의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그가 10년 넘도록 탐지하였다는 '국가기밀'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배를 타는 어부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알고 있는 '공지의 사실'이었다. 더구나 탐지했다는 '국가기밀'마저 10년 동안 단 한차례도 누설할 대상마저 특정하지 못한 채였다.

보안대의 불법에 눈감은 그들, 공범

 재심재판을 받기위해 군산지원 법정에 들어가는 서창덕씨와 변호사
 재심재판을 받기위해 군산지원 법정에 들어가는 서창덕씨와 변호사
ⓒ 강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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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제대로 밝혀냈어야 할 검찰은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가 불법적으로 수사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외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검찰조사 과정에서도 보안대 수사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창덕씨의 조서를 받아 보안대 불법행위의 '공범'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  

법원에서 서창덕씨는 보안부대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임을 주장하였고, 간첩활동의 증인이 된 이들도 미리 짠 듯 판에 박힌 증언을 하였다. 그러나 법원은 전주보안대 수사관들에 둘러싸여 작성한 검찰피의자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보안대의 고문, 조작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서창덕 사건을 조사한 보안대 수사관들은 상금과 표창 수상, 진급 등 각종 이득을 취했다. 반면 법원에 의해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서창덕씨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마저 외면당한 채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나긴 수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면회 오는 사람 한 명 없는7년의 감옥 살이 끝에 겨우 풀려난 뒤에도 17년 동안 보안관찰을 받아 경찰의 감시에서 자유로울 날이 없었다.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간첩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싸늘한 시선 아래 놓였고 자신의 존재를 감춰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단지 서창덕과 안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불려 다녔던 이들,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었으나 자신의 진술로 인해 친구가 간첩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개야도 친구들의 고통과 상처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4년만의 재심재판, 그 법정의 모습

 24년만에 무죄를 선고 받은 서창덕씨가 군산지원 법정 앞에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히 웃고 있다.
 24년만에 무죄를 선고 받은 서창덕씨가 군산지원 법정 앞에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히 웃고 있다.
ⓒ 강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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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이나 흘러 너무나 많이 늦었지만, 다행히 법원은 재심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여 서창덕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환영할 만한 일이고 너무나도 마땅한 결론이지만, 이 사건 재심과정은 '또다른 서창덕들-조작간첩 사건'에 견주어 볼 때 신속한 개시결정과 재판진행, 그리고 검사의 역할 등에서 사뭇 뜻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에서 발생한 간첩 조작사건의 재심과 관련하여 개시 요건의 완화, 신속한 결정을 요구해온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 점에서 전주지법군산지원이 보여준 성의있고 성실한 재판 진행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또한 검찰 60주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는 과거의 잘못에 어떤 책무가 있는가에 대해 일말의 시사점을 준다는 점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제껏 검찰은 조작간첩 피해자들이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신청한 재심청구에 대해 대부분 "재심개시청구를 기각함이 마땅"하다는 일률적인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해 왔다. 재심의 사유가 되는 수사기관의 불법체포, 감금, 독직폭행, 허위공문서 조작 등이 과거사위원회 등 국가기관에 의해 이미 밝혀진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서창덕씨와 그의 변호인이 제출한 재심청구서와 그 증거들을 검토하여 "개시결정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이례적으로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이에 군산지원은 2008년 6월 17일 개시결정을 내렸고 법원은 신속하게 재판진행을 하는 등 조작의 의혹을 파헤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진술거부권 등 어려운 법률용어를 잘 알지 못하는 피고인에게 쉬운 말로 설명하여 제대로 답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판사의 행위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게다가 검사는 재심 재판의 논고에서 "이미 24년이 지나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로서, 한 사람의 검사로서 책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검사동일체 원칙에 근거해도 그렇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서창덕씨는 물론이고 재판을 시종일관 지켜보았던 서창덕의 지인들은 이 재판을 통해 충분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익히 알듯이, 과거 국가는 '법'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서창덕씨와 그 가족, 친구들처럼 힘없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복원하기 힘들 만큼 심각한 인권침해를 자행하였다. 민주화되었다는 오늘, 도대체 그런 사람들에게 국가는 무엇으로 위로하고 그 상처를 감싸줄 것인가.

국가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서창덕과 단란했던 그들 공동체의 신뢰를 파괴해버린 파렴치한 범죄행위에 대해 어떻게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이의 시정을 위해 검찰이 노력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서창덕 재심과정에서 보여준 검사의 자세야말로, 그것이 과거 검찰의 오류를 바로 잡는, 공익의 대변자로서 검찰 본연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또다른 서창덕들'의 간절한 기다림

 24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서창덕씨가 법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24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서창덕씨가 법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강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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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창덕의 무죄를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또 다른 서창덕'인 많은 조작간첩들(박동운, 박근홍, 이수, 허현, 김양기, 정삼근, 이준호, 송기준 송기복 송기홍 등 송씨일가, 신귀영 신춘석, 김기삼… 그리고 청구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더 많은 이들…) 모두 한마음으로 무죄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냥 기뻐할 수 없다.

서창덕씨와 비슷한 연유로 간첩이 된 '또 다른 서창덕'은 십수 년의 옥살이 끝에 겨우 풀려 나와 천신만고 끝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국가가 데려다가 간첩으로 만들었으니 마땅히 국가로부터 '당신 간첩 아니요' 그 한마디 듣기 위해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70, 80대 노년의 재심 청구인 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자. 이미 사망한 이들도 수 명이거니와 국가의 무 대답은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는 것이다. 

나는 수십 년 동안 사회의 차가운 외면 속에 피울음을 삼키며 살아왔던 이들의 삶은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도, 위로가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국가가, 신속한 재심결정을 통해 이들에게 조그마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기회마저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이라도 이들의 간절한 마음을 구차하게 지연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당당하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재심의 길을 신속하게 열 것을 간절히 바라본다.

 법정앞에서 재심재판을 기다리는 서창덕씨와 '또다른 서창덕들'
 법정앞에서 재심재판을 기다리는 서창덕씨와 '또다른 서창덕들'
ⓒ 강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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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야도 납북 어부 서창덕은 누구?
1984년, 33일간의 고문에 "국가기밀 탐지했다" 허위자백


서창덕은 전북 옥구군의 작은 섬 개야도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어부였으나 배가 전복되는 사고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구걸을 해야만이 8남매가 연명할 수 있는 상황에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그의 나이 열네살 되던 해에 배를 탈 수 있었다. 화장이라는, 배 안에서 어부들의 밥을 지어주는 일을 도맡았다. 어른들의 잦은 구타와 욕설도 동생들의 배를 곯지 않을 수 있는 일이어서 참아냈다.

그가 열아홉이 되던 1967년 5월. 승룡호라는 안강망 어선을 타고 연평도 부근에서 조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더니 이내 곧 북한경비정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가 타고 있던 배째로 북한경비정에 둘러싸여 북한 땅으로 끌려갔다. 그때부터 124일 동안 북한에 억류되어 있었다. 가장 어린 나이였던 서창덕은 집에 가고 싶다며 울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다행히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었고, 조사를 받고 바로 풀려나 다시 배를 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69년 12월경, 군산경찰서 경찰들이 다짜고짜 그를 잡아갔다. 개야도에서 살던 그의 친지들과 친구들도 몽땅 끌려갔다. 한달 넘도록 경찰서에서 갇힌 채 흠씬 두들겨 맞았다. 북한을 찬양했다는 것인데, 무서워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서창덕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북한을 찬양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었고 재판을 받았다. 그 억울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마는 다행히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물이나 알고 고기나 알던' 어부 서창덕은 그 뒤로 군산으로 나와 배를 탔다. 개야도 친구나 친지들은 또 무슨 변을 당할까 염려하여 그를 많이 꺼려했다. 그 역시 견디기 어려웠던 터였다. 군산에 나왔으나 '북한에 갔다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선주들은 배에 태워주기를 꺼려하여 그 사실을 감춰야 했다. 납북어부들에 대한 경찰의 감시도 있어서 친구들을 사귀기도 어려웠다. 세상을 피해 입닫고 귀를 닫았다.

다행히 자신을 위해주는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내던 1984년 5월 26일. 그의 운명이 뒤바뀐 일이 발생했다. 전주보안부대는 그를 연행하여 "1967년 납북당시 북한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가기밀을 탐지하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온 뒤 각종 국가기밀을 탐지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33일 동안 모진 고문의 결과였다. 그 뒤 열린 재판에도 보안부대 수사관들이 떼를 지어 법정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문을 당해서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어렵사리 호소했지만 1심 법원은 그에게 간첩임을 인정하여 10년형을 선고 하였고 항소, 상고 했으나 모두 기각당하고 말았다. 7년 동안의 옥살이 끝에 1991년 5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지난해 11월 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고문으로 인한 간첩조작사건'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곧이어 2008년 4월 재심을 청구하였다. 6월 17일 재심개시 결정이 내려져 재심재판이 열린 끝에 10월 31일 무죄선고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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