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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인간적인 왕, 고종과의 만남!

 

기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평가의 잣대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극과 극을 달리기 마련이다. 얼마 전 ‘광복절’ 논란과 관련해서 그 이름이 오르내렸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 극우보수주의자들에게는 ‘국부’라는 극찬을 받는 반면 진보주의자들로부터는 ‘독재자’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어찌, 그것이 이승만 한 사람뿐이겠는가?만, 우리 역사에서 호, 불호를 떠나서 아직까지 자신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현군으로 ‘세종’과 ‘정조’를 꼽는다면, 폭군의 대명사로는 ‘세조’와 ‘연산군’을 꼽을 수 있다. 어디에서도 고종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고종은 ‘무능한 군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런 나머지 그가 어떤 업적을 남겼고, 무슨 일을 했다! 는 정당한 평가는 간과해 온 것이 사실이다. 아니, 정당한 평가를 받을 시간이 없었다고 해야 옳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종을 오해하고 있다. 하기야, 고종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이 ‘조선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져있다 보니 인간 고종에 대한 평가보다는, 조선을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는 500년 조선 왕조의 문을 닫게 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어찌 고종 한 사람이 욕을 얻어먹어야 한다는 말인가.

 

당시 고종 뒤에는 조선을 일본에 갖다 바치기 위해 갖은 모략과 협박을 일삼던 역적 대신들이 있었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조선을 일본화 시키기 위해 앞장섰던 앞잡이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고종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부인 명성황후의 죽음을 말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더 나아가 본인 자신 역시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를 만큼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그러나 고종 역시 한 사람의 아들이자, 한 남자의 지아비요,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은 우리가 몰랐었던 고종의 평범한(?) 가정사와 인간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 

 

고종은 이미 1882년에 임오군란을 겪은 후부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에는 11시까지 일어나 계시다가 잠시 1시간쯤 눈을 붙이고 다시 일어나 새벽까지 정사를 보셨다. 이윽고 날이 새면 그때서야 비로소 침소에 들었으며 일어나는 것은 대낮인 12시였다.

 

어전에 불려나온 성강호는 갑자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땅에 내려앉았다. 그런 다음 “지금 죽은 명성황후의 혼령이 이 의자에 와 앉으셨습니다”라고 하니 고종은 의자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

 

조선 최후의 48년,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고종은 조선과 조선 민족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일본은 조선을 철저히 유린하고 조선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해 갖은 협박을 했다. 어느 아버지가 자식들의 죽음을 모른 채 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컨대, 고종은 거기에서 힘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사실, 고종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망국의 군주라는 논리에 의해 이런 것들이 가려지고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고종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그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군을 지원하고 간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과 같은 숨은 일화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고종은 이준에게 직접 돈 2만 원을 하사하시었다. 덕수궁 함녕전 동반침(東半寢)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준은 사은숙배(謝恩肅拜)한 뒤 물러나 곧바로 인천항으로 향하였다. 인천에서 화륜선을 탄 이준은 주야로 달려서 목적지인 해아(海牙,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전 판서 심상훈(沈相熏)도 역시 칼을 빼어 목을 찌르려고 했는데 갑자기 상감(고종)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 입궐하였다.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어서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 살아서 국가에 보답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시는지라 죽기를 중단하였다.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은 고종과 순종을 최측근에서 모셨던 시종원 부경(現 대통령 비서실 차장) 정환덕이 직접 쓴 <남가몽>을 토대로 1863년~1910년까지 조선과 궁중에서 일어났던 파란만장했던 역사적 사건과 궁중 비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던 순간순간마다 그 이면에 있었던 숨은 이야기들을 함께 담고 있어 흥미롭다. 종로 ‘창엽문’과 관련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태조가 한양에 터를 잡을 때 5백년으로 왕조의 운명을 삼아 종묘의 문에 창엽(蒼葉)으로 현판을 써서 걸었다. 창(蒼)이라는 글자는 분명히 이십팔군(二十八君)이고 엽(葉)이라는 글자도 또한 이십 팔세(二十八世)를 뜻하는데 운수가 과연 그와 같은가?”

 

명성황후 소생이었던 순종을 폐위시키고 엄비가 낳은 영친왕을 황태자로 옹립시키려다, 이를 눈치 챈 고종과 엄비가 큰 부부싸움을 벌였다는 일화 역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 밖에도 파란만장했던 고종과 순종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궁중 비화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그 시대의 상황과 역사적 진실과 조우할 수 있다. 나아가 정사를 통해 알 수 없었던 불우했던 왕, 고종과 순종이 당시 느꼈을 답답한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이제, 고종을 용서하자!

 

조선 왕조의 멸망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한 추측에 불과하다. 알다시피, 그 시대의 역사와 기록을 담은 많은 기록물이 일본에 의해서 불태워지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에서 본 ‘명성황후’의 사진 한 장을 두고도 ‘명성황후가 맞니, 맞지 않니.’하는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강한 무기를 내세워 조선을 강탈했던 일본이라는 외부 침략자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았던, 의지할 대신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던 내부의 적, 대신들 사이에서 고종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 무너져가는 500년 조선 왕조의 종묘사직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이제, 고종을 용서하자.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고종의 모습을 보도록 하자. 그것이 100여 년간 우리가 무시하고 조롱해왔던 고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이토는 일본군을 총동원하여 덕수궁 대한문을 밀고 들어가 함녕전을 포위한 뒤 기관총 4문을 설치하고 고종 황제를 위협했다. 또 남산에도 포대를 설치,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문자 그대로 전쟁상태였다. 이 같은 상태에서 고종 황제는 마침내 조칙을 내리니 바로 1907년 7월 19일 오전 3시였다.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

박성수 지음, 왕의서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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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선, #남가몽, #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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