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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 살아있는 미륵불, 관심법, 태봉을 세운 사람, 무수한 사람을 잔혹하게 죽인 포악한 군주, 왕비마저도 참혹하게 죽인 패륜의 왕….'

 

"궁예 하면 떠오르는 게 무어냐?"는 질문에 아이들이 한 대답이다. 후삼국의 혼란 속에서 드넓은 영토를 장악했던 통치자 궁예는 패륜과 폭군의 이미지로 온통 뒤덮여 있다.

 

과연 그럴까? 한때 후삼국 전체 영역의 2/3 정도를 장악했던 궁예가 왕건에 패하지 않았더라면 평가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가 패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궁예는 왜 미륵불을 자처했을까

 

표지 <궁예의 나라 태봉>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왕위쟁탈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궁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세달사라는 절에서 성장했다. 동자승으로 심부름만 하며 보통 승려로서 성장한 게 아니라 지방 세력, 불교 세력과 연결되어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궁예가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신라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스스로 왕을 자처하면서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웠고, 부석사에 방문했을 때 부석사 벽에 걸린 신라 왕의 화상을 칼로 내리쳤다고 전해진다. 

 

궁예를 뒷받침했던 핵심적인 세력은 세달사까지 세력을 떨치던 명주(강릉의 옛 지명)의 호족과 불교 세력이었다. 당시 강릉 지방에는 낙향한 신라 왕족 김주원 세력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주원의 후손으로 범일이란 승려가 있었는데 굴산사를 중심으로 강릉 일대의 독자적 불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치악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 양길의 휘하에 들어갔던 궁예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것도 강릉 일대의 호족과 불교 세력의 도움을 얻어 강릉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부터 궁예는 양길의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독자적 정복활동을 했다.

 

궁예가 인제, 철원, 화천, 김화 등지를 점령한 뒤 송악의 호족(왕건 세력)과 결탁했다. 궁예는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후 경기도 일대를 장악하고 서해안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역이나 외교활동을 할 수 있는 배경을 확보했다. 원주 일대의 호족이었던 양길마저 격퇴한 뒤 궁예는 한반도에서 최강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제 궁예 앞에는 신라와 후백제만 남았다. 신라와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후삼국 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수 있는 열쇠가 궁예의 손에 잡힐 듯 다가섰다.

 

궁예는 후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궁예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궁예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강릉 일대의 호족과 굴산 선문의 불교 세력을 제외하면 후고구려 영역에 들어온 호족 세력은 궁예의 강력한 지도력을 무조건 수용할 수는 없었다. 지방에서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는 호족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자처했다.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반대 세력은 미륵관심법을 내세워 탄압했다.

 

왕비 강씨를 죽인 이유

 

송악의 호족 세력과 결탁하기 위해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던 궁예는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다.

 

송악에 비해 철원은 도읍지로서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도읍지는 수로를 이용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를 운반하기 좋은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철원은 그럴만한 수로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철원으로 천도를 강행했다. 왕건이 장악하고 있는 송악에서 왕권 강화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건과 궁예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송악 지역을 기반으로 권력을 강화하려는 왕건과 송악 세력의 범주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력을 강화하려 했던 궁예 사이에 양보할 수 없는 권력 투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궁예는 왕건을 불러 모반을 음모했다며 직접 추궁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반 음모가 사실이 아니라고 아뢰던 왕건은 측근의 기지로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불교 세력과 결탁했다. 반대 세력 탄압을 위해 미륵불과 미륵관심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왕건에게 모반을 음모했다며 추궁할 때도 미륵관심법을 내세웠다.

 

궁예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 세력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반궁예 세력이 결집되었다. 각 지역의 호족세력, 궁예가 불교와 결탁하면서 밀려난 유학자들은 궁예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 반궁예 세력의 중심에 왕건이 있었다.

 

결국 궁예는 패배했다. 패한 궁예에게는 폭군이란 이미지가 낙인이 되어 뒤따른다. 무수하게 많은 사람을 죽였고, 왕비마저 잔혹하게 살해했다며 패륜을 부각시킨다.

 

궁예가 죽였다는 왕비 강씨가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왕건과 결탁한 호족 집안의 딸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런 평가는 달라진다. 단순한 왕비 살해가 아니라 호족과 왕권 사이의 권력 다툼의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역사 속에서 반대 세력을 숙청한 왕이 어찌 궁예뿐이었을까.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고 과거제도를 실시했던 광종도 많은 반대 세력을 죽였다. 평양 천도를 단행했던 고구려의 장수왕도 반대 세력을 무수하게 많이 숙청했다. 하지만 광종도 장수왕도 패륜의 왕이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혁 군주처럼, 남하정책을 위한 탁월한 결단이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궁예는 그런 평가를 받지 못한다. 광종처럼 장수왕처럼 승자가 된 게 아니라 패자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도 삼국유사도 궁예에 대해서는 가혹한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모두 고려 왕조에서 편찬된 사서였다.

 

역사는 승자만을 위한 기록이 되어선 안 돼

 

궁예의 자취가 많이 남아 전하는 철원을 중심으로 태봉과 궁예에 대한 연구자들의 다양한 성과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궁예의 나라 태봉>이란 책이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한 뒤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가 소외되었고, 왕건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와 후고구려(태봉)의 역사가 소외되었다.

 

역사가 승자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전해진 탓이다. 후세에 전해지는 기록물은 승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전해주지지만, 패자의 모습은 전설이나 신화의 형태로, 산이나 강의 이름으로 후세에 자신의 모습을 알려주기도 한다.

 

폭군과 패륜으로 낙인찍힌 궁예는 철원 일대의 전설 속에서 명성산 울음으로 한탄강의 이름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궁예의 나라 태봉>이란 책은 패륜과 폭군으로 낙인찍힌 궁예를 위한 변명을 대신하고 있다.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역사 교과서를 권력의 입맛에 맞게 수정하려는 세태를 보며 사는 지금 궁예를 위한 변명이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서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란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덧붙이는 글 | 김용선 엮음/일조각/2008. 8/ 18,000원


태그:#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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