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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이 울부짖습니다. 멍든 가슴을 부여안고 몸부림칩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온통 가슴에 멍 자국이 푸르딩딩 하더니 이젠 피가 이곳저곳 몰렸는지 붉다 못해 검붉습니다. 산이 가슴을 헤치고 자신의 멍든 맘을 알아달라네요.

 

지난 13일 오른 속리산은 과연 속리(俗離, '세속을 떠나 있다'는 뜻)의 이야기를 쓰는 도인이 분명했습니다. 요즘은 하도 사람이 북적대니까 누구는 '속리(俗里)'란 한자가 더 어울린다며 한 마을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속리산은 세속과는 다른 게 있었습니다.

 

산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산이 있다더군요. 거긴 가을 산과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늘도 있고, 땅도 있고, 바다도 있으며, 보건의료노조가 있고, 거기다 동학혁명과 남부군 빨치산도 있었습니다.

 

ⓒ 김학현

 

가을 산이 거기 있습니다

 

속리산, 그 너른 품만큼이나 여러 가지를 보여주는군요. 속리산은 이제 가을 산, 바로 그것입니다. 지나다 물든 가지에 손을 대면 뼛속까지 붉은 물감이 들 것만 같습니다. 차마 단풍으로 물든 나뭇가지를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바위 틈마다 빨강과 노랑이 줄달음을 칩니다. 퍼런 나뭇잎 사이사이로 빨간 옷을 입은 단풍나무며 만주고로쇠나무, 옻나무 등이 자기가 으뜸이라고 뻐기는 듯 제각기 자기 색깔 옷을 자랑합니다. 전 그냥 지나가면 그들에게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 그들의 패션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어떤 놈은 물들고 어떤 놈은 쌩쌩하고, 그래서 더욱 다양성 속의 아름다움이 숲속에서 우러납니다. 바위틈을 헤집고 오르면 잘 닦여진 돌계단이 나옵니다. 돌계단에는 누가 입었다 벗어던진 옷인지 누리끼리하게 바랜 나뭇잎들이 데그럭데그럭 그들만의 가을여행을 떠납니다.

 

돌계단을 지나면 쇠 난간에 얽어 나무다리를 놓은 길이 나옵니다. 길 위에 서서 지나 온 길을 바라보면 그곳도 울긋불긋 단풍용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행복을 지났다는 걸 모르죠. 사람들은 이미 지나온 길이 아름다운 길이었다는 걸 모르죠. 등산은 그런 인생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합니다.

 

 
산에서 하늘, 땅, 바다를 만났습니다

 

성주 화북 쪽에서 문장대로 오른 등산길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가 다 있습니다. 하늘, 땅, 바다는 바위에 담겨 있습니다. 순서대로 한다면 땅이 먼저네요. 땅에서 사람이 최고죠. 풍치에 넋을 잃고, 신선한 바람에 취하고, 슬슬 아파오는 다리에 지칠 때쯤, 한 쪽으로 우뚝 선 바위가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하도 그럴 듯하게 생겨서 즉석에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남근석'이라고. 너무 흔한 이름이라서 그렇긴 한데 어쩌겠어요. 그 모양으로는 다른 이름이 영 생각이 안 나는 것을. '바위가 어떻게 저런 모양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좀 더 오르니 이번에는 바다가 등장합니다.

 

또 맘대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돌고래부부의 아름다운 춤'이라고. 정말 그들이 춤을 추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춤사위가 살아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잠시 앉아 있다가는 '상어부부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돌들의 외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문장대 바로 밑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저를 반기네요. 병아리 같기도 하고요. 눈을 지그시 감고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이지요. 이렇게 저는 속리산을 오르며 하늘과 땅과 바다를 모두 만났습니다.

 

돌고래면 어떻고 상어면 어떻습니까. 독수리면 어떻고 병아리면 어떻습니까. 보고 즐기면 되죠. 어떤 석수가 돌을 깎으면 그런 모양으로 깎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멋진 조각들입니다. 제가 크리스천이니 당연히 제가 믿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늘을 본다고 하늘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땅을 본다고 땅만 보는 게 아닙니다. 바다를 본다고 그 안에 든 모든 것을 보는 게 아닙니다. 산을 보며 하늘과 땅과 바다를 볼 수도 있더군요. 언제나 보다 너른 눈으로 사물을 보리라 생각해 봅니다.

 

 
보건의료노조도 있습니다

 

정말 색다릅니다. 문장대에 거의 다 와 숨을 고를 즈음, 한 젊은이가 문장대를 알리는 안내표지판 기둥 한 편에 붙어 있는 글을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궁금하던지. 저도 다가가 그 쪽지를 읽었습니다.

 

'역사의 비운이 서린 속리산'이란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쪽지를 게시한 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속리산국립공원 관리공단이냐고요? 아닙니다. 그럼 지자체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산악회? 그 역시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보건의료노조였습니다. 참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체가 무언가를 적어놓았군요. 글의 제목 위에는 '보건의료노조 2008 속리산 오름 - 18'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속리산이 갑오농민혁명과 남부군 빨치산이 항거할 때 유격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오르고서도 그런 유래를 몰랐던 제게는 좋은 교훈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문장대에 올라 보니 그 포탄자국들이 눈에 띄데요. 문장대에는 움푹움푹한 곳이 여러 곳이거든요.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가 그렇게 선명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보건의료노조, 감사합니다'라고 했네요.

 

산에 올라 산은 안 보고 다른 것만 봤다면 엉뚱하다고 하겠죠. 하지만 저는 산도 보고 다른 것도 보았습니다. 다른 것을 보며 산에 오르는 재미와 행복이 여간 아니군요. '산에서 보는 것이 산만은 아니더이다'라는 말이 하고 싶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갓피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속리산, #등산, #남근석, #가을,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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