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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을 노래하는 사람, 그 불만을 듣는 사람 모두가 외쳤다. "신난다" "재미있다" "어메이징(amazing, 놀랍다)!"이라고.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짜증나고 신경질 나는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오히려 즐겁고 신나는 일이라고 외쳤던 불만합창단.

서울뿐만 아니라 전북 익산, 경남 진주 등의 지역에서 조직된 8개의 불만합창단은 지난 11일밤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내 전통예술공연장에서 열린 '불만합창페스티벌'에서 각자의 불만을 노래했다.

"불만, 들을 준비 됐나요?"

'불만합창페스티벌'을 보고 있는 관객들
 '불만합창페스티벌'을 보고 있는 관객들
ⓒ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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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은 5살 된 어린 아이부터 고등학생, 대학생, 주부, 직장인, 60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계층을 망라하고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페스티벌 시작을 알리는 영상이 나오자 제각기 웅성거렸던 소리가 잦아지고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이어졌다.

환호성은 페스티벌 사회를 맡은 개그맨 박준형씨가 나오자 더욱 커졌다. 박준형씨는 관객들에게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네며 "다른 사람의 불만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네"라고 답했다. 관객들의 대답은 '페스티벌을 빨리 시작하라'고 불만을 토로하는 듯했다.

관객들의 불만(?)을 알아챈 듯, 박준형씨는 첫 번째로 공연할 불만 합창단을 서둘러 소개했다. 8개의 불만합창단 중 최연소 불만합창단. 초등학교 5·6학년 여학생들로 구성된 봉천동 '밤바다의 소녀들'(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 '드림 한누리 공부방' 조직) 단원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일곱 소녀들의 불만이 노래 반주와 함께 시작됐다.

"1번 버스 아저씨는 짱 불친절해. 300원 낸다고 나 무시하지 마.
우리학교 1, 2학년 너무 편애해. 왜냐하면 1, 2학년 벽걸이 TV야.
방학 짧아, 쉬는 시간 짧아. 중국 매미 싫어요. 미치겠어."

소녀들이 수줍은 듯 악보로 연신 얼굴을 가리자, 관객석에서는 "잘한다"는 응원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숫자송과 우유송을 개사한 소녀들의 불만 노래는 초등학생만의 고민과 불만이 무엇인지 알게 해줬다.

초반에 관객들은 소녀들에게 '저런 불만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으로 노래를 들었지만, 노래가 끝날 무렵에는 '우리 딸, 내 동생, 우리 손녀'들의 불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제발 김밥은 이제 그만"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관악 한울림' 불만합창단(서울 관악 사회복지 '한울림장애인야간학교' 조직)의 한 단원은 노래하기 전 "소외된 장애인들도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됐다"며 "운영난을 겪고 있는 장애인 야간 학교의 현실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윽고 "여러분, 악 한번 질러볼까요?"라며 시작한 그들의 불만.

"엘리베이터 좁은 공간 휠체어를 쳐 넣고 아슬아슬 곡예처럼 힘겹게 야학 교실에 들어서면. 싸고 차가운 김밥 한 줄. 한 줄만 더 줘요. 배고파, 이제는 싫어. 지겨워. 제발 김밥은 이제 그만."

서울 관악 사회복지 한울림장애인야간학교는 정규교육으로부터 배제된 관악 지역 내 성인 장애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단체다. 야학을 통해 장애인들이 자아존중감을 회복하고 지역 주민의 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불만으로 가득 찬 그들이 '악' 소리를 질러졌을 때, 관객들도 함께 "아~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불만을 노래하는 사람은 물론 듣는 사람도 머릿속과 마음속이 '뻥!'하고 뚫리는 시원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어 무대에 오른 '북아현동' 불만합창단(서울 추계예대 판화과 프로젝트팀 조직)은 추계예대 실용음악과 학생들이 직접 곡을 만들고 북아현동 주민들이 학생들과 함께 가사를 만들었다.

'북아현동' 불만합창단이 불만노래를 부르고 있다.
 '북아현동' 불만합창단이 불만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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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 티셔츠로 옷을 맞춰 입은 단원들이 하나 둘 무대 위로 올라왔다. 누가 주민이고 대학생인지 분간이 가질 않을 정도로 그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노래 시작 전 한 단원은 "예술이 삶의 현장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 숨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한다"며 "불만합창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소통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여긴 북아현동) 참 높은 언덕들과 (더 좋게 말하면) 나무 없는 산이지. (집세는 오르고) 월급은 오르지 않아. 속상한데 개와 산책할 곳도 없어."

'북아현동' 불만합창단의 노래가 끝나자 박준형씨는 "공연된 노래들을 앨범으로 만들자. 저작권 등록해야 한다"고 말하며 '여긴 북아현동'이라는 부분을 따라 불러 웃음을 자아냈다. 또 "굉장히 좋은 의사소통의 장"이라고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왜 내 발에 맞는 신발은 없는 거야"

네번째 무대에는 희망제작소가 불만합창단 홈페이지를 통해 모집한 '멋대로' 불만 합창단이 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여고생부터 60대 할머니까지 다양한 세대와 활동 분야를 아우르는 단원들로 구성된 만큼 불만도 각양각색.

"게으르다 하지 마. 아무 것도 안 할 때 행복할 뿐. 근데 내가 예약한 노래는 누가 취소했니? 택배는 내가 없을 때만 오네. 낮잠을 깨우는 초인종 소리에 달려 나가보면 '예수 믿으세요'. 그동안 너무 참고 살았어. 불만이 없다면 이상해."

노래 중 '낮잠을 깨우는 초인종 소리, 예수 믿으세요'라는 부분이 나오자 관객들은 "맞아"하면서 웃음보를 터뜨렸다. 각양각색의 불만이 담겨진 노래인 만큼 관객들은 저마다의 불만에 공감하면서 호응했다.

페스티벌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무렵, '즐거운' 불만합창단(서울 명일동 '장애여성공감' 조직)이 등장했다. 전동 휠체어를 탄 장애여성들의 모습에 공연장은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그녀들의 불만 노래가 시작되자 공연장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 활기찬 무대가 되었다.

"쌀까 말까 참을까 말까. 장애인화장실 찾아 참고 참았어. 방광염이래.
분위기는 있는 카페도 턱 때문에 못 들어가. 턱! 왜 내 발에 맞는 신발은 없는 거야.
아~ 아~ 신발 벗겨져. 우리는 불만 마녀들, 폭발할 거야. 뻥!"

그녀들은 노래 중간마다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며 극 형식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아~ 아~ 신발 벗겨져'라는 부분에서는 휠체어를 탄 단원이 직접 발을 들어 불만을 표현했고, 풍선을 손에 쥔 채 관객들에게 '(불만) 폭발할 거야'라고 익살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즐거운' 불만합창단 박주희 단원이 극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즐거운' 불만합창단 박주희 단원이 극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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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관객의 이목은 '즐거운' 불만합창단원 한사람 한 사람의 말과 몸짓에 집중되었다. 관객들은 그렇게 5분도 안 돼 그녀들의 불만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어진 공연은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누리꾼들이 모인 '누리꾼' 불만합창단(인터넷 포털 다음 카페 '장백' 조직)의 불만.

"청계천엔 쥐새끼 광화문엔 바퀴벌레. 소화기로 메이크업, 물대포로 클렌징, 온수를 달라.
전과 없는 대통령 거짓말 안 하는 대통령, 최소한 한국 사람이면 좋겠어.
들리나요? 우리들의 불만 목소리. 촛불들이 보이시나요? 시국걱정 그만하게 해줘요."

개인적인 불만들이 가사의 주였던 다른 불만합창단들과 달리 '누리꾼' 불만합창단은 촛불집회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주를 이뤘다. 인터넷에서 뛰어나온 그들의 용기에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누리꾼들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시국걱정 그만하게 해줘요'라고 이야기했다.

"몇 살이냐고? 온 국민이 다 통계청 직원이야"

공연 막바지, 남은 팀은 2팀. 경남 진주에서 올라온 '진주 꾀꼬리' 불만합창단('진주여성민우회' 조직)과 전북 익산에서 올라온 '익산' 불만합창단('익산 희망연대' 조직)이 페스티벌의 마지막을 장식해 줄 팀이었다.

역시 마지막은 달랐다. 앞서 공연했던 불만합창단들이 '노래'가 주였다면, 마지막 두 팀은 의상과 율동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진주 꾀꼬리' 불만합창단은 반짝거리는 의상을 입고 한쪽 머리에 꽃을 단 채로 등장해 시선이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펼침막까지 준비해 와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불만노래 또한 '여행을 떠나요' 노래를 개사하여 관객들과 함께 불만을 노래했다.

"첨 본 사람이 내게 묻는 말, 몇 살입니꺼? 어디삽니꺼? 온 국민이 다 통계청 직원이야.
송아지 출산 무조건 30만원, 우리는 셋째 고작 20만원, 둘째는 아예 한숨만 나와.
쇼윈도에는 44마네킹, 내 몸매 닮은 마네킹 없네. 88사이즈는 어떡하라고."

노래가 끝나고 박준형씨의 재치 있는 입담은 여전히 계속됐다. "송아지가 30만원인 사실은 처음 알았다"며 "우리 아이가 송아지보다 못한 건가요?"라고 불만을 재해석하기도 했다.

5살 어린이부터 60대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모인 '익산' 불만합창단 또한 '나는 문제없어' '얄미운 사람' 'Gimme Gimme Gimme' '말 달리자' '남행열차' '그대에게' 등의 노래를 개사하여 불만을 노래했다. '얄미운 사람' 반주부터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이아몬드 스텝 등 간단한 율동을 하며 흥을 돋았다. 관객들도 이에 호응하듯 목소리를 높여 함께 불렀다.

"익산시 고단 주변은 악취 때문에 못살겠다. 18억 원 골프회원권 누굴 위해 사주나.
익산시 이래도 되는 건가요? 우리 사는 세상 바꿔요. 제발 바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불만이 없었으면 해. 불만합창단 포에버."

'진주 꾀꼬리' 불만합창단이 불만노래를 부르고 있다.
 '진주 꾀꼬리' 불만합창단이 불만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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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 불만 합창 페스티벌 "대단해요!"

8개 불만합창단의 공연이 끝나고 팀별로 특성에 맞는 상이 주어졌다. '일곱 빛깔 무지개'상(익산), '굳세어라 촛불아'상(누리꾼), '아름다운 우리 동네'상(북아현동), '세상을 다가져라'상(밤바다의 소녀들), '널리 퍼져라'상(관악 한울림), '즐겁게 노래해'상(진주 꾀꼬리), '감사한 공감'상(즐거운), '희망 씨앗'상(멋대로 불만합창단). 상 이름이 각 불만합창단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듯하다.

공연이 끝나고 '북아현동' 불만합창단 양소영씨는 "사실 노래를 한다고 해서 불만이 풀리는 것 같지는 않지만, 노래하는 동안에는 불만을 잊게 됐다"며 "북아현동 주민들과 함께 불만을 공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또 '익산' 불만합창단의 한 단원은 "우리가 부른 노래는 생활 속의 불만을 표현한 것이다"며 "모든 불만합창단과 불만을 공유할 수 있어, 오늘 하루만큼은 친구가 될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이날 페스티벌에는 불만합창단을 창안한 독일 출신 예술가 올리버 코챠 칼레이넨(Oliver Kochta-Kalleinen)도 참석해 한국의 첫 '불만합창페스티벌'을 축하했다. 올리버는 "한국말 억양이 강하지만 사람들 표정은 정돈되어 있어, 과연 어떻게 불만을 노래할까 궁금했다"며 "무대에서 다양한 감정이 표현되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고 신기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또 "8개의 팀이 공연한다고 했을 때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특정 집단 중심으로 불만이 나눠지지 않을까' 등을 걱정했다"며 "하지만 오늘 페스티벌을 보면서 걱정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올리버는 한국의 첫 '불만합창페스티벌'을 일반인들도 평소에 드러내지 못했던 창의력을 발휘해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였다며 "놀랍다!" "최고"라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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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정미소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불만합창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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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기자 활동을 통해 '기자'라는 꿈에 한걸음 더 다가가고 싶습니다. 관심분야는 사회 문제를 비롯해 인권, 대학교(행정 및 교육) 등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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