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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의성군 만취당에서.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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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공 김방경의 후예인 감목공 김자첨이 1392년에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중국 사진촌(沙眞村)을 본떠 사촌(沙村)이라 불렀다는 사촌마을. 송은 김광수, 서애 유성룡, 천사 김종덕 등 많은 유현들이 태어난 마을이다. 1750년 무렵에는 병촌 유태춘도 이곳으로 이주를 하여 수백 년 동안 안동김씨, 풍산유씨 등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지난달 27일 거제 경남산업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김건선 선생님을 주축으로 한 우리 문화유산 답사 팀이 울창한 솔숲이 몹시 아름다웠던 고운사(孤雲寺,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절집에서 나와 의성사촌리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20분께. 그 숲은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안동김씨 김자첨이 이곳 사촌에 정착하면서 마을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가꾼 방풍림이었다고 전해진다.

유성룡의 출생에 얽힌 의성사촌리가로숲

 
▲ 경북 의성군 사촌리가로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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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산 기슭에서 시작하여 남쪽 하천변으로 길게 뻗어 있는 바람막이 숲은 수령 300-600년, 높이 15-20m 정도 되는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 종의 나무 500여 그루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마을 서편에 있다 하여 서림(西林)이라 부르는 그곳은 무더운 여름에는 마을 사람들과 지나는 길손의 시원한 쉼터가 되어 주는 곳이기도 하다.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우리 선조들의 놀라운 지혜를 엿볼 수 있었던 사촌리가로숲. 문득 300여 년 전에 해안을 따라 조성된 남해군 물건리 방조어부림(천연기념물 제150호)의 풍경도 떠올랐다. 강한 바닷바람과 해일을 막고 물고기 떼를 끌어들이기 위해 물건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자연을 이용한 선조들의 지혜를 이어 가고 있는 것일까? 개발을 내세워 서슴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는 소식을 종종 접할 때마다 안타깝기만 하다.

 
▲ 서림(西林)이라 부르기도 하는 의성사촌리가로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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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면 숲 사이로 물이 흘러내려 더욱 운치가 있을 것 같은 사촌리가로숲에는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출생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부터 사촌마을 터가 명당이라 그곳서 삼정승이 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신라 때 이미 정승이 한 분 나왔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두 분의 정승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선(先)안동김씨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사촌마을 출신으로 송은 김광수의 딸이었던 유성룡의 어머니가 그를 배었을 때 태몽으로 용꿈을 꾸게 되자 크게 될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승이 나는 터로 알려진 친정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사촌마을로 갔다. 그러나 친정아버지가 집안의 기운을 외손에게 줄 수 없다며 딸을 내쳐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시댁이 있는 풍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촌리가로숲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유성룡이었다는 거다. 그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까지 오른 분이니 사촌마을에 전해져 내려온 전설이 그대로 딱 들어맞은 셈이다.

목조건물 만취당을 거쳐 아름다운 탑리오층석탑으로

 
▲ 임진왜란 이전에 세워진 목조건물인 만취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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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 시대 퇴계 이황의 제자이며 부호군을 지낸 김사원이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세웠다는 만취당(경북유형문화재 제169호,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으로 가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산한 마을을 걸으면서 적당한 식당을 찾았지만, 점심 시간을 넘어서 그런지 밥이 없다는 곳도 있고 굳게 문이 잠겨 있는 곳도 있어 적잖이 당황했다.

결국 '보양식당'이란 곳에 들어가서 간자장면과 우동을 사 먹게 되었는데, 그 맛이 생각과 달리 일품이었다. 더욱이 기다리면서 먹으라고 주인아저씨가 내 놓은 과일과 밤, 땅콩도 얼마나 맛이 있던지 기다리는 지루함마저 모를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정이 넘치는 시골 인심이 반가웠다. 

만취당으로 가는 길에는 한 그루 향나무(경북기념물 제107호)가 서 있다. 조선 연산군 때 학덕을 겸비한 송은 김광수가 심은 것으로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되고 나무 높이는 8m였다. 유성룡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벼슬 없이 시를 읊으며 청빈하게 생활했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 조선 중기의 건축 수법이 잘 남아 있는 만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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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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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유성룡을 배고 있던 딸을 그가 내쳤을 때도 딸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문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가 머물며 학문에 전념했던 영귀정(경북문화재자료 제234호,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이 지금도 남아 있다.

김사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 붙인 만취당(晩翠堂) 위로 끝없이 펼쳐진 하얀 구름이 너무 멋스러워 나는 환호성을 질러 댔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만취당은 조선 중기의 건축 수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리 및 증축이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흔치 않은 목조건물이다.

영조 3년(1727)에 동쪽 방인 복재(复齊)를, 동왕 40년(1764)에는 서소익실(西小翼室)을 증축함으로써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는 만취당에서 나와 국보 제77호인 의성탑리오층석탑(의성군 금성면 탑리리)을 보러 탑리마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의성탑리오층석탑(국보 제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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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토축 위에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당당히 서 있는 탑리오층석탑을 보자 얼마나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전탑(塼塔) 양식을 따르면서 목조건축의 수법을 일부분 보여 주는 특이한 구조를 지녔다.

탑신은 1층이 높고 2층부터 급격히 높이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1층 몸돌의 남쪽 한 면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두었다. 지붕돌은 전탑의 구조를 본떠 아랫면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이고 아랫면이 5단이다.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은 없지만 기단이 지닌 안정감에 하늘로 향하고 있는 듯한 시원스러움, 반듯반듯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과 당당함이 느껴지는 의성탑리오층석탑의 아름다움에 나는 매료되어 버렸다. 그곳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지만 일행과 함께 마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태그:#사촌리가로숲, #만취당, #탑리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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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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