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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빛 - 열정, 이현(지은이) / 대교북스캔

 

학교에 가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같이 들일을 나가야 하는 조부모와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매고 논길과 산고개를 넘어야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는 혼자 집을 볼 때면 집 앞 길에 나가 평평하고 푹신한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며 놀곤 했습니다.

 

아이의 작은 손놀림에 갈색 캔버스와 같은 땅바닥에 그어진 선들은 아이의 눈에 보인 세상과 상상 속의 무언가를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이내 '휙' 하고 불어온 먼지바람과 함께 사라지기 일쑤였습니다.

 

아니면 그림이 맘에 들지 않아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쪽 발로 칠판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슥슥' 물질러대면 순식간에 그 선과 모양들은 흙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렇게 흙과 나뭇가지로 땅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새하얀 도화지에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서툴렀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회화의 요소나 색깔, 색칠에 대해서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험에 나오는 정도만 외워둘 뿐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가슴속에 담아둔 것을 겉으로 표현해내는 게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무척 어려웠습니다. 도화지를 등굣길에 문방구에서 몇십 원을 주고 사야 했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는 어느덧 서른을 넘겼고 땅 그림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간혹 색연필과 연필, 지우개, 크로키북을 사서는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려 보기도 하고 색칠도 해봤지만, 그것을 취미로 가져가지는 못했습니다. 딱히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아 이것저것 하려다 보니 진득하게 할 수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철없는 사내아이에서 철없는 청년이 되버린 그가 얼마 전 '빛'을 만났습니다. 그 '빛'은 갖가지 선과 빨강, 파랑, 초록, 노랑, 검정, 하얀색들이 어울려 낯선 땅의 새하얀 달빛과 마린 블루의 지중해 바다와 들판에 가득한 수선화, 꼿꼿이 선 소나무와 달빛에 빛나는 여인의 나체, 푸른 밤과 양떼가 몰고온 새벽, 뜨거운 태양과 눈덮힌 바다, 꿈 속에 나타난 종이배와 사슴, 백조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렌지색 양귀비꽃이 핀 주황색 들판은 철 없는 청년을 땅 그림을 좋아하던 아이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마약 성분이 없는 양귀비꽃인데도 그 화려하고 눈부신 빛에 홀려, 서툴지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그림 그리기를 계속 하고 싶었던 사내아이의 기억을 떠올려 주었습니다.

 

 

현대미술이 뭔지? 색책가 뭔지? 형이상학이 뭔지? 창작이 뭔지?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할지? 잘 모르지만, 지난 세월과 각박한 현실에 묻혀있던 사내아이의 마음을 각성시킨 청년은 책 속에서 만난 '빛'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잘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그냥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순하고 순수하고 명쾌한 것들을 좋아한다. 작품을 제작할 때 나는 가능한 한 단순하고 순수하고 명쾌한 선과 면, 색채들만을 선택해서 절재해 사용하며, 회화의 최소한의 기본요소와 조형원리들만을 사용하여 회화로서의 최대한의 표현효과를 이끌어내보고자 한다." - 책 <지중해의 빛- 열정> 에서

 

"나는 훨씬 현실적이지만 내가 그림으로 창작하는 것은 환영이다." - 들라크루아

 


지중해의 빛 - 열정

이현 글.그림, 북스캔(대교북스캔)(2007)


태그:#지중해의빛, #땅그림, #그림그리기, #창작,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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