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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하나 벗었을 뿐인데, 등산하며 보는 것이 다 달라지다니. 우리가 보는 게 얼마나 우릴 기만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신발 하나 벗었을 뿐인데, 등산하며 보는 것이 다 달라지다니. 우리가 보는 게 얼마나 우릴 기만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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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있는 약수터 옆에는 오봉산 등산로 안내도가 서 있다. 다섯 봉우리를 찾아갈만한 안내는 없다.
 입구에 있는 약수터 옆에는 오봉산 등산로 안내도가 서 있다. 다섯 봉우리를 찾아갈만한 안내는 없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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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충남 연기군에는 명령하는 산이 있다. 조치원과 서면을 끼고 있는 오봉산이 그 주인공이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10번도 넘게 올랐지만 다섯 봉우리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아마 세밀히 살피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표지판이나 안내지도만 보고는, 또 정해진 등산로만 따르다 보면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했다. 나는 항상 ‘오봉산’이란 표지석이 반기는 주봉의 정상까지만 오른다.

산이 명령을 한다

"발바닥 지압로, 신발을 벗어주세요."

등산로 입구부터 명령이다. 그냥 버티고 신발을 벗지 않고 올라갔다. 조금 가다 또 그 명령 앞에 맞닥뜨리게 된다. "발바닥 지압로, 신발을 벗어주세요" 몇 번을 더 이런 명령 앞에 그냥 고개를 숙이거나 하늘을 보거나 딴 데를 보며 딴청을 피우고 지나쳐야 할까. 좀 뻔뻔해야 등산화를 신고 오를 수 있는 산이 오봉산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산, 해발 262.5m의 야트막한 산이다. 그래도 등산 기분 내며(그런 게 있다면) 오를 수 있는 2-3시간은 족히 걸리는 산다운 산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뒷산 기분은 아니라는 거다. 뒷산이야 산소 가꾸느라 난 길밖에는 없지만 그래도 오봉산엔 그럴 듯한 등산로가 가꿔져 있다.

입구부터 건강에 대한 안내와 함께 "발바닥 지압로, 신발을 벗어주세요" 명령을 한다.
 입구부터 건강에 대한 안내와 함께 "발바닥 지압로, 신발을 벗어주세요" 명령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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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마다 같은 명령을 반복한다. "발바닥 지압로, 신발을 벗어주세요"
 곳곳마다 같은 명령을 반복한다. "발바닥 지압로, 신발을 벗어주세요"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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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곳곳마다에서 같은 명령을 반복한다. 그런데 그 명령이란 게 다른 곳들 하고는 다르다. '휴지를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라든가 '과일껍질을 버리지 마세요', '자연을 사랑합시다' 등등의 메시지가 아니다. 오봉산에는 그런 문구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다만 "발바닥 지압로, 신발을 벗어주세요"라는 구절이 적힌 팻말만 몇 군데 눈에 띈다. 입구부터 '오봉산 맨발등산로'라는 표지판이 반긴다. 그냥 오봉산이 아니고 맨발로 등산을 해야 하는 오봉산이다. 군데군데 볼록볼록 돌을 깔아 맨발로 걸어 지압을 할 수 있는 곳들이 몇 개 있다.

그러나 걸어보면 여느 산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 맨발 등산로가 있다고 입구부터 선전이 대단하다. 등산로 초입에 들어서면 산이 위치한 자치단체인 조치원읍장이 알리는 안내판들보다 조치원보건소에서 알리는 안내판들이 훨씬 더 많은 산이다.

맨발을 벗고 보니 다른 게 보인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는 운동효과가 덜하기에 맨발로 걸어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물론 산이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자치단체와 보건소에서 그런 의도로 등산로를 개설한 것이다. 사유지이기 때문에 소유자의 허락까지 받아 등산로를 개설했다는 안내문도 있다.

그간은 명령을 하거나 말거나 등산화를 신고 걸었다. 그러나 한번쯤은 그 명령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지난번 오를 때부터 들었다. 기어이 그 명령 앞에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오늘따라 신발을 벗고 오르는 사람이 눈에 많이 띈 것도 한 원인이다.

오봉산 정상의 모습이다.
 오봉산 정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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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정상에 서 있는 안내 표지판이다.
 오봉산 정상에 서 있는 안내 표지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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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올라갔다 내려오다 중간쯤에서 등산화를 벗어 배낭에 매달고 맨발로 걸었다. 발밑의 작은 돌멩이나 모래들 때문에 따끔따끔한 게 그리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발바닥에 우리 신체의 모든 곳을 통제하는 혈 자리들이 분포하고 있어 자극을 주면 건강에 좋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맨발인데 빨리도 내 곁을 지나 올라가고 내려간다. 그들은 이미 맨발걷기에 익숙한 거다. 나는 등산화를 신고 오르내릴 때보다 너무 느리다. 발에서 눈을 뗄 수도 없다. 올라갈 때 산이 주는 아름다운 가을을 보지 못했더라면 서운할 뻔했다. 산에서 가을이 얼마나 익어가고 있는지 전혀 등산화를 벗은 이후에는 볼 수가 없다.

내려오는 내내 발밑에 무엇이 없나만 살폈다. 혹시 가시나 깨진 유리조각이라도 있다면 큰일 나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 깨진 유리조각들도 눈에 들어온다. 등산화를 신었을 때 보이던 흐드러진 꽃이며 일렁이는 바람은 어디로 가고 전혀 보지 못했던 다른 것들이 눈에 띈다.

신발 하나 벗었을 뿐인데, 등산하며 보는 것이 다 달라지다니. 우리가 보는 게 얼마나 우릴 기만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물이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지는데 우리는 얼마나 내 고집을 세우며 그것만 옳다고 하며 사는지 모른다.

맨발이 흙을 만나니 흙이 주는 기운도 그대로 전해져 온다. 특별히 차가운 기운이. 가을답게 쌀쌀해진 날씨 탓에 발이 차갑게 흙의 냉기를 받아온다. 우린 너무 두터운 것들을 입고 있어 이웃의 차가움과 아픔을 느끼지 못할 때가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오봉산은 등산로 정비 또한 잘 되어 있다.
 오봉산은 등산로 정비 또한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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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곁으로는 흐드러진 꽃 언덕이 아름답다.
 등산로 곁으로는 흐드러진 꽃 언덕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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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 내기라도 하다보면

발이 시원해서 제정신이 든 건지, 갑자기 황석영의 소설이 생각난다. <개밥바라기별>에 보면, 아직 청소년기인 상진이 누나뻘 되는 여자 친구 로사가 선을 봤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자기 생각을 적은 대목이 나온다.

"나는 아직 생활이라든가 직업이라든가를 얘기할 처지가 아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들 어른 흉내 내기의 굳건해 보이던 지반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성인으로 들어가는 입장권 같은 건 더더구나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채 자라나지 못한 중닭이나 어중간하게 커버린 강아지의 껑충하고 볼품없던 꼬락서니를 떠올리고 픽 웃었다."

이런 생각이 비단 상진의 것만이랴. 이웃의 아픔이나 고통도 모른 채, 어른 된 양 흉내 내는 게 우리네 모습이 아닌가. 이미 다 된 것처럼 행동하지만 아직도 그저 된 사람 흉내만 내는 나, 맨발을 벗고 걸어보니 발밑 흙속에 박힌 유리조각이 보인다.

맨발로 걸을 때 흙이 고되게 내뿜는 냉기가 발밑을 타고 전해온다. 다른 이들이 맨발로 그리도 잘 걷는 것은 이미 맨발 걷기에 익숙해진 결과인데 그런 이들을 흉내 내 보니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물론 그들처럼 되는 입장권 같은 것은 없으니 여러 번 맨발로 오르다보면 익숙해지겠지만.

뻔뻔하게 등산화를 신고 오봉산을 오르던 내가 오봉산이 전하는 명령에 순종해 보니,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배우게 된다. 나의 아픔을 살피다 보니 다른 사물의 아픔이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흉내 내기라 해도 그러다 익숙할 수 있는 거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겠다 싶다.

더더군다나 맨발 등산이야말로 건강에 얼마나 좋겠는가. 근육운동과 땀 빼기에 그칠 등산을 혈 자리를 마사지하는 것까지 같이 하니. 앞으로는 뻔뻔함 내세우지 말고 자주 맨발로 대지의 숨결을 느껴봐야겠다.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봐야겠다. 어른 흉내 내다보면 어른이 되듯, 맨발로 건강한 이들 흉내 내다보면 몸도 맘도 건강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오봉산 정상에 서 있는 '건강길라잡이' 안내판이다. 오봉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에 초점이 맞춰진 산이다.
 오봉산 정상에 서 있는 '건강길라잡이' 안내판이다. 오봉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에 초점이 맞춰진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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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에 서 있는 '건강이 최고 경쟁력!!'이라는 안내판도 이채롭다.
 등산로에 서 있는 '건강이 최고 경쟁력!!'이라는 안내판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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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갓피플,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오봉산, #등산, #지압로, #맨발걷기,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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