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운동회
 운동회
ⓒ 변종만

관련사진보기


가을운동회 시즌이다. 선선한 날씨와 청명한 하늘 속에 펄럭이는 만국기는 아이들 가슴을 설레게 한다. 교장선생님의 훈화와 국민체조로 시작한 운동회에서 아이들은 청군·백군으로 나뉘어 열띤 경쟁에 들어간다.

교장 선생님의 개회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운동장에서는 학급별 달리기, 장애물달리기, 단체줄넘기, 기마전 시합이 연달아 열린다. 시합이 끝난 중간에는 학급별 매스게임(집단 맨손체조나 율동)이 펼쳐진다.

오전 게임의 백미는 바로 박 터뜨리기. 상대방 바구니를 1초라도 먼저 터뜨려야 점심밥을 먹는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사력을 다해 바구니에 오자미를 던져댄다.

부모님이 싸온 점심을 먹고, 각자 배정된 종목의 시합들이 다 끝나면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인 계주시합이 시작된다. 청군 백군을 대표하는 주자들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고, 상대편을 따라잡아 역전승을 이끌어내는 아이는 만화 속 로보트 '선가드'나 '그랑죠'를 뛰어넘는 영웅 대접을 받곤 했다.

치열했던 계주를 마지막으로 운동회는 끝이 난다. 마무리는 언제나 가족과 함께 사진촬영. 손에는 항상 달리기 시합에서 상으로 받은 공책이 들려 있다.

이것이 운동회의 기억이다. 각자 개개인의 가정사나 당시 친구관계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흔히 운동회 하면 가족과의 추억과 축제 같은 운동시합만이 기억에 남는다.

추억의 운동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하지만 과연 이것이 온전한 기억일까? 최근 우리집 앞 초등학교에서 열린 가을운동회 예행연습을 보면서 그것이 온전한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기억에는 운동회라는 결과만 있었을 뿐, 운동회 전 해야만 했던 연습에 대한 기억은 잊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학교를 졸업한 어른의 단절된 기억이었다. 세월은 잊혀가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어느새 어른의 눈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끔 만들고 있었다.

내가 운동회 연습을 하던 시절, 꼭 합동체육훈련을 받았다. 그 훈련이란 사실상 제식훈련과 다를 바 없었다. 사진은 논산 육군훈련소 연병장에서 제식훈련을 받는 훈련병들.
 내가 운동회 연습을 하던 시절, 꼭 합동체육훈련을 받았다. 그 훈련이란 사실상 제식훈련과 다를 바 없었다. 사진은 논산 육군훈련소 연병장에서 제식훈련을 받는 훈련병들.
ⓒ 연합뉴스 조용학

관련사진보기


운동회가 열리는 하루는 성대한 축제와 같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연습기간은 정말 끔찍했던 기억이 난다. 9월 초의 뜨거운 땡볕 아래서 두세 시간씩 운동회 연습을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몸이 약한 여자애 몇몇이 쓰러지는 것을 본 경우도 있었다.

쓰러진 아이들은 양호실에 보내지고 연습은 계속 됐다. 보통은 50분 연습하고 쉬는 시간 10분이 주어졌지만 진도가 생각만큼 안 나가는 경우는 이마저도 쉴 수 없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두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연습을 한 적도 있었다.

특히 매스게임 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고학년이 될수록 매스게임이 하기 싫어서 몸부림을 치는 아이들이 많았다. 차츰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의 애들이 유치한 소품을 걸치고 가요에 맞춰 단체로 춤을 춰야 한다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고학년들일수록 참여도가 저조했는데, 각 반 담임선생님들은 단체기합을 주거나 본보기로 구령대에서 문제아들을 불러 발길로 차거나 원산 폭격을 시키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곤 했다. 그러면 "나라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아이들이 운동회 연습을 죽도록 싫어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합동체육훈련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합동체육훈련은 매주 화요일, 일주일에 한 번씩 실시됐다.

말이 좋아 합동체육훈련이지 사실상 제식훈련이나 군기를 잡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운동회 연습은 이러한 합동체육 훈련을 일주일에도 예닐곱번씩 받는다는 것을 뜻했다. 실제 본 운동회 연습은 제식훈련이 선행된 후에야 시작됐다. 우리는 수업종이 치기 전에 운동장에 미리 집합해 열을 맞춰놓아야 했다. 그리고 30분 동안 "앞으로 나란히!" "한팔 나란히!" "뒤로 돌아!"와 같이 열 맞추는 데 필요한 제식훈련을 여러 번 받고 나서 운동회 연습을 했다.

가끔 돌이켜보면 믿을 수가 없다. 친구들 중에도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게 시골학교라 그런지 몰라도 좀 심한 편이었죠. 연습 진도가 안 나간다고 엎드려 뻗쳐 시키고, 구령대 위에 애들 불러다가 본보기로 때리고 그런 것들."(상명대학교 3학년 강모양. 24세)

"4·5학년 때 매스게임 할 때, 땡볕에서 한 번에 연습할 때마다 1시간 이상씩 하고 10분씩 쉬었던 거 같아요. 축구골대까지 뛰어가서 선착순으로 오는 기합 같은 건 비일비재했고 푸시업 상태에서 손을 뒤로 젖히게 하기도 하고…. 원산폭격이라고 하나요? 그늘이 생기면 뒤로 물러서게 해서 땡볕에서 연습을 시켰어요. 아이들한테 뭐 이런 걸 시키나 했지만."(다음 메탈 커뮤니티 악숭. 아이디 狂人™)

운동회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운동회
 운동회
ⓒ 변종만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요즘 운동회는 예전과 또 다르다. 운동회가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 부족, 학사일정, 학업 지장 등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운동회를 오후 1시 이전까지만 하거나 아예 2년에 한 번 여는 경우가 늘고 있단다.

"대전·충남 지역 초등학교의 학사일정을 통해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학교는 가을운동회를 개최하지 않거나 학예발표회 등으로 대체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이들 학교들은 대부분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과 학사일정이 가을에 지나치게 편중된다는 것을 이유로 가을운동회를 축소·폐지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충청투데이>(2008년 9월 10일)

"'9월의 종합축제' 운동회가 아담하고 소박한 쪽으로 바뀌고 있다. 대체로 소체육대회, 육상대회 백일장 등으로 단순해졌고 격년으로 여는 학교도 많다. 찬합에 싸오던 음식은 학교 급식으로 대체됐다." - <동아일보>(2008년 9월 26일)

지나고 나면 행복한 게 기억이다. 과정을 떠올리기 전까진 말이다. 과연 지금 어린이들은 먼훗날 지금 운동회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게 될까.


태그:#운동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