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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모임자리에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때마다 나는 "대한민국의 씩씩한 쌈닭 아줌마 이명옥입니다"라고 내 자신을 소개한다. 블로그나 카페에도 어김없이 '대한민국 쌈닭'이라는 간단한 소개말을 넣는다. "저 여자 도대체 뭐 하는 거야?"라는 시선으로 어이없다는 웃음을 보이던 이들도 몇 번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지면 '쌈닭 아줌마'라는 표현이 참 신선하게 와 닿더라고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라는 단편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현진건이 본 사회가 술 권하는 사회였다면 내가  비정규직 아줌마 노동자로 경험한 세상은 '싸움 권하는 사회'다. 조직사회의 생리나 사회를 잘 모르고 살던 나는 생존을 위해 세상과 부딪치며 세상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몸으로 체득하고 난 뒤 점점 쌈닭이 되어 갔다.

 

신문사에 다닐 때도 싸웠고, IMF때 수백만원씩 원금을 손해보고 보험을 해약하는데 그 돈을 한 달 뒤에나 주겠다는 보험사와도 싸웠다. 신문사를 그만둔 뒤 전철역에서 무가지 신문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 신문을 몰래 집어주지 않는다고 의도적으로 나를 못살게 굴던 청소반장과도 대판 싸웠다.

 

지극히 소심한 A형으로 그저 책이나 읽고 과외나 하면서 세상물정 모르고 살던 나 같은 이가 다 쌈닭이 됐으니 이 사회는 '싸움 권하는 사회'가 분명하다.

 

멀쩡한 사람 싸움꾼으로 만드는 사회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월간 <작은 책>이 기획한 특강의 불온한 강사들을 만나면서 정확하게 알게 됐다. 이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1%가 멀쩡한 사람을 싸움꾼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열심히 살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99%나 된다는 사실, 5% 부자들이 차지할 7조각의 파이를 위해 95%가 뼈빠지게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한줄기 희망마저 앗아가 버린다.

 

그러면 모두가 좀 더 행복해지는 길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95%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그냥 참지" 혹은 "내가 손해보고 말지"라는 생각으로 당연한 권리를 지레 포기한다는 데 있다.

 

내 정체성을 일깨운 것은 홍세화님을 비롯한 6명의 불온한 강사들의 강연이었다.

 

그들의 강연은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라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올해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도서의 목록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그 강연 이후 나는 작은 책이 기획한 불온한 강사와 불온한 독자의 만남의 열렬한 팬이 됐다. 사실 착각과 망상에서 깨어나도록 추악한 진실을 열어 보여줬을 때  피하지 않고 직시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고 괴로웠다. 그러나 강의로 만난 사학자·경제학자·노동자·농부·NGO활동가들은  냉정하리만치 담담한 모습으로 1%가 숨긴 99%의 진실이 뚜껑을 열어 보여주었다.

 

이 불온한 시대에 불온한 강사들이 불온한 청중들에게 보여 준 99%의 진실이 <1%의 대한민국(철수와 영희 펴냄)>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촛불집회를 '대한민국 최대의 국민MT'라고 했던 한홍구 교수가 촛불 집회를 바라본 '촛불은 민주화 운동의 곗돈이다'라는 강연이 있는데 촛불집회에 대해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싶어 무릎이 절로 쳐졌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머리에만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몸에 민주주의가 배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몸에 익숙해져 있는 그 민주주의를 누가 와서 건드리고 빼앗아 가려고 하니까 반기를 든 거죠. 제가 이 촛불집회를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민주화 운동이 곗돈을 탔다(웃음)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붓기만 하고 만기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부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곗돈을 탄 거죠.(한홍구 교수 강연 중)"

 

앞선 사람의 사다리를 걷어차거나 끌어내리기 등 한줄 세우기와 무한 경쟁을 지양하고 둥그런 원을 그리며 함께 사는 마을공동체를 꿈꾸는 강수돌의 '사다리 걷어차기', 많은 날을 부끄러움으로 고개 숙이게 만들었던 김진숙씨의 '자본 천국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  과거사 청산에 관련했던 한홍구 교수가 들려 준 '한국 현대사의 추악한 진실', 동북아 정세 전문가인 이철기 교수의 '우리가 원하지 않는 전쟁에 말려들 수 있다', 청소년 단체 활동가인 배경내씨의 '이땅에서 청소년으로 산다는 것', 철학교수에서 농부로 돌아간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들려준 윤구병 선생의 '나는 왜 농사꾼이 되었나'는 1%가 숨긴 99%의 진실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진실의 뚜껑이 열렸으니 이 책 또한 불온도서 목록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혼자 미소 짓는다.

 

99%가 명분 있는 쌈닭이 되면 세상은 변한다

 

아직 책으로 출간되지 않은 박노자 교수 강연이 끝난 뒤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에 박노자 교수가 알려주었던 영국 항공사 기내식을 배급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재고용사건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항공사가 기내식을 배급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한 사실을 안 정규직 항공사 직원들이 그날로 파업에 동참해 항공기 운항을 중단했고 해고자들은 전원 복직이 됐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내게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 선, 20대 90%가 비정규직인 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동참해 준다면 죽어가고 있는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나 코스코 비정규직 투쟁은 벌써 해결이 되었을 것이라고.

 

1% 기득권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99%의 희생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에서 함께 행복해지자는 것만큼 분명한 명분을 지닌 싸움이 또 있을까? 절반의 절망감을 온전한 희망으로 바꾸는 길은 행복하지 않은 99%가 자각 속에서 명분 있는 싸움꾼으로 연대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은 길이 멀어 보이지만 한홍구 교수의 말대로  마음속 촛불을 끄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가 잊고 지내던 민주화라는 곗돈 벼락을 또 한 번 맞고 행복해 할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1%의 대한민국>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월간 작은 책이 기획한 2008년 상반기 강좌를 묶어 '철수와 영희' 출판사가 출간한 것입니다. 하반기 남은 강좌는 9월 25일(목) 저녁 7시 손석춘씨의 <혁명은 다가오는가>, 10월 23일(목) 저녁 7시 우석훈씨의 <신자유주의가 어디까지 갈까>며 합정동 문턱 없는 밥상 2층 강당에서 열립니다. 하반기 강좌 역시 책으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1%의 대한민국 - 열심히 사는데 왜 우린 행복하지 않을까?

강수돌 외 지음, 철수와영희(2008)


태그:#1%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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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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