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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인터뷰를 선보인다. 인터뷰어는 '아들'이며 인터뷰이는 아들의 '엄마'다. 기자가 지금까지 해본 인터뷰 가운데 가장 의미있지만 부끄러운 인터뷰가 될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에 대해 가장 오랜 증언자이면서 가장 중요한 인터뷰이가 되어야 하건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터뷰'란 '나'보다는 '우리' 혹은 '남들'에게 더 의미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나에게 여운을 남길 나와 엄마를 위한 인터뷰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 주>

 

해녀 일을 하는 제주 토박이 고순자(63)씨는 자식 셋을 키운 평범한 어머니다. 1남4녀의 넷째 딸로 태어났지만 제주 4·3으로 부모를 잃어 어려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세에 해녀 일을 시작해 26세에 시집을 갔다. 남의 집 살이 13년 만에 집을 장만했으며 작년에 남편과 사별했다.

 

인터뷰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아들이 추석에 맞춰 낙향한 13~14일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성산포 집과 슈퍼 가는 길목, 부둣가 해녀의 집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이제까지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으니 아들과 최초로 인터뷰를 한 셈이 된다.

 

자식 키우면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지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아들의 생환'이라고 말했다.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필자)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급성폐렴과 림프성 결핵 등 생사를 위협하는 굵직한 병마의 위기를 대여섯 차례나 맞았다. 장기입원 등 수술을 한 것도 두 자리수가 훌쩍 넘어간다. 대학 시절 폐종양 수술을 마지막으로 병마의 기나긴 위협이 한 풀 꺾였다.

 

이런 까닭으로 엄마는 아기가 자신의 눈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항상 두려워했다고 했다. 금방 하늘나라로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오늘 잠자다가 내일 없어져버리지 않을까 했는데 다음날 잠에서 깨면 살아있더라.,그 때가 가장 기쁘고 뿌듯한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45년 해녀 인생, 정년이 가장 길어"

 

- 해녀 일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소라공장에서 7년 일하고 23세에 육지(제주도에서는 한반도를 '육지'라고 부른다)에서 몇 년 살다 왔지만 대체로 19세 경부터다. 할머니는 가정살림하면서 해녀 일을 해도 늦지 않는다면서 그 일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비해서 시작이 늦었다."

 

- 아기를 배고 나서 물에 들면 위험하지 않나? 해녀병 같은 것은 없나?(여느 해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뇌선'이라는 약을 달고 다닌다. 식품영양사인 작은딸은 약 자체가 고 카페인이기 때문에 당장 끊으라고 성화다)

"큰아이 가졌을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바다에 들어가니 손발이 춥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애를 가지면 바다에 잘 안 들어갔지만, 그 때야 그럴 여유가 있었나."

 

- 해녀 일을 너무 오래하는 거 아닌가. 환갑도 지난 나이인데.

"나는 젊은 축에 속한다. 보통 일흔이 넘도록 하고 여든까지 하는 분도 있다. 해녀들은 노인정책의 중요한 모델이다. 60세 이상 노인들은 복지비가 많이 들어가는데, 해녀들은 노력하는 것에 따라서 여든까지 일을 할 수 있으니 경제활동을 남보다 더 많이 하고 복지비도 그만큼 적게 들어간다. 제주도가 해녀를 관광사업화하면서 보일러비며 각종 공과금 혜택을 주고 물질을 하러 오가는 때 '포토타임' 같은 것을 하며 지원금도 주는 것은 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다. 옛날에는 해녀를 천대했지만 가장 정년이 긴 것이 해녀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나도 일할 날이 아직 많이 남았다."

 

- 한 달에 며칠이나 쉬나.

"물에 들어가는 날은 한 달에 보름 정도다. 옛날에는 한 달 30일을 물에 들어갔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지금은 파도가 세면 장사를 나간다. 장사는 18일이다."

 

- 물에 가는 거 15일 하고 장사가는 거 18일을 더하면, 한 달에 33일 아닌가?

"물에 가는 날도 장사를 하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한 달에 하루도 안 논다. 노는 날은 물에 안 가는 날이다. 물에도 가지 않고 장사도 나가지 않는 날은 조개 파러 간다. 조개 파러 가는 날이 노는 날이다.(웃음)"

 

"네가 아프면 내가 웃음을 잃는다"

 

- 제일 속썩인 자식은 누구였나?

"제일 속썩였다기보다는 가장 걱정스러웠던 자식이 막내였다. 아픈 건 어쩔 수 없지. 태어나서 3개월 때부터 급성폐렴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100일도 되기 전부터 아프기 시작한 것이 15~16년 병을 바꿔가며 앓았다. 마지막 수술을 했던 것이 스무살 대학교 때였다. 그때는 의료보험도 없을 때니 돈도 적잖이 들었고. 당시에는 대학도 돈 없어 못 보낼 때라 이웃들이 '당신 아들은 나중에 대학 안 보내줘도 섭섭하지 않겠다'고 놀리기도 했다."

 

- 자식 키우면서 가장 기쁠 때는?

"막내가 수술로 살아나고 소아마비처럼 다리를 절뚝이지 않도록 수술이 성공했을 때. 3살 때 유리창에서 떨어져서 동맥이 잘려나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신경을 상해서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 길이가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해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의사는 30%밖에 성공확률이 없다고 했다. 칼을 대야 하는 곳도 3군데나 됐다. 다행히 60% 정도 성공을 해서 지금은 정상인처럼 걷고 군대도 다녀왔다."

 

- 아픈 자식을 너무 편애해서 다른 자식들이 원망하지는 않았나?

"솔직히 딸들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아픈 자식에게 정이 많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막내가 건강하고 딸 중 하나가 아팠다면 정을 그 쪽으로 쏟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 아프면 내가 웃음을 잃고, 내가 아프면 네가 웃음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 아픈 아들이 장애인 취급을 받았다고 하던데.

"군청(당시 남제주군청)에서 해마다 장애인 봉투가 날아왔다. 신경을 잃어서 절뚝거리고 다니니까 신고가 들어갔나 보다. 작은딸이 화가 단단히 나서 '내 동생이 왜 장애인이냐'며 봉투를 박박 찢어버리기도 했다. 친척들은 나를 위로하는 뜻에서 옛날에는 아들이 군대 가면 집안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닌데 군대 안 가게 돼서 그래도 낫지 않느냐고 말했다. 결국 아들은 건강하게 자라서 현역으로 전역했다."

 

-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건강' 한 마디뿐이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거 아닌가. 특히 막내아들은 병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기 때문에 술이나 담배는 절대적으로 해로우니 주의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울에 있다는 핑계로 친구들의 대소사에 신경쓰지 않고 명절 때 고향 내려와도 한번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친구들을 잘 살펴주기를 바란다."

 

동네에서 항상 회자되는 말이 있다. 당시 이웃에 살던 아무개는 사소한 병이었는데도 부모가 챙기지 않고 약만 쓰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다. 내가 살아나리라고 생각한 동네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엄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옥 입구에서 되살아났다. 나의 생명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엄마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내게 던져진 '삶의 물음'에 대답하려면 한 사람의 생을 갖고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거 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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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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