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집회 현장에 있던 엄마에게, 아들로부터 문자메시지 한 통이 왔다.

 

'이런 날은 집에 일찍 들어오면 안 돼?'

 

엄마는 이랜드일반노조의 조합원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집회 현장에 있던 엄마는, 조합원 모두 집회 현장에 있는데 혼자서만 일찍 가기가 마음에 걸려 아들의 문자메시지를 받고도 집회 현장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물론, 평소엔 엄마를 늘 이해하고 말없이 지켜보며 응원하던 아들이었다는 사실도 엄마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엄마는 다음날 아침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눈에 띈 것은 거실 바닥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굳은 촛농이 떨어져 있었다. 집에 전기가 끊겨 아이들은 촛불에 의지하며 책을 보고 공부하며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촛농은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어떻게 발자국을 남기며 움직였을지를 보여줬다."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에 나온,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이랜드일반노조원은 대부분 '아줌마 조합원'이다. 갖가지 이유로 인해 생계에 위협을 느껴 홈에버 매장에서 일하기를 선택했던 그들. 이들 중 태반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거실 바닥에 굳어 떨어진 촛농을 봤을 엄마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어쩌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북적한 매장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랜드노조 천막농성장

 

 

추석 연휴가 시작된 지난 13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 홈에버 매장 근처에 자리잡은 이랜드일반노조의 천막농성장을 찾았다. 이날, 그들은 파업 449일째를 맞이했으며 천막농성은 76일째였다.

 

물론, 천막은 썰렁했다. 김경욱 위원장과 조합원 1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그 조합원도 곧 집으로 향했다. 한산한 분위기 속에서 2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지난 8월 12일 오후에, 서울 면목동 홈에버 매장 근처에서 열린 이랜드일반노조 문화제에서 김 위원장을 인터뷰했던 적이 있어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인터뷰'가 아닌 '대화'를 하고 싶었다. 명절 연휴에 농성을 진행하는 이들을 만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어차피 뻔하다. 대답도 마찬가지로 뻔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일방적으로 질문하고 일방적으로 답변하는 뻔한 형식을 떠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답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기를 원했다.

 

김경욱 위원장은 스스로 "많이 무감각해졌다"고 이야기했다. 무슨 의미인지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난 449일은 이랜드일반노조로서는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만큼 큰 일도 많았을 것이며, 그중에는 충격적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큰 일을 오랫동안 겪었다면,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일이 없을 것이다.

 

대형할인마트의 노동자들이 겪어야만 하는 격무와 스트레스를 이야기해봤다. 그 속에서 김경욱 위원장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홈에버 매장으로 돌아가면 그와 같은 격무가 기다리고 있는데 가끔은 왜 그렇게 돌아가려 하는지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섭 과정에서 사측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고 한다.

 

그들과는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렵지만,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적이 있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두루 모이는 곳인 만큼, 소위 '진상'이라고도 하는 특이한 사람들과도 자주 부딪쳐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한 곳이다. 게다가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의 파업과 농성 과정에서 알려진 홈에버 매장만의 독특한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정당한 대우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른바 '문자메시지 해고' 등으로 유명한 사측의 황당한 행태 등으로 인해 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멸감과 상처를 입었다. 그 모멸감과 상처가 돈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이들의 오랜 투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홈에버 매장을 방문하거나 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언제부턴가 시위나 투쟁 현장에 취재하러 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버릇이 생겼다. 김경욱 위원장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특이한 버릇'이라고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외로운 천막농성장과는 달리, 추석 연휴를 맞아 고운 옷차림으로 외출 나온 사람들 내지는 명절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다양한 물품을 구매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끔은 천막농성장을 힐끗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내 시선을 거둔다.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은, 교대로 추석연휴에도 천막농성장을 지킬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소박한 꿈은 언제나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적막과 고요 속 '코스콤 비정규직 천막농성장'

 

 

김경욱 위원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곧장 찾아간 곳은 여의도 증권거래소 근처의 코스콤 비정규직 천막농성장이었다. 상암 홈에버 매장과 달리 사람이 거의 지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추석 연휴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하나가 돼 사측에 맞서 투쟁해온 이랜드일반노조와는 달리, 코스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줬던 사례로 유명하다.

 

코스콤 비정규직 천막농성장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이는 전용철 조합원이었다. 지난 3월 11일, 영등포구청과 코스콤 사측이 동원한 용역 100여 명이 전경 6개 중대의 '보호' 속에서 시도했던 강제 철거 당시 피를 흘리면서 업혀 실려간 바로 그 사람이다.

 

김경욱 위원장과 달리 그는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천막 농성장에서 추석 연휴를 맞이하는 기분이 어떠냐"는 뻔한 질문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찾아와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전하자, 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 속에서 그의 분노가 여전하다는 것을 느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코스콤 사태'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됐다. 전용철 조합원은, 똑같은 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도 불과 5분의1 수준의 급여를 받아야만 했던 것에 대해, 그리고 코스콤 내부에서 보고 겪었던 부조리에 대해 여전한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 시점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심각한 수준이었다. 차후에 다시 취재를 와 집중적으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역시나 "여전히 이곳에서 외롭고 힘든 싸움을 지속하는 이유"에 대한 답변이었다. 주변에서는 "무능력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오해 아닌 오해가 쏟아져나온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사실상 같은 일을 했음에도 5분의1 수준의 급여를 받아왔으며 다양한 차별과 탄압을 받아온 것에 대한 모멸감이 큰 이유인 것 같았다.

 

게다가 1997년의 IMF 사태 이후 지난 10년 간 한국 경제의 흐름과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었다. 재취업 시장이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닌 셈이다. 게다가 파업 농성으로 유명한 코스콤 비정규직에게 쉽사리 문을 열어줄 재취업 시장이 과연 존재할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그들에게는 다양한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용철 조합원은 '트라이애슬론'이 개인적인 취미라고 밝혔다. 수영 1km, 사이클 40km, 달리기 10km 등의 철인 3종 경기를 소화하는 종목이다. 지난 5월 25일에 열린 '2008 서울국제트라이애슬론' 경기에도 참가해 2시간 42분 54초의 완주 기록을 남긴 적도 있었다.

 

사태가 해결되면 개인적인 취미도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개적인 공간에서 장기 천막투쟁을 벌일 때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특히나 현장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태반이 '아는 사람'이거나 '매번 지나치는 사람'이라고 한다.

 

추석 연휴, 오히려 집으로 가는 것이 '고문'처럼 느껴져 천막에 자리잡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코스콤 비정규직지부 조합원들, 과연 '마음 편하게' 집으로 갈 수 있는 그날은 언제쯤 찾아올 수 있을까. 쓸쓸한 여의도의 천막농성장에서 그들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추석, #홈에버, #이랜드, #코스콤, #천막농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