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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오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홍준표 원내대표 등 당직자 5~6명이 소파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홍준표 원내대표 옆으로 슬쩍 다가가 "불교계가 저렇게 성나있는데, 어청수 경찰청장을 그냥 놔둘 것이냐"고 물었다. 홍 원내대표가 발끈했다. "나는 자르지 말자고 공식적으로 얘기한 사람이다, 자르면 안 된다".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어청수 같은 사람 자르면 MB정부에서 누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충성하겠나?"

 

다시 물었다. "불교계의 어청수 청장 파면 요구는 어떻게 할 거냐?" "빌미에 불과하다."

 

답변은 짧았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불교계의 최종 목표가 어 청장의 퇴진이 아니라는 뜻으로 들렸다.

 

추가 질문을 하려고 하자 "그만 하자"며 손을 내저었다. 대신 홍 원내대표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옆에 있던 담배갑을 잡았다. 국회 원 구성 타결과 함께 "담배를 끊겠다"던 다짐은 불과 1주일을 가지 못했다.   

 

홍준표·임태희 "퇴진 불가" vs 박희태·나경원 "퇴진해야"

 

홍 원내대표는 여권 내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로 통한다. 그는 4일에도 "대통령 유감 표명은 있을 수 있지만, 어 청장 퇴진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홍 원내대표는 "어 청장의 거취가 이번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며 "불자들의 자존심과 정부의 종교편향 등 두 가지 문제만 안심시키면 본질적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후보 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 정책위의장도 "어 청장은 임기가 보장된 치안책임자"라며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문제에 대해 당이 감정적으로 예단해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희태 대표 등 당 지도부의 생각은 다르다. 박 대표는 지난달 2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어 청장이 특정 종교에 편향적인 것 아니냐, 상황을 수습하려면 어 청장에 대한 책임있는 조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일 열린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도 "불교계 반발이 매우 심각해 이명박 정부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이 대통령의 유감표명과 어 청장의 퇴진이 불가피하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나경원 한나라당 제6정조위원장은 5일 이와 관련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이미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에 (청와대에) 건의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나 위원장은 이날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이같이 전하고 "(불교계의 반발은) 사실 정서 문제인 것 같다"며 "어 청장이 자진 사퇴하시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나 위원장은 이어 "지금까지 청와대의 입장은 조금 부정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추석 전에는 오해도 풀고 불교계가 믿을 수 있는 대책도 마련하고, 그런 입장 표명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어청수 청장의 경질 여부를 두고 엇박자를 내고 있는 셈이다. 이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당내 인사들이 '어청수 지키기'에 적극 나서는 것은 어 청장의 경질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청와대 내부의 기류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청와대 "경질 논의도 안했다, 일하는 분 힘빠지게"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4일 "당쪽에서 이런저런 관측이 많은데 현재로선 (어 청장의 경질 문제에 대해) 방침이랄까, 정해진게 없다"며 "현실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불교계에서) 이런저런 오해들들이 불식이 되면 가라앉을 것"이라며 "원래 해뜨기 전이 제일 어둡지 않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고 낙관론을 폈다.

 

그는 또 "힘빠지게 자꾸 밖에서 퇴진론이 나오면 일할 맛이 나겠느냐"며 "추석 앞두고 민생치안도 챙겨야 하는데 '강도·절도 잇달아' 기사 나오면 안될 거 아니냐"고 여유를 보였다.

 

이 관계자는 정치권과 언론 등에서 어 청장 퇴진 가능성을 점치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며 "기차는 대전역을 통과하고 있는데 보도는 좀 있으면 동대구역에 도착하는 양상"이라고 일갈했다.

 

또한 최근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어 청장 파면 요구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수석회의에서는 그런 얘기를 안 한다, 할 게 얼마나 많은데…"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여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불교계는 물론 야권이 일제히 어청수 청장의 경질을 요구하고 있고, 여당 지도부조차 어 청장 경질 불가피론을 펴는데도,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입장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일단 청와대가 어 청장의 경질을 논의조차 하지 않는 표면적 이유는 "법 위반 행위 등 특별 결격사유가 없는 어 청장을 임기 도중 경질하면 공직사회에 동요가 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말, 참여연대가 11만여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한 '어청수 경찰청장 파면에 관한 청원서'에 따르면 어 청장의 위법 의혹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촛불 집회 과정에서 1500명 이상의 시민이 현행범으로 체포됐으나 대부분은 형사소송법을 위반한 불법체포·불법감금으로 볼 수 있음."

 

"서울지방경찰청이 시위자를 체포하면 구속 여부에 따라 2~5만원의 포상금을 주겠다거나 마일리지를 부과하겠다거나 혹은 성과를 반영하겠다는 등의 방침을 정했는데도 적절한 지휘감독을 하지 않아 무리한 체포를 방조한 것은 경찰관직무집행법의 위반."

 

"경찰의 물대포·소화기·방패·곤봉 등으로 인해 촛불집회 참가자 중 2500여명이 부상. 절차를 위반하여 시위대에 물대포를 정조준 발사하고, 인체에 유해한 소화기를 분사하는 등 스스로 정한 '경찰장비관리규칙'도 위반. 도망가는 시위대 뒷머리를 가격하고, 쓰러진 여대생 머리를 군홧발로 짓밟는 등 폭력을 사용하여 경찰관직무집행법을 위반."

 

"지난 7월 1일, 경찰청이 일선 경찰관들에게 '전통적 정부 지지세력 복원 방안을 수집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보도되었음. 헌법(7조)과 경찰법 제4조(권한남용 금지)와 국가공무원법 65조(정치운동 금지) 정치적 중립의무를 어긴 것으로 경찰 수장이 책임을 져야 함."

 

당시 청원서는 "이 같은 일은 어 청장의 정권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과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을 무시한 강경 진압 방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최종 책임 역시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아침이슬' 막아준 '명박산성'... 자진 사퇴 가능성은?

 

결국 청와대가 '어청수 지키기'에 나서고 있는 것은 그의 결백 때문이 아니라 홍준표 원내대표가 말처럼 그의 충성심 때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촛불정국 때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들려오는 '아침이슬'도 들었겠지만, 청와대를 향해 밀려오는 촛불을 막아줬던 '명박산성'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으론 촛불정국에서부터 지켜온 어청수 청장을 해임시킬 경우, 8.15 광복절을 계기로 전방위적으로 감행하고 있는 '강공 드라이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또한 불교계가 제2·제3의 요구를 해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시간을 갖고 불교계의 오해를 풀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안이한 인식도 한몫 하고 있다.

 

한편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어 청장의 자진 사퇴 가능성은 아직 낮아보인다. 최근 어 청장은 국회에 출근하다시피 나와 여야 지도부에게 얼굴도장 찍기에 여념이 없다.

 

경찰청 최광화 대변인은 4일 "어 청장은 참모회의에서도 추석 명절 전후 민생치안에 주력하고 이번 (종교 편향 논란) 사태에 대해 추호도 흔들림 없이 경찰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태그:#어청수 경찰청장, #명박산성, #종교편향 논란, #불교, #이명박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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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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