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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거덕, 삐거덕'

 

40m 높이의 철탑을 절반쯤 올랐을 때, 바람이 지나갔다. 낡은 쇠 구조물 특유의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철탑은 부르르 떨었다. 그 진동이 몸에 전해지자, 팔과 다리가 굳어 한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더 오를 생각을 못했고,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굳이 발밑을 내려다보지 않더라도, 저 멀리 서울역과 그 곳에서 서 있는 KTX 열차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게 무척 아찔했다. 한숨을 여러 차례 내쉰 뒤에야 겨우 한 발을 뗄 수 있었다.

 

3일 오후 KTX·새마을호 승무원의 고공농성장인 서울역-서부역 인근 조명 철탑 꼭대기를 향하는 길은 이처럼 멀고도 험했다. 철탑에 도착하고 나서가 더 고역이었다. 흔들림의 범위가 그 아래와는 차원이 달랐다.

 

철탑 꼭대기는 울타리가 허술해 무척 위험했다. 일부 스티로폼으로 덧댔지만, 바람이 몸에 그대로 부딪쳤다. 사색이 된 기자에게 철도노조 KTX 승무지부의 오미선(29) 대표와 정미정(27)씨 그리고 장희천(29) 새마을호 승무원 대표가 연신 "괜찮으냐"고 물었다. 이들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8일째 하늘에서 비바람 맞으며 사는 사람들 

 

흔들리는 철탑에 몸을 맡긴 지 8일째, 이들은 철탑의 흔들림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고 말했다. 바구니를 통해 먹을것을 전달 받고, 생리적인 요구도 겨우 해결해야 하는 생활이 힘이들기는 하다.

 

하지만 지난 주말 비바람이 몰아쳤을 땐 잠을 아예 못 잤다고 한다.  오미선 대표는 "죽다 살아났다"며 "천막 안으로 비가 들어오고, 천막이 계속해서 흔들리고, 떨어질까 무서웠다"고 전했다.

 

사실 비바람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녹슨 철탑 그 자체다.

 

장희천 대표는 "이젠 이렇게 녹슨 조명 철탑이 별로 없을 정도로 오래됐다"고 말했다. 철탑에 성한 곳이 없었다. 정미정씨는 "이음새에 볼트·너트 빠진 곳이 많고, 그나마 철사 묶어놓은 곳도 별로 없다"고 거들었다. 서울역에서 열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자, 철탑이 흔들렸다.

 

장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올라왔을 텐데…"라며 농을 던졌다. 이에 오미선 대표가 한 숨을 쉬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철탑을 보수하러 사람이 올라올 텐데, 볼트·너트 빠진 걸 그대로 놔두고 부식된 것도 때우지 않았다. 코레일에 우리 업무를 외주화하면 KTX 안전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는데, 철탑 안전도 보장 못하면서, KTX 안전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철탑에선 오고가는 수많은 기차가 보인다. KTX·새마을호 승무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장 대표는 "열차를 못 탄지 정말 오래 됐다, 방송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착잡하다"고 밝혔다. 

 

땅에는 수많은 열차들... 언제 저기서 다시 일할까

 

 

KTX·새마을호 승무원들과의 대화는 지난 1일 "승무원을 직접 고용할 법적 의무도 방도도 없다"고 밝힌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의 입장 표명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코레일 측은 "승무원 문제는 '생계형 투쟁'이 아닌 '정치적 투쟁'으로 비쳐진다"며 "철탑 고공농성 등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을 동원하고 감성적 구호를 내세워도, 그들의 요구가 법과 원칙의 범위를 넘어서는 한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현재 코레일은 강경호 사장 부임 이후, 승무원들에게 자회사가 운영하는 열차카페 판매사원직 알선을 제안한 상태다. 이에 대해 오미선 대표는 한참이나 비판을 쏟아냈다.

 

"극단적인 투쟁을 할 만큼 절박하지만, 결코 그 제안을 받을 수 없다. 직접 고용에 대한 명분과 정당성이 우리에게 있다. 직접 고용을 포기하면 굴욕적인 삶, 어두운 인생을 살아야할 것 같다. 지난 3년 동안 투쟁한 게 물거품이 될 것이란 생각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코레일의 태도에서 절망을 느낀다고 했다. 최근 회사 쪽에 백기 투항한 뉴코아 노조의 결과도 그랬다. 오 대표는 "비정규직 투쟁은 끝이 처음보다 못한 것 같다, 암울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속내를 내비쳤다.

 

"어떤 일자리를 구해서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일이 눈에 밟힐 것 같다. 지금 나가있는 동료들도 KTX 타거나 우리 기사만 봐도 눈물 난다고 연락해온다. ' 카페열차' 안을 받기가 죽기보다 싫다. 차라리 나가겠다. 결과가 어떻든 당당하게 마무리 하고 싶다."

 

이어 정미정씨는 "투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나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예쁘게 꾸미고 싶은데, 세상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즐겁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싫다"고 밝혔다.

 

"카페열차는 죽기보다 싫다, 차라리 나가겠다"

 

그래도 절망만큼 희망은 존재한다. 승무원들은 아직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을 내지 않았지만, 심각하게 이 사안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다. 법적인 판단을 통해 이 사안을 마무리하고 싶은 코레일 측도 이를 원하고 있기는 하다.

 

오 대표는 "교섭으로 문제가 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소송을 내지 않은 것"이라며 "이렇게 2~3년 걸릴 줄 알았더라면 소송 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등법원에서 다른 사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코레일이 우리의 사용자라는 판단을 했다"며 "우리에게 유리한 판단이 나올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KTX·새마을호 승무원들은 외롭지 않단다. 최근 언론의 관심이 늘고 있다. 2일 이곳에 오체투지 순례단이 들를 정도로, 종교계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정규직 노동자의 연대가 큰 힘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희망은 KTX·새마을호 승무원 자신들이다. 3년 넘게 고공농성·단식 등 죽는 거 빼고 다해본 그들의 의지는 어디서 왔을까 궁금했다. 오 대표는 "우릴 항상 믿고 지켜봐주시는 부모님·가족·동료가 버팀목"이라고 밝혔다.

 

1시간여 인터뷰를 끝내고 철탑 아래로 내려오자, 두세살 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엄마가 된 KTX 여승무원들이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보고 방금 전 정미정씨의 말이 생각났다.

 

"싸우는 이유는 직접 고용 때문만이 아니다. 나중에 내 자신을 돌아봤을 때, 내 신념 굽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느끼고 싶다. 나중에 제 아이에게도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다."


태그:#KTX 여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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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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