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기도 연천을 답사지로 정한 세 가지 이유

 연천군의 중심 하천 임진강
 연천군의 중심 하천 임진강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사실 연천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남과 북이 휴전선으로 갈리는 바람에 북쪽의 오지가 되고 말았다. 경기도 연천군은 현재 695.6㎢의 면적에 4만56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북쪽으로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군사보호지역으로 활동마저 제한을 받고 있으니 경제활동 공간이 줄어들 수밖에. 연천은 군이 내건 슬로건처럼 "수려한 경관과 기름진 들녘"을 가지고 있는 "인심 좋고 살기 좋은 풍요로운" 고장이지만 계속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이번 여름 우리는 이곳 연천을 답사지로 정했다. 첫 번째 목적은 연천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을 보기 위해서다. 한 여름 성을 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성은 대개 산 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올라가는 데 힘을 좀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팀은 성을 좋아한다. 아마 우리 지역에 대림산성, 장미산성, 충주산성, 월악산성과 같은 유명한 성들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전곡리 선사유적지에 있는 주먹도끼 모형
 전곡리 선사유적지에 있는 주먹도끼 모형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두 번째 목적은 고려시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과 고랑포구 북쪽에 있는 경순왕릉을 보기 위해서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살다가 죽은 다음 경주로 가다 이곳 연천에 묻혔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 목적은 초창기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대명사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보기 위해서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1978년 발견된 주먹도끼 하나로 유명해진 곳이다.

남쪽에서 연천 가는 길이 예전에 비해 훨씬 가까워졌다. 서울외곽 순환고속도로 덕분이다. 우리는 구리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고속도로를 타다 의정부 분기점에서 나와 동두천을 지나 철원까지 이어지는 3번 국도로 들어선다. 이 도로는 대개 경원선과 나란히 이어진다. 이 3번 국도를 타고 연천군 청산면을 지나니 한탄강이 나오고 한탄강 다리를 건너니 바로 그곳에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있다.

전곡리 선사유적지에는 연천군 문화관광해설사인 최병수 선생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연천의 문화유산을 안내해 줄 분이다. 차에 올라 잠시 우리와 인사를 나누고는 오늘의 일정을 소개한다. 큰 틀은 경순왕릉-호로고루-점심-숭의전-당포성-은대리성-선사유적지이다. 그러므로 이번 연천 답사는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출발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형 답사이다. 우리는 휴식을 취할 겸 차에서 내려 잠깐 선사유적지를 개관해 본다. 

잊혀져 가는 고랑포

 호로고루에서 바라 본 고랑포쪽 풍경
 호로고루에서 바라 본 고랑포쪽 풍경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계획에 따라 차는 바로 경순왕릉으로 향한다. 차는 37번 국도를 따라 파주시 적성면 두지리로 간 다음 북쪽에 있는 임진강을 건너 연천군 장남면으로 들어간다. 장남면 고랑포리에 경순왕릉이 있기 때문이다. 고랑포(高浪浦)는 임진강의 대표적인 나루터로 강의 북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고랑포는 임진강 건너편 남쪽으로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와 연결된다.

옛 문헌에는 고랑포가 '고랑도(高浪渡)'로도 기록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보면 현재의 임진강인 대수(帶水)를 설명하면서 고랑포와 호로고루를 이야기한다.

 고랑포 인근의 호로고루 성
 고랑포 인근의 호로고루 성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대수(임진강)는 또 서남쪽으로 흘러 절벽 아래 이르게 되는데 고랑도라고 한다. 허미수 선생이 이르길 호로하라고 불렀다. 하류에는 노자암이 있고 또 고루가 있다. 강벽이 대단히 견고한데 그 여울을 호로탄이라 부른다. (帶水。又西南至卦巖下。爲高浪渡。許眉叟云。瓠蘆河。在下流鸕鶿巖下。下有古壘。因江壁爲固。其灘曰瓠蘆灘。:『與猶堂全書』 第六集 地理集 第八卷 「大東水經」)"

고랑포는 한국전쟁 전까지 임진강에서 가장 번창했던 포구로 임진강 상권의 중심지였다. 임진강 수운을 이용 배가 서해안으로부터 이곳까지 올라와 물물교환을 했다. 조기, 새우젓, 소금을 실은 배들이 고랑포구에서 장단의 대표적 특산물이었던 곡물, 콩, 땔감 등과 교역을 했던 것이다. 수상 교통 덕에 고랑포는 농수산물의 거래처 역할을 해 왔다.

6·25 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곳 고랑포에 2일과 7일 장이 섰으며, 장남면 사무소 등 관공서와 금융기관, 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후 휴전선이 생기면서 비무장지대 인접지역이 되어 출입이 통제되었고 현재는 잡초만 무성한 강변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제 고랑포는 인근의 경순왕릉과 호로고루 성을 찾는 사람들이 잠깐 들러 가는, 말 그대로 잊혀진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

 경순왕릉
 경순왕릉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장남면 소재지를 지나 372번 지방도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고랑포 나루 북쪽 언덕에 경순왕릉이 나타난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을 따라 올라가니 먼저 수복방과 비각이 보이고 그 너머로 경순왕릉이 보인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과도 서울 주변에 있는 조선왕릉과도 다르다.

수복방과 비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의 왕릉과 유사하다. 그것은 이 왕릉이 조선시대 개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1747년(영조 23)에 다시 세워진 묘비를 통해서 확인된다. 묘비의 앞면에는 '신라경순왕의 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는 7자가 분명하다.

 경순왕릉 묘비 전면
 경순왕릉 묘비 전면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경순왕릉 묘비 후면
 경순왕릉 묘비 후면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뒷면에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戊寅: 978년) 4월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마지막에는 영조 23년(丁卯: 1747)에 다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 10월14일 장단에서 경순왕의 지석과 신도비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 김응호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한다. 여기서 수치란 고쳐 새롭게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1748년 1월29일에는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해서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한다. 이렇게 해서 경순왕릉은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 보존될 수 있었다.

 경순왕릉 신도비
 경순왕릉 신도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경순왕릉은 조선 영조 때 다시 만들어져 수복방도 있고 비각도 있고, 봉분의 모양이나 석물도 조선시대 양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먼저 비각을 들여다보니 신도비로 알려진 하얀 비석이 보인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가운데 차돌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1000년이 넘는 풍화로 인해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전문가들에 의해 경순왕(敬順王), 김(金), 시월여친지국(十月輿櫬至國) 등의 글자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비는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인근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인 김빈(金礗)과 김굉 등이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74년 이 비는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73년 이후 이루어진 경순왕릉 정화에 따라 1987년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132㎝, 폭이 67㎝, 두께가 15-18㎝이다.

그러나 모양은 조선의 왕릉을 닮아

비각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잔디가 잘 자라고 있는 언덕이 보인다. 이 언덕 위에 경순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조선왕릉을 닮았다. 봉분과 호석, 양석과 망주석 그리고 장명등의 배치나 모양새가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배치나 석물의 종류와 수가 조선왕릉에 비해 아주 간소하고 적다. 그것은 능이 실전되었다가 조선 영조 때 다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경순왕릉
 경순왕릉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상단에는 호석이 둘러진 봉분을 중심으로 앞에 신라경순왕의 능이라고 쓰인 묘비가 있다. 중단에는 가운데 장명등이 있고 좌우 대칭으로 양석과 망주석이 하나씩 서 있다. 그리고 하단에는 석물이 전혀 없다. 조선왕릉에 보이는 혼유석, 호석과 마석이 없고, 문인석과 무인석도 없다. 봉분 뒤로는 곡장을 쳤는데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곡장 뒤로 올라 앞을 내려다 보니 왼쪽 앞으로 임진강이 흘러간다. 전체적으로 풍수를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왕의 운구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곳 고랑포에 이르렀다고 한다. 배를 마련하기 위해 지체하는데 고려 왕실에서 왕릉을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는 규정을 내 세워 더 이상의 운구를 막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순왕릉이 이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경순왕의 시신이 경주까지 운구되면서 신라출신 백성들의 민심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 왕실에서 취한 인위적 조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비각과 수복방
 비각과 수복방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경순왕릉을 내려오면서 보니 조선왕릉에 보이는 정자각도 없고 그 앞으로 나 있는 신도도 없다. 그리고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구별하는 홍살문도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경순왕릉은 아주 소박한 느낌을 준다. 자연 속에 숨어있는 능의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좋다.

우리에게 경순왕릉을 안내해준 최병수 해설사는 왕릉이 초라해서 보완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현재 상태가 좋은 것 같다. 처음부터 석물과 건축물이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 다시 인공을 가미해서 더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과공은 비례고 가공은 순리가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초 연천군의 문화유산을 답사했다. 대표적인 답사지가 경순왕릉과 숭의전, 호로고루 등 고구려성, 전곡리 선사유적지이다. 이들을 보고 느낀 바를 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