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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4일, 시드니 서부에 있는 파라마타의 한 가정에서 베이징 올림픽 여자 양궁 개인전을 지켜보던 한인동포 간에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한 명은 20년 가까이 거주한 한인 동포이고, 다른 한 명은 중국 지린에서 온 조선족 동포였다.

 

그날 한국 여자 궁사들은 중국의 장쥐안쥐안과 세 번이나 맞붙었다. 그 결과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에서 모두 한국 선수를 꺾은 장쥐안쥐안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런데 조선족 동포가 8강전부터 한국이 아닌 중국을 응원했다. 더구나 장쥐안쥐안의 우승이 확정되자 "중국이 이겼다!"며 환호한 것이 그날 밤 실랑이의 불씨가 됐다. 두 사람은 주변의 만류와 권유로 즉석에서 화해했다. 조선족 동포는 "메달 순위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서주길 바랐다"면서 "나도 중국인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한국을 적극 옹호하다가 왕따가 된다"고 털어놓았다.

 

호주엔 꽤 많은 수의 조선족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가 한국-중국전에서 중국을 응원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헤이룽장 출신 작가 양안전씨(54, 호주한인문인협회 회원)를 만났다.

 

양씨는 어릴 때 먼 곳에 있던 조선 소학교에 다녔다. 아버지가 "출세를 위해서는 중국학교가 유리하겠지만 너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학교에 다녀야한다"면서 딸을 그곳에 보낸 것. 그 후 중국 중학교로 진학하고 사범학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한 양씨는 1979년 힘겹게 공산당원이 됐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솔직히 출세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공산주의 사상이 좋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의 평등사상과 인민 사랑 정신을 숭배했다. 특히 소수민족인 조선족을 차별하지 않고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데 감동받았다. 중국의 식량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도 조선족들이 유난히 이밥(쌀밥)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쌀을 추가배급하기도 했다."

 

그러난 양씨는 중국 공산당의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 공산당은 인민에게 밥을 먹여주지 못하며 차라리 호주가 사회주의의 장점을 더 잘 실천하고 있다"는 지인의 권유에 따라 호주로 이주했다.

 

조선족 동포가 한-중 양궁 대결에서 중국 응원한 까닭

 

다음은 양씨와 나눈 일문일답.

 

-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지 않았나?

"왜 아니겠는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으로, 중국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호주 시민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응원할 나라가 셋이나 돼서 흥미진진했다."

 

- 어느 국가를 응원했나?

"중국, 한국, 호주 순이었다. 북한과 중국이 맞붙으면, 북한을 응원했다. 중국은 메달을 많이 따고 북한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약자응원심리가 작용한 측면도 있지만, 북한과 중국 간에는 별다른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이 북한에 가서 설움을 당한 일도 없다."

 

- 이번 올림픽 기간에 한-중 감정 대결이 문제가 됐다. 그러한 갈등이 언제 시작됐다고 생각하나?

"여러 가지가 있지만, 2005년 강릉 단오제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하나의 단초가 됐다. 단오절의 기원은 2200여 년 전 사람인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이야기다. 굴원은 모함에 빠지자 멱라수에 투신자살했다. 그게 5월 5일이다. 단오절은 굴원의 제삿날인데, 중국 인민은 지금도 그날이 오면 밥을 나무 잎사귀에 싸서 강에 던진다.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체를 뜯어먹지 말라는 이유에서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신화 같은 역사이지만 명분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다. 그걸 한국에서 너무 안이하게 판단했다."

 

- 그러나 한국의 단오절과 중국의 단오는 기원부터 다르지 않은가?

"나도 그걸 최근에 알았다. 그렇다면 그걸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중국이 대단한 나라여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소모전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 그런 역할을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이 맡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그런데 조선족 동포들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화가 난 상태다. 많은 한국인이 '중국인은 무식하고 돼지처럼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동포들도 중국인과 똑같은 취급을 당한다. 철석같이 믿었던 한국에서 조선족을 홀대했다는 얘기를 듣고 공분을 느꼈다. 중국인한테도 당하지 않던 차별을 모국인 한국에서 당한 것이다. 한국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차별을 방치한 한국 정부의 처사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한국인은 조선족 같은 약자에게는 매몰차면서도, 강자에게는 비굴하다."

 

- 비굴하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적인 케이스 아닌가? 미국에 가서 부시 대통령에게 그렇게 저자세일 필요가 있었나? 오죽하면 호주 언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머리를 조아린(kowtowing) 것'이라고 보도했겠나. 중국인들은 '한국이 진실하게 놀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 진실하게 놀아야 한다는 건 또 무슨 얘기인가?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두고 '거짓말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고 믿는 민족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무척 속상했다. 단오, 인쇄술, 화약, 혼천의, 한의학, 침술 등의 원류논쟁에서 한국인들이 무조건 우기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일본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는 중국 문화권이다, 그걸 우리가 더 발전시켰다'라고 얘기하는데, 한국은 '이건 원래 우리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입으로만 우겨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보다 한국을 더 미워하게 된 것이다."

 

한류는 어떻게 혐한류로 바뀌었나

 

-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나 같은 사람이 대답하기엔 너무 큰 질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한국인들이 못사는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부자 앞에서는 비굴해지는 노예근성을 빨리 청산해야 한다. 중국이 그걸 잘 몰랐다가 최근에 서로 왕래가 잦아지면서 알게 됐다. 소위 혐한론이라는 것도 요즘에 퍼진 정서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한류가 대단했는데.

"그렇다. 나도 한류에 들떠서 살았다. 내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한국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배신감을 느꼈다. 특히 이 대통령이 미국에만 굽실대는 걸 보고 한국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그럼 중국에도 굽실거리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미국에도, 중국에도 굽실거릴 필요가 없다. 한국인은 위대한 민족이다. 더욱이 기질적으로 중국인들은 앞에서 굽실대는 사람을 소인배로 취급하면서 믿지 않는다."

 

-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오만을 더 비판하는데.

"한국인의 오만을 노예근성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1988년에 열렸으니, 20년이라는 세월만큼 한국이 앞서서 왔다. 한국은 그만큼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노예근성만 내보이고 있다."

 

- 한국의 일부 누리꾼은 중국의 혐한론 배후로 중국 동포들을 지목하는데.

"조선족이 양쪽 언어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지린성 쪽에 사는 조선족 중에는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다. 중국인 중에 한국말을 하고 한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으로 유학 오는 중국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 끝으로, 여자 양궁 결승에서 어느 나라를 응원했나?

"처음엔 중국을 응원했다. 중국이 금메달을 많이 따서 강성한 모습을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장쥐안쥐안을 응원하다보니, 박성현 선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차분한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 복잡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담을 수 있겠는가?"


태그:#조선족, #베이징올림픽, #한중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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