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날이 밝았다. 여행자로서 늦잠을 잘 수 있나. 그것도 첫날인데. 눈이 절로 떠졌다. 소주 2상자를 가져다 준 ‘인도 방랑기’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비싼 거 먹기엔 미안해서 볶음밥을 먹었다.  

 

그런데 소주 2상자를 가져오는 데는 애로점이 많았다. 우선 무겁다. 1상자가 40개가 들어있으니 200ml X 8 하면 8kg이고 두 상자니까 16kg이다. 그걸 공항까지 들고 가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검역이 강화되어서 액체류는 갖고 비행기를 탈 수 없다. 짐을 부쳐야 하는데 그냥 물건도 아니고 주류이기에 걸릴 경우 뺏겨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델리공항에서 짐을 찾을 때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인도인 두 분이 사진을 찍어 달란다. 찍고 난 뒤 친구(이하 장)와 다투게 되었다. 여행 가면 꼭 싸운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통과의례처럼 다퉜다. 평소에 말다툼을 한 적이 없던 터라 의외인 상황이었다. 나는 ‘무계획이 계획’ 이란 정신으로 아무 준비 없이 갔으면서 상의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성에 안 찼고 장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무런 생각이 없는 내가 못 마땅하였던 것이다. 다정한 인도 두 분과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내 의견을 얘기한다고 하는 게 가시가 돋아있었나 보다. 무척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아, 내가 많이 화가 나있구나.’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화는 인도 가면서 생긴 게 아니라 오랜 시간 쌓아온 것이었고 억눌렀던 걸 깨달았다. 서로 어색한 사과를 하고 빠하르 간지를 누비고 다녔다. 인도에서 라시를 빼 먹을 수 있나.   

바나나 라시는 15루피였는데 워낙 맛있어서 하루에 3-4번씩 먹고 한국 돌아가기 전까지 여남은 번 이 친구 집에 와서 계속 먹었다. 그러자 우리를 멀리서 볼 때마다 번쩍 손을 드는 이 친구는 환한 웃음으로 바나나 라시를 만들어주었다.

 

이 친구는 장사가 잘 되어서 돈을 벌었을 거 같은데 늘 똑같은 옷을 입고 있고 밤에 찾아가보니 가게 앞에 리어카에서 자고 있었다. 장은 집에 가기 전 날 가져왔던 ‘나이키 티’를 선물로 주었다. 가게에 피어오르는 향은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고 벌레를 쫓고 사람 면역성에도 좋다고 한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안 하는 거 같아서 말은 안 했지만 인도 100배 즐기기 책을(장이 샀다)내가 보면서 계획을 세웠다. 동선을 생각하고 시간을 고려해서 나를 따르라, 아, 여긴 군대가 아니지. 우선 뉴델리 역에 가서 아그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information에 앉아있는 불친절한 인도 여성분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 뭐 좀 물어보니 옆에 있는 기차시간표만 가리켰다. 뉴델리역에는 수많은 인도분들이 여전히 자고 있었다. 어디든 주무시는 인도분들이 있다.

 

그리고 ‘인도방랑기’ 사장을 만나 돈을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난 동네 할인매장에서 하나에 700원에 구입을 했는데 그 친구는 560원에 산 이마트 영수증을 보여주면서 자신도 남지 않는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돈 받기 전에 미리 예약한 여성 손님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모습을 본 터라 140원 손해 보고 560원으로 계산해서 루피로 돈을 받았다.

 

방값이랑 아침 값, 택시 값이라고 생각했다. 멀리 인도 와서 고생하는 사장이 반가운지 장은 나중에 맥주나 하자면서 연락처를 받았다. 난 인도 와서 한국 사람을 만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인도사람을 만나야지라는 생각을 가졌으나 뭐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그 뜨거운 날씨가 좋았다.

 

붉은 성(red fort)으로 발길을 돌렸다. 흥정을 하고 오토릭샤를 탔다. 무굴 황제이자 건축광이었던 샤 자한이 1639~1648년에 걸쳐 지은 성이란다. 100루피라고 안내책자에 되어있으나 실제는 375루피였다. 표를 사서 들어가는데 군인들이 검색을 한다. 한국 군인들은 전방에서 초소를 지키는데 인도 군인들은 유적지에서 유적을 지킨다. 어설프게 소지품 검사는 꼭 하려고 한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먼저 지퍼를 여는 척 하고 환하게 웃으면 통과다.

 

무척 더웠다. 아무 물이나 먹을 수 없기에 꼭 사서 먹어야 한다. 물은 보통 10~15루피다. 마개가 잘 잠겨있는지 확인하라는 데 다 잘 잠긴 새것이었다. 간혹 버린 물병을 주워서 수돗물을 붓고 파는 곳이 있다고 한다. 물을 마시며 돌아다니는데 장과 나는 비슷한 게 웅장한 건물을 보면 ‘크구나, 잘 지었네.’ 이 정도 느낌이지 별 대단한 감흥을 못 느낀다. 불가사의라고 불리는 타지마할에서도 그랬으니, 말 다했다.

 

휙 둘러보고 나와서 간 곳은 자마 마스지드, 인도에 있는 이슬람 사원 가운데 제일 크단다. 대충 위치 파악이 끝났기에 걸어서 갔다. 15분 시장가를 지나 걸어가니 등장한 자마 마스지드는 무료입장이다. 하지만 출입구에서 카메라와 비디오 촬영권인 150루피를 달라고 한다. 우리는 없다고 물품 검색을 엉성하게 한 끝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장은 무료입장인 걸 몰랐고 반바지여서 이상한 보자기로 다리를 감싸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슬람 사원은 신발을 벗어야 들어갈 수 있고 반바지나 노출이 심한 옷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나시티를 입었기에 나는 어깨에 보자기를 둘렀다. 면감도 까칠한 보자기를 걸친 우리는 걸인 같았다. 통과하고 나서 장은 40루피를 달라고 해서 줬단다. 그러면서 속았다고 살짝 원통해 한다. 보자기 값이라고 여겼다.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두 개의 뾰족탑이 있다. 높은 건물이 없는 델리이기에 미나레트는 델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안내 책에는 20루피라고 적혔으나 실제로는 50루피를 내고 올라갔다.

 

높이가 무려 40m인 돌로 만들어진 뾰족탑을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거 같았다. 어둡고 좁은 장소에 계속 이어지다 드디어 꼭대기에 올라섰다. 뿌연 하늘에 펼쳐진 델리는 작디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1000만이 넘는 사람이 사는 델리에 저렇게 작은 집들 밖에 없으니 잘 곳이 없는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기는 너무 흐렸는데 델리 시내의 대기 오염은 숨만 쉬어도 담배 2갑을 연달아 피는 충격을 폐에 준다고 한다. 깨끗한 공기가 잠깐 그리웠다.

 

미나레트에서 내려와 찬드니 촉을 휘젓고 다녔다. 복잡하고 미로 같은 시장인 그 곳은 떠들썩하고 사람이 많았다. 장을 보니 별로 찬드니 촉을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여기서 몇 시간 구경할 예정이었으나 바꿔서 델리 대학으로 갔다.

 

대학 평가 세계 8위라는 델리 대학은 13억 인도인 가운데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을 뽑는다고 한다. 델리 대학을 돌아다니다가 만난 위렌드라는 델리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이었다. 위렌드라는 자신이 공부하는 학과 건물을 보여주면서 한국말을 하려고 애를 썼다.

 

장은 간디자서전을 찾고 있어서 위렌드라가 데리고 간 책방에서 자서전을 샀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사무사(인도식 튀김, 보통 세모꼴이고 그 안에 으깬 감자가 들어가 있다)를 사주어서 먹고 장은 음료수를 사주었다. 그리고 델리 대학건물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소개시켜주고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83년에 태어난 그는 자식과 아내가 고향인 카주라호에 있고 자기만 델리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결혼을 안 한 우리를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대학원 졸업 후 삼성 같은 한국 기업에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어설픈 한국말이라도 무척 반가웠다. 순수한 위렌드라가 장은 무척 마음에 들은 눈치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다음에 우리가 다시 델리에 돌아오면 같이 저녁을 먹자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티베탄 꼴로니를 갔다. 안내책자에도 그렇듯 티베탄 꼴로니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다행히 운전기사가 알고 있었다. 중국 침략으로 달라이 라마는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운 탓에 인도로 많은 티베트인들이 넘어왔고 이렇게 델리에도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여기 말고도 티베탄 꼴로니는 더 있다고 한다. 골목을 돌아다니는데 인도랑은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고 사람들 표정도 달랐다. 물어봤더니 여기는 티베트인 뿐 아니라 네팔인도 많이 산다고 한다. 가격도 싼 게스트 하우스도 많아 일본,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도 많이 머문다고 한다. 다만 델리 중심부와 떨어져있는 단점이 있다.

 

 티베탄 꼴로니 중심처럼 보이는 곳에 사원이 있었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 마을 사람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저렇게 이웃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웃들과 다 어울려 지냈는데 어느새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실정이다. 아파트는 묘하게 다닥다닥 가정들이 붙어 있지만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거리는 무척 멀다. 그래서 아파트는 외로운 주거형태다. 

  

티베탄 꼴로니에서 티베트식 국수를 맛있게 먹고 붉은 성으로 가려고 했다. 붉은 성에서 밤 9시에 ‘빛과 소리의 향연’ 하는 걸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인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토릭샤가 아닌 릭샤를 탔다. 아주 괴로운 시간이었다. 릭샤는 손님을 뒤에 태우고 사람의 힘으로 끄는 자전거인데 오토릭샤보다 느린 건 말할 것도 없고 뒤에서 끙끙대며 가는 릭샤운전수를 보는 건 힘겨웠다.

 

마침 탄 릭샤 운전수는 너무 말랐다! 물론 인도 사람가운데 통통한 사람 보는 게 어렵긴 하지만. 게다가 길은 무척 멀었고 오르막길이었다. 절로 탄식이 나왔다. 오르막길에서는 내려서 밀어줬다. 운전수 눈이 반짝 빛나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얼굴에 행복이 번져갔다. 간신히 도착해서 원래 치르기로 한 돈보다 4배인 100루피를 줬다. 그리고 다시는 릭샤를 타지 않았다.

 
역으로 릭샤 운전수가 오토릭샤 운전수보다 가난하기에 더 릭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몸무게가 남성보다 덜 나가는 여성이라면 릭샤를 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지만 몸집이 있는 남성분이라면,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둘 이상이라면 릭샤를 타지 않기를. 바삐 돌아다닌 델리에서 릭샤에 올라탄 40분이 가장 인상 깊고 생각할 거리를 준 순간이었다.

 

 이미 빛과 소리의 향연은 끝났는지 어둡기만 했다. 근처 찬드니 촉을 돌아다니다가 무슨 밥을 끓인 걸 사람들이 많이 먹어서 먹자고 했다. 장은 되었다고 해서 혼자 먹는데 그냥 주는 거다. 죽에 조금 설탕을 넣은 맛이었다.

 

알고 보니 시장바닥에서 식사 못하고 그냥 주무시는 분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거였다. 그걸 얻어먹은 건데 다 먹은 내게 장이 와서 하는 말 “얼마야?”라고 물은 뒤 공짜라는 말에 아쉬워했다. 먹고 싶었는데 돈을 아끼려고 했단다. 내일 아그라 출발을 위해 다시 오토릭샤를 타고 빠하르간지로 갔다.


태그:#델리, #인도여행, #델리대학, #라시, #릭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