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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간격으로 장수와 무주를 두 번 다녀온 사연

 

연초에 이번 여름 답사는 전북 장수와 무주로 가자는 논의가 있었다. 한 여름에 더운 곳에 가면 사람들이 걷기를 싫어하고 짜증을 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름에 산악지방에 가면 기온이 평지보다 낮을 뿐만 아니라 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때문에 상쾌하고 기분이 좋은 편이다. 장수는 해발이 300m가 넘어 평지보다 2℃ 정도 기온이 낮고, 무주의 적상산은 해발이 1034m나 되어 6℃나 낮으니 여름 답사지로는 최적이다. 그렇게 해서 장수의 문화유적과 적상산의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내가 이번 8월 답사의 준비조이다. 답사 준비조는 사전에 일정을 짜고 그 일정의 타당성을 검토하며 답사 자료를 준비하는 일을 맡는다. 답사가 3주나 남아있던 7월 중순쯤 노영웅 선생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사전 답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여러 가지 밀린 일들이 많아 시간을 내기 쉽지는 않았지만 회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흔쾌히 약속을 한다.

 

7월 21일 노 선생님, 김인동 회장님 그리고 나 셋이서 아침 8시 지프차로 장수를 향해 출발한다. 이날은 또 내가 저녁에 약속이 있어 오후 7시까지는 돌아와야 하게 생겼다. 바삐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차는 중부고속도로 대전-통영 구간을 달리다 장수 분기점으로 빠져나간다. 우리는 이곳에서 장계로 가 논개 생가지를 먼저 살펴본다. 그리고는 장수읍에 있는 논개 사당, 장수향교, 의암송을 답사한다. 사실 논개 사당, 장수향교, 의암송이 장수 답사의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천천면에 있는 타루비를 보고 다시 장수분기점으로 돌아와 무주 적상산으로 향한다. 무주 적상산은 무주 분기점에서 나와 무주읍을 우회한 다음 727번 지방도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727번 도로를 잠깐 탄 다음 내창에서 바로 우회전해 구절양장 적상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이 길은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안국사까지 이어진다. 안국사는 해발 960m에 위치한 호국사찰이다. 이때 호국이란 적상산 사고를 지킨다는 뜻이 강하다.

 

이곳에서 우리는 안국사, 적상산성 호국비, 적상산성, 적상산 사고를 보고 다시 내려온다. 원래 계획은 적상산 전망대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시간이 없어 생략한다. 저녁 7시 약속 시간 때문이다. 이렇게 사전 답사를 한 덕분에 8월 초 답사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었고, 답사 일정과 시간을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전 준비가 시행착오를 줄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8월 5일 우리 회원들과 또 한 번 장수와 무주를 답사했으니 보름 간격으로 장수와 무주를 두 번 다녀온 셈이 되었다. 이제는 장수와 무주에 대한 지식이 늘어 답사 안내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장수는 논개의 고향이고, 금강의 발원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산으로는 서봉이라고 불리는 장수덕유산과 남덕유산(1507.4m)이 유명하다. 이에 비해 무주는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1610.6m)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적상산은 백두대간 덕유산 줄기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타루비는 장수에만 있는 게 아니다

 

8월 5일에도 아침 8시 답사를 떠났다. 이번에는 회원 43명을 실은 관광버스를 타고. 코스는 지난 번 사전답사 때와 같다. 다만 점심식사 때문에 장수에서의 답사 코스를 사전답사와 반대 방향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타루비를 먼저 보고 논개 생가지를 마지막에 보는 순서로 답사가 진행된다. 차는 중간에 금산에 있는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한 번 쉰다. 이곳에 내려 남쪽으로 산세를 보니 고도가 점점 높아짐을 알 수 있겠다.

 

이곳 금산에서부터 무주와 장수까지는 꾸준히 고도가 올라간다. 차는 금강을 건너고 무주 분기점을 지난다. 무주 분기점을 지나자 왼쪽으로 바위들이 깍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그 위로 나무들이 울창한 적상산이 나온다. 적상산(赤裳山), 가을에 빨갛게 단풍이 들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렇다면 지금 적상산은 녹상산(綠裳山)인 셈이다. 그러나 녹의홍상(綠衣紅裳)이란 말은 자주 사용해도 녹상(綠裳)이란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차는 잠시 후 덕유산 분기점을 지나 장수 분기점으로 빠져나온다. 사실 장수 분기점은 장계면에 있다. 장계면은 장수에서 가장 넓은 들이 있는 곳으로 장계리 동동 마을의 전라 좌도풍물이 유명하다. 우리는 전라북도 문화해설사인 김기곤 선생을 만나기 위해 장계면 버스터미널로 간다. 김 선생께서 우리에게 장수 답사를 안내해 주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버스터미널에서 도착해 김기곤 선생을 태운 우리 차는 바로 천천면 장판리에 있는 타루공원으로 향한다. 타루공원은 그곳에 타루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타루비(墮淚碑)란 추사타루비(追思墮淚碑)의 준말로 일종의 불망비(不忘碑)이다. 추사타루란 비석의 당사자를 돌이켜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는 뜻이다. 이곳 장수의 타루비(지방기념물 제83호)도 역시 장수현감에게 충성을 바친 아전 백씨를 기리는 비이다. 타루비가 세워지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조선 숙종 4년(1678) 당시 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감영에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천천면 장척마을 앞 바위 비탈을 지나고 있었다. 길가 숲 속에 있던 꿩이 말발굽 소리에 놀라 날아오르는 바람에 조 현감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 절벽 아래 배리소에 빠지고 말았다. 말에 타고 있던 조 현감도 물에 빠져 말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현감을 모시고 가던 아전 백씨는 자기가 잘못하여 현감이 죽었다고 통곡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었다. 그리고는 피로 꿩과 말을 그리고 타루(墮淚) 두 자를 바위벽에 썼다고 한다. 그리고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신도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 후 1802년 장수현감 최수형이 아전의 주인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현지에 타루비를 세웠다. 타루비를 세운 지 80년이 지난 1881년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장수리순의비(長水吏殉義碑)를 타루비와 나란히 세웠다. 현장에는 최근에 중수한 타루각이 있다. 그 비각 안 좌측에는 장수리순의비가 있고 우측에는 타루비가 있다.

 

장수 타루비 조각에서 느끼는 감회

 

타루비와 장수리순의비를 보고 우리는 절벽에 만들어진 조각을 보러 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도 혈서로 그린 검붉은 말과 꿩의 형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벽에 조각된 말과 꿩 조각은 만들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 동물 조각의 재질이 절벽의 재질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조각에 대해 김기곤 선생도 시원하게 말을 해 주지 않는다.

 

절벽 왼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타루애(墮淚崖)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놀라서 떨어지는 말이 조각되어 있다. 말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어 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떨어지는 말의 오른쪽 위로는 꿩이 세 마리 날아간다. 이 절벽 밑으로는 현재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옛날에는 앞의 시내가 바로 이 절벽 밑으로 흘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말을 타고 가던 현감이 절벽 위로 난 길에서 떨어져 죽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더욱이 상관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자책감에 함께 죽은 아전의 충성심을 기리는 것은 후세 사람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아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백씨 정도로만 기록한 것이 유감이다. 김기곤 선생의 발로는 백씨라는 설도 있고 박씨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더 문제 아닌가. 아전의 이름 정도는 분명히 기록해야 하는 건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타루비를 보고 나오다 보니 공원 마당에서 이곳 마을 사람들이 농산물을 출하하고 있다. 큰 물류차에 실린 박스들을 보니 가지, 오이, 고추와 같은 채소이다. 요즘 농촌에서 출하할 수 있는 것이 과일과 채소뿐인데 그 중 채소를 내는 것 같았다. 이곳 장수는 해발이 높은 편이어서 사과와 고랭지 채소가 많이 재배된다고 한다. 사과와 가을배추는 아직 나올 때가 되지 않았으니 가지와 오이 그리고 가지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소나무까지 논개와 관련이 있네

 

타루비를 보고 우리는 장수읍에 있는 의암송(義巖松: 천연기념물 제397호)을 찾아간다. 의암이란 의로운 바위로 진주 남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의암이라는 명칭은 논개가 왜장을 안고 죽은 곳에 있는 바위에 붙여졌으며, 그 의암이 이제는 논개의 별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소나무가 논개에 의해 심어졌고 논개의 별호인 의암을 따서 의암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나무는 1500년대 후반 당시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가 의암 논개와 함께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수령이 약 400년이 넘었으며 그 모습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소나무로는 보기 드물게 원줄기가 왼쪽으로 꼬여 수평을 이루고 있는 희귀목이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의암송이라는 역사적인 이름도 갖게 되었다. 의암송은 수고가 8m, 흉고 직경이 3.2m이다.

 

그런데 의암송 바로 뒤에 장수군청 건물이 있어 소나무의 멋이 반감되어 아쉽다. 소나무는 원래 홀로 있어야 고고한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인데 아쉽기 짝이 없다. 소나무를 본 모든 사람들이 군청을 지은 사람의 근시안을 탓한다. 언젠가는 군청이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갈 테고 그때나 되어야 제대로 된 의암송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의암송, 소나무 자체만 놓고 본다면 보고 또 보아도 멋진 소나무다. 

덧붙이는 글 | 7월 21일과 8월5일 두번에 걸쳐 장수와 무주의 문화유산을 답사했다. 한 번은 사전 답사였고, 또 한 번은 실제 답사였다. 이때 보고 느낀 이야기를 네 번에 걸쳐 연재한다. 장수와 무주는 해발이 높아 여름 답사지로는 최적이다.  


태그:#장수, #장계, #타루비, #의암송, #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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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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