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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아내와 나의 이름이 박힌 책이 퀵서비스로 집까지 배달되어 온 날, 난 책을 두고도 '따끈따끈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얼마나 맞춤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예쁘고 대견하여 손으로 쓰다듬고 안아보고 향내까지 맡아보며 감격스러워 했던 것이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래, 열 달도 아니고 장장 2년을 가슴속에 넣어 키웠으니 자식을 낳은 기쁨이라고 좀 우겨도 되지 않을까.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내는 일, 그만큼 매력적인 일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간계약을 코 앞에 두고 깨지기도 했고, 출간을 하기로 하고 두 달여 동안 편집회의를 함께 진행하고서도 그만 엎어진 적도 있었다. 출판계에서 오랫동안 일한 적이 있는 한 선배 말에 따르자면 '그 세계'에선 흔한 일이라지만 우리로선 그 때의 좌절이 크고도 깊었다. 

따지고 보면 글쓰기라곤 회의 자료나 소위 '문건'이라 불렸던 딱딱한 문체의 자료들이 전부였던 내가 여행에세이, 그것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감성적인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겠다고 덤빈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도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퀵서비스로 배달된 '따끈따끈' 한 책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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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내 안에 있는 어린 시절의 수줍은 소년을 다시 만난 것도, 한 주에 한 권의 시집을 사곤 했던 풋풋한 대학 초년생을 기억해낸 것도 다 여행이 준 마법 같은 선물이었다. 길은 자기가 쌓아온 성(城)을 허물게도 하고, 새로운 성을 쌓게도 했으며, 본디 태어난 성을 기억하게도 했다. 

처음 100쪽 분량의 일부 원고를 서너 군데의 출판사에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한 달 동안 숱한 밤을 지세며 쓴, 나름 꽤 낭만적이고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자평한 원고였다.

놀랍게도 세 군데에서 답변이 바로 왔다. 대개 '인상적인 원고와 느낌이 좋은 사진'이라는 평과 함께 곧 검토해서 출간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1주일 지났다. 그런데 연락이 없었다. 또 1주일이 지나갔다. 내 메일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1주일이 더 흘렀다. 그 쪽에서 검토한 연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네? 아…, 그 원고요? 글쎄 이번에는 좀…"

하하 이런, 바보. 나중에야 알았지만 보통 '출간 거절'일 경우에 출판사 쪽에서 연락해주는 경우는 드물단다. 첫 번째 좌절. 아, 무엇이 문제였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출판사에 출간을 할 수 없는 이유라도 들어보기로 했다.

글쓰기가 서툰 자로서 한 수 배우고 싶다는 뜻을 담아 정중한 메일을 보냈다. 곧바로 장문의 답변이 왔다. 요지는 '당신에겐 모두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이겠지만, 독자들이 그 모든 이야기를 다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내가 책을 내고 싶었던 건 '소통' 때문이었다. 벗들과 독자들에게 우리가 길 위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또한 우리에겐 빠져있는 한국 땅에서의 3년이란 시간을 조금이라도 메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출판사들이 지나치게 상업적이어서 자극적인 이야기만을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건 오만이었다. 오히려 소통을 거부한 건 나였다. 내 감정에 취해 시시콜콜 "우리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감동적이었는지, 아름다웠는지 아느냐"며 선거철 유세차량처럼 왕왕거리며 일방적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편집자 구조조정으로 날아가 버린 출간 계획

(터키 이스탄불의 갈라타 다리에서)
▲ 세 번째 여행. 돌아와 배낭 속에 든 추억을 정리하기. (터키 이스탄불의 갈라타 다리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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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원고를 썼고 세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처음 세 권 분량을 계획했던 원고는 두 권이 되었다가 결국 한 권으로 줄어들었다. 내 안의 욕심을 포기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다시 원고를 응모했고, 한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아직 운명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두 달이 넘게 원고 수정작업을 하던 중, 출판사 내의 구조조정이 있었고 담당 편집자는 어느 잡지의 편집장으로 날아가 버렸다.

또 다시 좌절. 아, 어떡할 것인가. 두 달 전에는 관심을 보였던 출판사들도 여름시장 시기를 놓쳤다고 선뜻 나서주지 않았다. 다시 원점. 이제 여행서로의 '시기성'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여행경로와 일정에 따른 글쓰기에서 철저히 '만남과 에피소드'에 집중해서 기획 자체를 바꾸어 '세 번째'로 처음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1년이 더 지나서 <오마이뉴스>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첫 기사의 반응은 놀라웠다. 8000회가 넘는 조회수와 13개의 댓글, 그 정도로도 아내와 내겐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손 안에서만 맴돌았던 '이야기와 사진들'이 드디어 길을 나서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즉각 올라오는 독자의 반응이 신기하기만 했고, 한 꼭지 한 꼭지 글을 써나가는 힘이 되었다.

물론 댓글이 힘이 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프게도 했다. 이집트 삐끼에 대한 이야기가 그랬다. 아내와 나에게는 이집트와 인도가 둘 다 지저분하고 혼돈스러우면서도 문명의 역사가 깊은 곳이지만, 그럼에도 인도가 신비로운 매력을 가진 반면 이집트는 여행자를 성가시게 하는 나라였다. 나는 이집트의 그 부족한 '2%'를 틀어서 말하고 싶었다.

그 때 날카로운 댓글이 붙었다. 잠시 잠깐 여행하고서 마치 그 나라에 대해 다 아는 양 썼다는 일침을 놓았다. 그리고 그는 이런 부류의 인간과 한 나라에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까지하며 마음껏 비아냥거렸다. 모든 걸 다 알아야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이 권위주의적 발상이라는 반론이 이어졌지만, 난 그 날 밤 잠을 설쳐야 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댓글 하나가 참 고맙다. 이후 기사를 쓸 때마다 늘 균형추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기사를 올렸을 때 출판사가 나타났으며 그 후 한 달이 못 되어 출간계약을 했다. 거의 1년 만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1년이 지나서, 그러니까 3주 전에 아내와 나의 책은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느새 2쇄를 준비 중이다.

힘이 돼 준 댓글... 그러나 그날 밤잠을 설쳤다

사진은 아르헨티나 피츠로이 트래킹에서 아내와 찍은 사진.
▲ 책은 여행이 준 마법 같은 선물이다. 사진은 아르헨티나 피츠로이 트래킹에서 아내와 찍은 사진.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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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기까지 참 길고도 힘들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나간 일들을 글로 옮기기 위해서는 명상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3년의 여행을 다시 하고, 3년보다 더 거슬러 올라 어린 시절 내 과거의 시간까지 여행한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리고 내 안에 웅크려 지냈던 감성의 단어들을 찾아내 해후하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이른바 초보저자의 '출간 후기'를 끝내야겠다. 독자들이 '아, 책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구나,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도록 글을 쓰려고 했는데, 꽤 지난한 과정만을 얘기한 것도 같다. 허나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런 것을. 하지만 분명한 건 자기 자리를 떠나 길을 나서고 사람을 만나 웃을 수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여행에세이 하나 책으로 묶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양학용 & 김향미 부부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으며,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연재한 후, 여행에세이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를 출간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세계일주, #배낭여행, #세계여행,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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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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