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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함남공천사건'에 연루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었을 때 김조이의 모습.
 1934년 '함남공천사건'에 연루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었을 때 김조이의 모습.
ⓒ 죽산 조봉암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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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조임정씨는 독립운동가 모친과 관련된 통보를 받았다. 국가보훈처가 보낸 '2008년도 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 안내문'이었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김조이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건국포장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대한민국 건국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과 위훈은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조씨의 모친인 김조이는 진보당을 창당했던 죽산 조봉암의 부인이자 동지였다. 애초 '죽산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 범국민추진위'(공동대표 서영훈 이수성 조수종)는 '독립유공자포상'을 신청하면서 '건국훈장'을 기대했지만 이보다 훈격(勳格)이 낮은 '건국포장'으로 결정됐다. 

이에 명예회복 추진위측은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인환 운영위원장은 14일 기자와 만나 "김조이 여사는 여성으로서 3년이라는 긴 시간 혹독한 형을 살고 나왔다"며 "그런 공적에 비해 훈장의 품격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죽산의 포상이 '보류 판정'을 받은 상태에서 공산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김조이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한 것은 그 의미가 작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죽산에 가려 있었던 '여성 코뮤니스트(communist)' 김조이가 재조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포상은 각별해 보인다.

 1947년 인천에서 열린 김조이의 막내동생 결혼식. 붉은 원 안이 각각 죽산 조봉암(왼쪽)과 김조이.
 1947년 인천에서 열린 김조이의 막내동생 결혼식. 붉은 원 안이 각각 죽산 조봉암(왼쪽)과 김조이.
ⓒ 죽산 조봉암선생 명예회복 범국민추진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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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운동' 지향한 경성녀자청년동맹 창립

죽산 조봉암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자 '동지'가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은 고향이 같았던 김금옥으로 강화 부농의 딸이었다고 한다. 죽산은 1925년 4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창립한 뒤 상해·만주 등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김금옥이 상해로 건너와 죽산과 재회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조호정씨가 태어났다.

그런데 죽산은 1932년 9월 상해에서 체포돼 신의주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다 1938년 출소했다. 죽산이 수형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상해에 있던 김금옥과 딸 호정씨는 강화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김금옥은 죽산의 출소를 보지 못하고 1934년 눈을 감았다. 

죽산은 김금옥과의 사이에서 딸까지 낳았지만, 혼인 신고는 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고, 6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죽산과 법적으로 혼인한 이는 김조이였다. 제적등본 등 관련자료에 따르면, 죽산과 김조이는 1944년 혼인신고를 마쳤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규호씨와 임정·의정씨가 태어났다.  

김조이는 1904년 경남 창원군 웅천면 성내리에서 부친 김종태와 모친 배기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김조이는 경남 창원군 웅천면 마천리에 위치한 사립학교 '계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조부가 '300석지기' 정도로 부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3·1운동은 김조이를 '항일운동'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운명의 남자 죽산을 만나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여성 코뮤니스트'로 변신한 것이다.

조인환 명예회복 추진위 운영위원장은 "서울에 유학온 김조이 여사는 3·1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빼앗긴 국권을 되찾을 길은 오직 항일투쟁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죽산 조봉암 선생을 만나 조선공산당의 열렬한 운동원이자 죽산의 동반자가 되었다"고 전했다.  

이후 김조이는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서 2년간 유학한 뒤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1925년 1월 정봉(鄭烽), 배혁수(裵赫手) 등 8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성녀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상무간사'(상근간사)는 김강과 조효원이 맡았다.

16∼26세의 여성들로 구성된 경성녀자청년동맹은 '여성해방운동'을 지향했던 독립운동단체였다. 창립 당시 회원수는 82명으로 18∼20세의 여성이 다수를 차지했다. 직업별로는 학생이 56명으로 가장 많았고, 교사(9명)와 무직(8명), 간호사(6명), 기자(1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종로구 낙원동에 사무실을 연 경성녀자청년동맹은 ▲ 여성해방 서적 연구·토론 ▲ 여성노동자 위안 음악회 개최 등의 사업을 펼쳤고, ▲ 무산아동학원 설립 ▲ 여성을 위한 문고 설치 ▲ 학술강좌 개최 등을 계획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조이는 박헌영의 부인인 주세죽과 함께 경성 여성운동을 이끈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일제에 '함남공청사건' 수령급으로 지목돼 3년간 옥살이

김조이는 1925년 4월 '적기시위사건'에 연루돼 잠시 검거되기도 했다. '적기시위사건'이란 '4·21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경찰의 불허로 무산되자 300여 명의 조선인 대표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을 말한다.

이어 같은 해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 터졌다. 죽산과 김조이 등을 비롯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연해주 등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32년 김조이는 국제공산당에 의해 '조선공산당청년지도자(조선공청)'로 뽑혀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 출신 인사 5명과 함께 함경도에 들어왔다.

김조이는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재결성'을 주도하다가 1934년 8월 일명 '제2태평양 노사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돼 검거됐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함남공청사건'이라고 불렀다. 김조이는 이 사건으로 2년간 구금됐다가 기소되어 1934년 12월 함흥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소화 7년 5월경에 함흥서에 검거된 공산청년회 사건관계자 30명은 그동안 만 2년간이 넘도록 경찰에 유치한 대로 취조를 거듭하고 있던 중 그 중에 수령급인 김복만과 김조이만은 분리하여 지난 16일 오후 1시 반에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겼다고 한다. 김복만은 만주공산당의 선전부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국제노동조합 태평양 노조의 최고 지도자로 조선에 잠입하였다가 검거되었으며 김조이는 1차공산당 수령급으로 다년 해외로 피신하여 활동을 계속하는 조봉암의 처로 이 역시 만주방면에서 활동하다가 국제공산당의 수령으로 조선공청 지도자로 뽑혀 조선으로 잠입하였든 중 경찰에 검거를 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함남공청사건'으로 기소된 인사는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 출신 6명을 포함, 총 39명에 이른다. 김조이는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뒤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고, 1937년 9월 20일 출소했다.

 일명 '함남공천사건' 재판소식을 알린 <조선일보> 기사.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함경남도에 잠입해 활동하던 김조이는 이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일명 '함남공천사건' 재판소식을 알린 <조선일보> 기사.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함경남도에 잠입해 활동하던 김조이는 이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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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남동생과 함께 납북... "비운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죽산은 김조이보다 1년여 늦은 1938년 12월 6일 출소했다. 이후 죽산은 인천에 정착했고, '동지'였던 김조이와 다시 만나 가정을 꾸렸다. 죽산은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민의원, 제2대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조인환 운영위원장은 "조봉암 선생은 인천에서 친구들과 왕겨매매사업을 했다"며 "김조이 여사는 이후 해방이 되고 건국에 참여한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은 두 사람을 비극적으로 갈라 놓았다. 김조이는 7월 중순께 서울에서 강제 납북됐다. 비슷한 시기 김조이의 첫째 남동생인 김송학도 납북을 당했다.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죽산은 국회 기밀서류만 챙겨서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두 사람의 생사 여부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56년 7월 발행된 <주간희망>에 실린 '납치인사 명단'에도 김조이·김학송이 들어 있다. 이 명단은 '대한적십자사'가 작성한 것인데,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납치인사'를 '실향사민(失鄕私民)'으로 표기한 점이 흥미롭다.

죽산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대통령 후보에 출마해 낙선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다가 '간첩'으로 몰려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승만 정권이 치욕적인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조인환 운영위원장은 "6·25 사변으로 생이별한 김조이 부부는 19년이란 긴 세월 오직 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으로 혹독한 형벌을 감수했다"며 "하지만 불과 11년여의 부부애는 (6·25 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두 사람은 각각) 비운으로 사라진 정치가요 독립운동가로 현대사에 자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제가 작성한 김조이의 수형카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이 선명하다.
 일제가 작성한 김조이의 수형카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이 선명하다.
ⓒ 죽산 조봉암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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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