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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투사'는 이제 그만 쉬고 싶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던 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벌써 33년째다.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시작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언론개혁시민연대 등에서 많이도 활동했다.

 

이제는 해외 연구자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배우러 온다. 그럼 됐다 싶었다. 2003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을 끝으로 조용히 살려 했다. 그의 나이 예순다섯이다. 쉴 나이도 됐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끝내 거리로 끌어냈다.

 

지난 7월24일 그는 서울 여의도 KBS 본사 앞에서 출범한 '방송장악·네티즌 탄압 저지 범국민행동(이하 범국민행동)' 상임운영위원장을 맡았다. 한국 민주주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정권 앞에서 나이를 이유로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성유보, 그는 다시 주먹을 불끈 쥐고 피켓을 들었다. 

 

말복을 하루 앞두고 폭염이 아스팔트를 녹이던 7일 오전,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성 위원장을 만났다.

 

"87년 이후 20년 쌓은 민주주의, 고작 5개월 만에 허물어지나"

 

"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벌써 20년이 흘렀어요. 그간 정권교체도 별 문제없이 진행됐고. 뭐, 정치적 경쟁은 있을지 몰라도 한국에서 민주주의나 언론자유를 걱정할 리 있겠나 했죠. 이제 5개월 지났는데 그간 쌓아온 민주주의 시스템이 의외로 쉽게 허물어지려는 게 아닌가 싶어 참 안타까워요. 지난 20년간 우리가 뭘 했나, 상당한 회의가 일어납니다."

 

그는 씁쓸해했다. 강산이 세번 바뀌도록 민주화에 투신했는데 고작 5개월 만에 모든 게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듯했다. 전선에서 민주주의를 지켰던 그가 이토록 다리에 힘이 풀리는 이유는 뭘까.

 

"87년의 성과에 너무 안주했던 것 같아요. 한국사회에서 보수는 보수가 아니에요.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존재했다고. 그걸 우리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 아닌가. 너무 무관심했던 것 아닌가. 극우의 목소리를 보수로 착각했던 것 아닌가. 한 사회에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건데, 진보를 빨갱이로 모는 극우파에 대해 너무 관대하게 대처한 것 아닌가.

 

극우파가 성하면 파시즘으로 갑니다. 파시즘독재로의 초대랄까. 그 직전에 와있다고, 우리가. 그런데 정말 한 목소리가 한 사회를 쥐고 흔드는 정도까지야 가겠냐, 거기까지 생각 못했거든. 그게 가장 큰 패착이었던 것 같아요."

 

늙은 투사는 고뇌하고 있었다. 젊은 세대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날밤을 세우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을 법하다. 결국 그 대열에 뛰어들어 동참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민주주의 정치철학과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리가 지금까지 정확히 정리하고 분명하게 대응하지 못한 후과를 또 치르는 거예요. 193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등장할 때 우리와 똑같았어요. 어떤 한 목소리가 선동하면서 반대 목소리를 짓밟고, 그걸 국민이 수용하면 파시즘세력이 등장해요. 결국 세계전쟁까지 갔잖아요.

 

그래서, 나는 진정한 보수라면 '보수와 진보'의 공존을 위해 지금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존을 위해 같이 싸워주는 게 민주주의라고. '내 목소리만 옳다' 이건 독재의 초대장이에요. 이건 같이 배척해야 옳다고 봅니다."

 

 

"21세기판 신종 인간사냥 시작...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김대중 정부 5년, 노무현 정부 5년, 도합 10년의 성과는 무엇인가. 여러 정치학자들은 절차적·제도적 민주주의를 성과로 꼽지만, 정부여당은 '잃어버린 10년' 라고 말하고 있다. 

 

"'정권과 일부 반대파 싸움이겠지'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가랑비에 속옷 젖듯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민주주의 세력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리얼상황'인 거죠. 87년과 같은 광장민주주의가 다시 서랍 속에서 나와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지난 20년간 쌓아온 성과를 다시 다듬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확고한 인식 속에서 다시는 민주주의를 유기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조여야 합니다."

 

그는 정상적인 사회라면 언론이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를 막아서는 등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성 위원장 스스로 언론인 출신 아닌가. 정권이 파시즘적 행태를 보이면, 암흑의 갱도 안에서 가장 먼저 위험신호를 보내는 카나리아처럼 언론은 왁왁대야 한다고 했다.

 

권력을 잡은 파시즘세력이 반대파의 목소리를 자꾸 소수로 몰아 불법으로 처단하려고 한다면, 언론이 최전선에 서서 자유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국민이 권력에 눌려 한번 기죽기 시작하면 점점 더 축소되고 침묵하게 마련이라는 게다.

 

"이명박 정권은 지금 방송을 장악하겠다, 괴담 운운하며 인터넷을 '막아서겠다' '유언비어다' '명예훼손이다' 온갖 장치를 통해 삭제하고, 억제하고, 압박하고, 압수수색하고, 한쪽 목소리만 살아남게 하고 있어요. 범국민행동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거예요."

 

묘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내년 봄이 되면 지금까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슈들의 자연스러운 연대가 마련될 거라고 내다봤다. "정상사회라면 언론을 통해 토로된 문제점들이 정치권에서 수렴되겠지만 한쪽 목소리를 괴담 취급하는 한 방법이 있겠냐" 하고 되물었다. 강고한 시민사회의 연대만이 정권의 안하무인격 행동을 방어할 힘이 될 것이라고 조망했다.

 

그렇다면, 정권의 무한질주는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이 딜레마'라고 했다.

 

"87년 당시 국민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적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절차적으로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선택된 대통령입니다. 이명박 지지자들은 그가 여러 문제를 일으켜도 당장 돌아서지 못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맘에 안 든다고 자꾸 뒤집으면 되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이명박 지지자들은 지금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을 거예요. 후회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게 표면화 되지 않겠지요. 적어도 1년은 봐줘야 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 할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방주의를 버리고 국민의 생각을 듣는 정상정치를 한다면 좋겠다 이거예요. 안 그러면 한국정치의 불행 아닙니까."

 

그는 안타까워했다. 어떻게 세운 민주주의의 역사인데, 한낱 물거품으로 만드나 싶어 답답해 죽겠다고 했다. 이제라도 정도를 걸어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과 조선일보류, 그리고 파시즘

 

그는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면서 '파시즘적 행태'를 보인다고 했다. 왜 그럴까. 한국사회에서 파시즘을 주도하는 세력의 실체는 누구로 보는 것일까. 성 위원장의 답변이다.

 

"<조선일보>류의 정신철학이 그렇다고 봅니다. <조선일보>도 같은 언론 종사자일뿐 심판관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조선일보>는 늘 판관 노릇을 자처해요. 좌익이니 뭐니 딱지를 붙여 막무가내 공격을 하죠. 나는 <조선일보>더러 개혁적 언론이 되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보수언론만 돼도 공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권력의 힘에 빌붙어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것은 언론이 아니라는 걸 자인하는 꼴입니다. 촛불을 통해 <조선일보>류의 의제설정 기능은 완전히 상실했지요. 요즘 '자식들 등쌀에 <조선일보> 끊었다'는 소리 많이 듣습니다. 실제 독자수가 줄고 광고가 주니 검찰권력에 빌붙어 살아남으려고 안간힘 쓰는 거 아니오?"

 

이참에 한 가지 더 물었다. 도대체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이 국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연주 KBS 사장을 몰아내기 위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정연주를 타깃으로 삼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라고 보는지.  

 

"정연주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거죠. KBS는 국정철학을 반영해야 한다고 (그들이) 이미 밝혔듯이 자기들 목소리를 내는 '이명박계 사람'을 앉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방송장악은 '정연주'를 걷어내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곧 MBC 민영화를 시작하겠죠.

 

찬바람 불면 입법추진 할 겁니다. <PD수첩> 수사에서 보듯, 사법부가 언론을 재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법부가 언론의 옳고그름을 재단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맘에 안 드는 언론은 사법부를 끼고 재단하겠다 이거 아닙니까. 대한민국 언론을 사법부가 장악하겠다는 건데,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명박은 왜 정연주를 타깃으로 삼았나

 

그는 분개했다. 눈빛도 이글이글 타올랐다.

 

"나는 우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광장 민주주의가 다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토대 위에 대의민주주의가 새롭게 서고, 확고한 민주주의 정치철학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권보다 더한 태풍이 몰려와도 끄떡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세워야 합니다. 정권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는 민주주의로는 안 됩니다.

 

노무현 정권이 국가보안법도 못 없앤 건 큰 잘못입니다. 탄핵파동 뒤에 국회 절대 다수 의석을 만들어줬는데도 국가보안법 하나 못 없앤 건 잘못이죠. 이 부분도 새로운 민주주의를 꽃피우면 해결된다고 믿습니다."

 

그는 역사의 낙관을 믿는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거리에 서서 팔뚝이 '도로 구릿빛'이 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는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일시적으로 축소할 수 있겠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 받는 정치범들이 늘어나 감옥을 가득 채울 수도 있겠죠. 주눅 들 수 있어도 죽지는 않을 겁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때도 살아남은 우리들입니다. 나는 우리 국민들의 민족적 에너지와 열정을 낙관합니다."

 

그는 하회탈처럼 웃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성유보 위원장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7일 저녁 KBS 앞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태그:#성유보, #이명박, #정연주,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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