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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국이 과거 억압적인 언론정책으로 회귀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일 것이다."

 

국제기자연맹이 지난 5일 경고한 말이다.

 

우리는 이미 벌써 재앙을 맞고 있다. 과거 1980년대 권위주의 언론정책의 모습이 '유령'처럼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핵심 참모가 '피아노 언론관'을 대놓고 주장하고 나섰다. 세상이 아연실색한 일이었다. 이 언론관은 과거 독일의 히틀러 나치 정권 때 선전상이었던 괴펠스가 역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KBS가 '정부 산하기관'이니까 정부 정책이나 조치들을 마치 정부가 만들어 준 악보대로 피아노 치듯 그대로 홍보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었다. '나치즘 방송'을 만들겠다는 속내가 드러난 것이라면,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과거 5공화국 정권은 그래도 말로는 '공영방송'을 한다고 했었다. 그들조차 '나치즘' 방송관을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현 정권은 5공 정권 때보다도 더욱 폭압적인 '나치즘'방송을 하겠다는 것인가.

 

나치즘 방송을 하겠다는 것일까?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사이인 최시중씨를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어 스카이라이프와 아리랑 TV, YTN, 한국방송광고공사 등에 대통령 측근들을 임원으로 선임했다. 언론 장악의 저의를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권은 이제 KBS를 자기들 손아귀에 넣기 위해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나섰다. 감사원의 정연주 사장 해임 요구, KBS 임시이사회의 해임 권고 결의안 채택 따위의 'KBS 장악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감사원의 해임 요구 이유라는 걸 보면, "정 사장이 방만경영, 인사 전횡 등 비위가 현저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납득할 수가 없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공영방송사 사장을 임기중에 그만두라는 것 자체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동구 사장 문제로 지난 2003년 11월부터 진행된 KBS 특별감사는 177일이나 걸렸는데, 이번에는 특감을 고작 72일만에 서둘러 끝냈다니 이야말로 표적감사, 졸속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체적인 사실과 내용은 감사원 해임 요구 처분 무효 확인 소송과 집행 정지 신청 등의 재판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현 정권의 방송 장악 저의가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YTN 사태도 마찬가지다. KBS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으로도 창피한 일이다. 선거 참모를 언론기관의 장으로 내정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언론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민주국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언론 당사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용역직원을 동원해 '날치기' 식으로 사장 선임 결의를 한다거나 사장이 자기 언론사 직원들한테 출근 저지를 당하고, 새벽 기습 출근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든 희한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YTN 구본홍과 88년 문화방송 김아무개 사장

 

권위주의 시절인 지난 1988년 11월 문화방송에서 비슷한 일이 터진 적이 있었다. 방송문화진흥회가 유신독재 권력이 지명한 '유신회' 국회의원 출신의 인물을 문화방송 사장으로 선임해버린 것이다. 문화방송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하다.

 

당시 문화방송은 황선필 사장을 퇴진시키고 방송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있던 터였다. 유신독재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인물을 사장으로 모시라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문화방송에서는 사장 출근 저지 투쟁이 거세게 벌어졌다. 김아무개 사장은 몇 차례 출근을 시도했지만, 방송민주화 노력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김아무개 사장은 그래도 새벽 기습 출근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구본홍씨도 당시 문화방송에서 이 사태를 직접 지켜본 인물이다. 불명예스럽게도 출근 저지 투쟁의 대상자로 스스로 자처하고 나서다니 답답한 노릇이다.

 

구본홍씨는 정권의 '하수인'인가, 사실과 진실을 생명으로 여기는 언론인인가. 먼 훗날 어느 것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인지 묻고 싶다.

 

언론의 위기는 곧 사회의 위기, 나아가서는 국가의 위기다.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그릇된 정보만 갖게 된다면, 올바른 판단과 여론이 나올 리 없다. 이런 사회와 국가는 혼란과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쇠망의 늪으로 빨려들 게 마련이다. 재앙의 미래가 걱정이다.

 

이명박 정권은 출범 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상은 1980년대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타임 캡슐을 타고 미래를 향해 달리기는커녕 과거로, 과거로, 질주한 셈이다. 백골단, 폭력진압, 대량검거 등의 권위주의 독재권력의 행태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현 정권이 <PD수첩>을 문제 삼아 탄압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언론의 의제설정 기능, 다시 말해 문제 제기 기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미국 소비자연맹의 핸리 박사가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과장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데, 뭐라고 답할 텐가.

 

80년대로 되돌아온 세상... '땡이뉴스' 원하나  

 

과거 80년대 시절 밤 9시 '땡'하면 '전두환 동정' 기사가 어김없이 방송 머리기사로 나왔다. '땡전 뉴스'였다. 대한항공기가 소련 미사일에 격추돼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엄청난 일이 터졌는데도 이날 밤 9시의 첫 머리기사는 "이순자 여사가 00를 돌아보았다"는 따위의 '땡전뉴스'였다. 이제 '땡이뉴스'가 나오게 되는 것인가.

 

방송폭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방송의 횡포가 오죽 심했으면 시청료납부 거부운동이 전국에 걸쳐 범국민적으로 전개됐겠는가. KBS가 편파, 편향, 왜곡 보도, 저질 오락프로그램 따위로 국민의식을 마비시키는 방송폭력에 맞서 1985년부터 국민적 저항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저항운동은 군부독재의 억압적 언론정책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염증이 한꺼번에 폭발한 양상으로 매우 빠르게 번져나갔다. 국민의 힘은 무서웠다. 시청료 수입이 너무나 급격하게 줄어들어 KBS가 전전긍긍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국민의 무서운 힘을 아는가, 모르는가. 권력이 백성을 죽일 수는 있어도 백성을 이길 수는 없다는 역사의 준엄한 교훈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언론대학살과 삼청교육대 따위로 세상 사람들의 숨을 죽이게 만들만큼 권력의 칼을 휘둘렀던 5공의 최고 권력자의 말로가 어찌 됐는가. 백담사 유배에다 끝내는 영어의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12·12 군사쿠데타의 공동 주역이었던 6공의 최고 권력자도 재판정에 서지 않았던가.

 

사실과 진실을 생명으로 여기는 진정한 언론의 비판을 국민의 소리로 겸허하게 받아들여 국정의 과오를 미리 막고 올바른 국민의 정치를 펴는 것이야말로 이 정권과 나아가서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길임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오로지 폭력의 힘만 믿고 국민을 억압하여 권력의 횡포를 계속 자행한다면, 엄청난 국민적 저향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가만히 앉아서 미래의 재앙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정부는 언론 장악 획책을 당장 멈춰라.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반민주적인 언론억압 정책을 계속한다면 제2, 제3의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을 비롯해서 이미 시작된 촛불시위 등의 국민적 저항권이 더욱 거세게 발동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정상모 기자는 1980년 <문화방송> 해직기자로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한겨레>와 <문화방송> 논설위원을 역임했습니다. 


태그:#언론장악,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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