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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금당터로 지목된 곳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금당지만 겹친 채 발견됐다.
▲ 발굴조사중인 보원사지 전경 백제시대 금당터로 지목된 곳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금당지만 겹친 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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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불과했을까'

있을 만한 터를 찾아 3년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백제시대 금당터(金堂止)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만들어진 토기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서산 상왕산에 위치한 천년고찰 '보원사' 이야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서산시가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보원사지(사적 제316호)'는 창건연대와 소멸시기가 기록된 문헌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출토된 유물 등으로 보아 백제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고 있는 1000년 고찰이다.

특히,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매우 큰 절이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곳에는 보원사지 5층석탑(보물 제104호)과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더욱이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3년 동안 애타게 찾은 백제 유물은 한 조각도 없어

백제시대 금당터는 3년을 뒤졌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 보원사지 곳곳에서 발견되는 건물지 백제시대 금당터는 3년을 뒤졌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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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사'를 찾기 위해 서산시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06년 3월 시작해 현재까지 '서산 보원사지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으나,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백제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발굴조사는 1·2차에 걸쳐 오는 2017년까지 12년 동안 진행된다. 발굴조사 3년째인 현재까지 이곳에서는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금당지, 보원사 삼보(普願寺 三寶)라고 새겨진 명문기와 조각,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청자, 분청사기, 백자 조선시대 금동보살좌상 등 9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으나 조사팀이 목매어 찾고 있는 백제시대 유물은 한 조각도 나오지 않고 있다.

결국, 현재까지는 알려진 것처럼 보원사지가 백제시대 절터라는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한 것이다.

발굴조사단은 당초 지목된 지역을 발굴하면 쉽게 드러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문제가 더 복합해졌다. 이젠 어디에서든 금당터가 나올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발굴작업을 벌여야 할 형편이다.

이 마애불도  백제시대 기록물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1959년 발견되고 나서야  존재를 인정받은 만큼 기록에 없는 보원사도 그 시대 유물 등이 나와야 백제시대 사찰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 서산마애산존불상 이 마애불도 백제시대 기록물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1959년 발견되고 나서야 존재를 인정받은 만큼 기록에 없는 보원사도 그 시대 유물 등이 나와야 백제시대 사찰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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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자 '보원사지가 백제시대 절터이기는 한 것인가?'라는 회의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백제시대 역사 기록물에는 '보원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아니다'라고 하기도 곤란하다.

엄연히 절터에서 백제시대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됐고, 400여m 거리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84호)이 있기 때문이다. 서산 마애불도 백제시대 역사기록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1959년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백제시대 작품'인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 발굴조사단이 지난 7월말까지 발굴 조사한 면적은 전체 10만2886㎡중 1만6130㎡로 1/6 정도에 지나지 않아 아직 희망은 있다.

보원사 기록 없지만, 증거 발견될 가능성 배제 못해

발굴조사단은 '꿈'을 버리지 않은 채 '이 골짜기 어딘가에 분명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미 발굴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금당터가 겹쳐져 있는 것이 확인된 지점에 대해서도 두 시대층을 완전히 걷어 내고 다시 '백제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들은 보원사지에서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금당터'나 중요한 유물이 발굴될 경우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84호)'과의 상관관계 등을 풀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보원사지에서 올해 7월말까지 보원사 명문기와, 청자, 분청사기 등 모두 900여점이 출토됐으나 백제시대 유물은  단 한개의 사금파리도 나오지 않았다.
▲ 보원사지에서 3년동안 발굴된 유물 보원사지에서 올해 7월말까지 보원사 명문기와, 청자, 분청사기 등 모두 900여점이 출토됐으나 백제시대 유물은 단 한개의 사금파리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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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열 학예사(서산시청)는 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백제불교는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384년 침류왕에게 전달한 이후 392년 아신왕이 국교로 공인하는 등 빠르게 전국으로 전파되었다"며 "때문에 서해안지역의 주요 교통로상에 있던 가야산 줄기에 '보원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백제 역사기록에는 '보원사'에게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실제 발굴조사를 통해 증명되지 않으면 보원사가 백제시대 사찰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러나 550년에서 6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마애삼존불상'도 1959년 봄 처음 발견 이후 세상에 알려진 만큼, 보원사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보원사가 백제시대 사찰이었음을 증명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발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과연, 천년 고찰 보원사의 비밀은 밝혀질까? 흙속에 묻혀있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늘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보원사지 발굴조사단'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태그:#보원사, #보원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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