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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전쟁의 세기라 할 수 있을 만큼 화약 냄새, 피 냄새로 가득하여 이전 세기들이 보인 그것들을 넘고도 남았다. 한편, 아직 걸음마 수준인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소 모양새는 달라도 20세기가 지닌 씁쓸한 애칭을 닮아갈 가능성이 높다. 21세기는 지금 '전쟁의 세기'를 비꼬아놓은 것 같은 '폭력의 세기'로 나아가려 한다.

 

전쟁이 일정 정도 정해진 틀과 분명한 상대를 전제로 한 개념인 반면, 폭력은 한 쪽이 오로지 자기 뜻과 목적에 따라 다른 한 쪽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매우 일방적인 개념이다.

 

또 전쟁이 대개 일정한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한정된 싸움인 반면, 폭력은 불특정 기간 중(불특정 다수를 향해) 벌어지는 것으로 어떤 면에서는 일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21세기 세계 곳곳에서 그런 폭력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다. 그리고 또 믿거나 말거나,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전 세계에서 지켜내겠다고 나서는 유일한 나라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그런데, 미국은 그 지위를 남용하여 일방적인 권리 행사를 추구하는 외교, 곧 '폭력' 외교를 자주 벌인다. 그리고 다른 국가나 비 국가 조직 역시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 같은 방식으로 거기에 대응하면서 세계의 각종 분쟁이 폭력 모양새를 띠게 된다.

 

<폭력의 시대>(에릭 홉스봄 지음/민음사, 2008)에서 우리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앞장서 벌이는 '폭력' 외교가 각종 폭력을 부채질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 하는 나이 지긋한 한 석학을 본다. 21세기를 이름 짓는 한 재료가 된 세계화를 앞에 두고, 그는 미국이 자기 역할을 새롭게 그리고 제대로 인식할 것을 주문한다. 한편, (미국을 제외한) 모든 세계는 사실상 유일 원칙도 아닌 (미국에 의한) 일방적인 원칙에 무조건 동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여전히 21세기 초반을 달리고 있는 우리는, 21세기가 미국의 시대가 아닌 세계의 시대로 이름 지어지기를 바라며, 이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분주한 에릭 홉스봄에게 잠시 귀 기울이려 한다.

 

폭력의 손길에 물드는 세계화, 이를 어찌 손봐야 하나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폭력은 적어도 다른 개인이나 조직을 통해 일정 부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폭력이나 국가 대 비 국가 조직 간에 이루어지는 폭력에는 통제 가능한 수단을 들이대기가 쉽지 않다. 폭력 자체가 지닌 모호함에 그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모호해지는 현상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와 맞물려, 세계화 시대를 확장해가는 21세기는 어느 순간 '혼란의 시기'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을 추가로 달고 있다.

 

전쟁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20세기를 지나서, 우리는 그 모습 그대로 혼란스러운 21세기를 보고 있다. 우선, 거의 안하무인격인 경제 세계화에서 그런 모습을 본다. 자기 혼란을 거듭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그렇다. 또한, 20세기 전쟁의 아류로 자리 잡은 듯 보이는 각종 테러가 자연스러워지는(?) 모습에서도 그렇다. 21세기는 혼란을 밥 먹듯 자주 반복한다.

 

다소 난처하게도, 지은이는 이 책 <폭력의 시대(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에서 이 시대를 바라보는 잣대로 (책 제목이기도 한)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를 언급한다. 그는 이러한 잣대를 미국과 미국 외 다른 세계 사이에 벌어지는 문제를 비교 관찰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제국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미국 지도부는 미국 패권의 어설픔을 소위 '자발적인 연합'으로 맺어진 연맹 체제로 감쌌다. 그들은 소련이 붕괴한 뒤에도 미국의 '유아독존(唯我獨尊)'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돌린 패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규칙으로, 세계적인 게임을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또 미국에 필적할 만한 힘과 세계 패권의 의지를 가진 국가가 나올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1차 걸프전(UN과 국제 사회가 선의로 지지했다.)과 9·11 미국 본토 테러 공격 직후의 반응은 소련 붕괴 이후 커진 미국의 힘을 입증했다.

 

그러나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정책이 과대망상주의에 빠지면서 기존의 지배력을 떠받쳤던 정치적, 이념적 기반이 대부분 무너졌다. 미국은 그 가공할 군사력을 제외하고는 냉전 승리에 따른 이점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미국은 사상 최초로 국제적으로 거의 고립됐고, 세계 대부분에서 인기를 잃었다. 막강한 군사력은 경제적 허약함을 부각시켰다. (…) WTO에서 이제 미국은 과거와 달리 높은 지위에서 다른 나라와 협상할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미국에 대한 위협”을 명분으로 삼는 공격 운운 자체가 앞으로 미국의 세계적 지위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나.(중략)

 

국제 사회의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미국이 과대망상증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외교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미국은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시대에도 초강대국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이 좀 더 위험하지 않은 초강대국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이 책, 50~52)

 

홉스봄은 이 책에서 고삐 풀린 (경제)세계화와 갈수록 복잡해지고 동시에 불안해지는 (국제)정치를 다루었다. 그것이 이 시대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좌충우돌 행동과 맞물려 이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와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국민국가 주도의 정치가 국제사회에서는 새로운 정치주체로 떠오른 (경제)세계화에 휘둘려 위태롭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국민국가 시대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각국)정치 불안은 세계화가 불러올 위기를 더욱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고 보면서 이에 관하여 세세히 분석한다.

 

그렇게 홉스봄이 다루는 정치 주제들은 '21세기 전쟁과 평화에 관한 포괄적인 문제'(1, 2장), '세계 제국들의 과거와 미래'(3, 4장), '민족주의의 성격과 변화'(5장), '자유 민주주의의 앞날'(6, 7장), '정치적 폭력과 테러의 문제'(8~10장) 등이다(참조. 이 책, 8).

 

사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6년 여 작업 기간이 필요했다. 2000년부터 2006년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청중을 상대로 작성한 강연 원고를 모아 출간한 책이 바로 <폭력의 시대>이다.

 

긴 시간에 걸쳐 여러 지역, 여러 청중을 상대로 진행한 강연을 모은 것이어서 책 내용 상당수에서 시대 배경이 지금과 다소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강연 원고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이 시대에 맞도록 수정·보완을 거치고 그에 관한 지은이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글이 더해지면서, 이 책은 세계화 시대 파도에 더욱 혼란스러워진 대한민국에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 어떻게 말해야 말이 통하나

 

21세기 국제 관계와 세계화 문제를 (미국 일방적인 방식과 달리) 새로운 방법으로 다루자는 에릭 홉스봄의 말은 우리가 마주한 문제와 아주 가깝다. <폭력의 시대>가 나와서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동네 뒷골목에서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폭력의 재생산, 확장, 변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지금 세계에서 매우 일상적인 현상이며 그래서 더욱 쓰라리다.

 

이 책 해제(김동택,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연구교수) 제목인 '새로운 세기와 낡은 정치 체제'는 마치 이 시대 세계가 지닌 혼란의 핵심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하다. 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 분단의 상처를 지금껏 끌어안고 있는 대한민국은, 너무 빠른 세계화에 끌려가는 느리고 낡은 정치에 신음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그만큼 '폭력의 시대' 그리고 <폭력의 시대>는 여러모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이상한 독주는 신자유주의 목표가 짙게 배인 세계화 물결과 함께 계속되고 있고, 국민국가는 시대 흐름과 어긋나는 것으로 종종 묘사되면서 무언가 위태로워 보인다. 한편 언제 어디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질지 모르는 테러같은 비정규 전투가 흔해 지는 것은, 그것이 지닌 위험을 부각시켜 반사이익을 추구하는 국가 정책들과 맞물려 역설과도 같은 명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른 면에서, 또 어떤 면에서는 그 연장선에서 불안함을 감출 수 없다.

 

"오늘날 정치에는 복잡한 특성이 존재한다. 지금은 아직 국민국가의 시대다. 국가는 세계화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분야다. 하지만 그 '국가'는 사실상 국민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정치 단위다. 과거에는 국가의 의사결정권자(통치자)들이 대다수 국민의 견해를 거의 무시하고 나라를 운영했다. 그리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국가 정부들은 국민들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다. 지금은 감히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오늘날의 국민들은 어느 때보다 자신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 (이 책, 164)

 

실제 주먹 쓰는 것만이 폭력은 아니다. 이 시대 각각의 국민국가를 비롯해 국제사회는 종종 '폭력'을 변용하며 권리 행사를 하고 있다. 동의 받지 않은, 아니 더 이상은 동의 받을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는 행동은 초강대국 미국은 물론 그 어느 국민국가에도 허락될 수 없다.

 

미국은 제국을 향한 야망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상 여전히 제국 흉내를 내고 있다. 또한 미국은 '폭력'의 변형과 변용을 그 누구보다 즐겨 사용하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국제 권력의 중심에 서려 한다. 그러나 과거에 실재했던 제국 시대는 이미 종영했고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와 역할마저 다시 논의해야 할 사안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상황이 그렇다면, 외교력 실험무대의 한 장인 동아시아에서 분단국가라는 지위를 안고 사는 우리 역시 미국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무작정 잠잠할 수는 없다. 21세기 세계는 어찌 보면 모든 나라, 모든 이에게 같은 발언권을 부여하려 한다. 미국은 그 점을 늘 불편해하고 우리를 포함한 많은 나라는 그런 것을 여전히 낯설어한다. 이제 누가 21세기의 이런 변화를 발견하고 세계 무대에 이를 나타내보일까.

 

"이제 미국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관건이다. 부시의 진정한 동맹인 영국 같은 나라들이 앞으로도 미국이 계획하는 모든 일을 무조건 지지할까? 동맹국들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 줘야 한다. (…) 적어도 한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낫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미국이 소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두려움이 없는 상황에서는 미국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게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게 만들고, 독자적인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이 책, 174)

덧붙이는 글 |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이원기 옮김. 민음사, 2008. 1만5000원
(원서) Globalism, Democracy, and Terrorism by Eric Hobsbawm (2007)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이원기 옮김, 김동택 해제, 민음사(2008)


태그:#폭력의 시대, #세계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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