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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국가기록원이 18일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해 참여정부 당시의 대통령 기록물을 회수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16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기록물을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이로써 6개월여를 끌고 온 전·현직 대통령 사이의 볼썽사나운 싸움은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청와대는 노 전 대통령의 기록물 반환을 항복선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비록 늦었지만 노 전 대통령측이 위법 상태를 인정하고 반납의 뜻을 밝힌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 말대로 청와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편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다. 노 전 대통령은 편지에서 "이미 퇴직한 비서관·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느냐"고 토로했다.

 

게다가 '봉하마을 괴담'으로 시작된 이번 싸움은 뒤끝도 좋지 않다. 청와대는 끝까지 "기록물을 반환해도 위법은 남는다"며 '검찰 고발' 운운하고 있다. 더 나아가 기록물을 담고 있던 그릇인 e지원 시스템까지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봉하마을 괴담'에 대한 해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청와대 참모진 수준?... 코미디 같은 '봉하마을 괴담'"

 

'승부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싸움에서 곱게 물러설 리 만무하다. 노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쓴 편지에서 "공작에는 밝으나 정치를 모르는 참모들이 쓴 정치소설은 전혀 근거 없는 공상소설"이라며 "지금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전직 대통령과 정치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동관 대변인은 "청와대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 조용하고 원만한 해결을 추진해왔다"며 "이 사안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법과 원칙에 관한 문제"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대변인이 아무리 "조용하고 원만한 해결"을 강조하고,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고 강변하더라도, 청와대가 이번 사건을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켰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논란이다. 노 전 대통령 측에게 기록물 사본에 대해 말할 권한은 현 청와대가 아니라 국가기록원에 있다. 노 전 대통령측은 "열람권이 확보될 때까지 사본을 잠정 보관하고 있을 뿐, 위법이 아니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기록원과 노 전 대통령측 간에 해결할 문제였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국가기록원을 제쳐놓은 채 익명 뒤에 숨어서 갖가지 '봉하마을 괴담'을 유포시키는 등 정치 쟁점화에 앞장섰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12일 "봉하마을에 200만건의 국가자료가 복사되었고, 해킹으로 인한 국가기밀 유출이 우려된다"고 보도했다. 이어 <중앙일보>는 이달 7일 "청와대가 '봉하마을로 옮겨진 것은 데이터 복사본이 아닌 메인 서버의 하드디스크와 데이터 원본'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두 신문 모두 '청와대 관계자'의 입을 빌어 보도했다. 신문 보도로 모자랐는지, '청와대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G8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으로 떠난 8일 직접 브리핑에 나섰고,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 동원' '노무현 측근 자금 사용' 등 새로운 의혹을 전파시켰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서 '독도 괴담', '요미우리 괴담'의 빌미를 제공하는 사이 청와대는 익명에 숨어서 '봉하마을 괴담'을 양산하고 있었던 셈이다.

 

'괴담' 보도할 땐 언제고 청와대 비판하는 <중앙>

 

'괴담' 수준의 의혹을 여과없이 보도한 언론 중 하나인 <중앙일보>의 논설위원조차 이러한 청와대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배명복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17일자 <노무현의 굴레>라는 칼럼에서 "청와대 관계자라는 익명에 숨어 계속해서 언론 플레이를 하며 펌프질을 해댔으니 전임 대통령을 흠집 내려는 비열한 정치 공작 아니냐는 의심을 산 것"이라고 꼬집었다. "청와대 참모진의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코미디 같은 '봉하마을 괴담'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청와대는 노 전 대통령 측이 청와대 서버를 통째로 가져갔느니, 해킹으로 인한 국가 기밀 누출이 우려된다는 등 괴담 수준의 각종 의혹을 제기하며 봉하마을을 압박해 왔다"며 "전임 대통령을 국기 문란의 중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국론을 통합하고,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짓을 한 셈이니, 그게 과연 대통령에게 득이 되었겠느냐"며 "간계(奸計)만 있지 지혜가 없는 탓이다. 무능함보다 무서운 것이 비겁함"이라고 지적했다.

 

지저분한 뒤끝... 이 대통령이 얻은 것은?

 

'괴담' 수준의 의혹 유포에 앞장선 자사의 보도 행태에는 눈을 감고 청와대의 '비겁함'만을 질책하는 논설위원도 그렇지만, 노 전 대통령의 반환 의사 표명 이후 보여준 청와대의 '뒤끝'도 꼴사납기는 마찬가지다.

 

'국가기록물 반환'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하던 '청와대 관계자'는 소기의 목적 달성을 눈 앞에 두고서 "기록물을 반환해도 위법은 남는다"고 꼬리를 남겼다. '기록물을 반환해도 전직 청와대 비서관 등에 대한 고발 방침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하는 것을 봐가며 결정하겠다'는 식이다.

 

고발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현행 법에 따라서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다는 '궁색한' 설명이 뒤따랐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측이 위법을 인정하고 반환하겠다는 것 아니냐"며 "형사소송법(234조 2항)에 따르면, 위법 사실을 알게 된 공직자가 고발을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라고 설명했다.

 

차명진 한나라당 대변인이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얘기하면서 "국가기록을 슬쩍 하신 범법행위" 운운하는 등 '가벼운 입'을 놀린 것도 주변의 눈총을 샀다.

 

특히 이는 이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처리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국가기록원에서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한 취지와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대통령은 싸움을 끝내고 싶은데, 참모진이나 여당은 '이제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며 싸움을 부채질하는 꼴이 됐다.

 

결국 '청와대 관계자'보다 상급자인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청와대의 고발 가능성을 시사한 언론 보도에 대해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진화에 나서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17일 기자들과 만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싸울 생각이 없다"며 "이명박 대통령도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고 잘 좀 정중하게 처리하라고 당부하셨다"며 "국민들이 지금 안 그래도 짜증나는 일이 많은데 전·현직 대통령들이 싸우면 어떻게 보겠느냐"고 우려했다.

 

청와대는 또 '완벽한 회수'를 내세우며 봉하마을에 있는 'e지원 시스템'의 반환까지 요구하고 있다. 'e지원 시스템'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주도적으로 개발해 특허를 받은 업무운영 시스템으로 국가기록물은 아니다. 따라서 그 자체는 국가기록원에 이관해야 할 의무가 없지만, 노무현 정부는 자발적으로 국가기록원에 이관했다.

 

특히 이날 국가기록원이 자료를 모두 회수해 가면 e지원 시스템 내부에 어떤 자료도 남지 않기 때문에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봉하마을 측은 e지원 시스템 반환을 요구하는 청와대 측에 "달라면 줄 수도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이 기념품으로 갖고 있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니 이해할 수 없다"며 허탈해하고 있다.

 

"외교는 굽신, 경제는 불신, 남북 관계는 망신이어서 삼신할미도 포기한 '삼신 정부'란 말까지 나오고 있는" 총체적 난국이다. '청와대 관계자'가 대통령기록물을 반환받기 위해 아웅다웅한 것이 이 대통령에게 과연 무슨 도움이 됐을까? 무엇보다 폭염으로 짜증나 있는 국민들은 등을 돌리고 있다.


태그:#대통령기록물, #이명박 청와대, #노무현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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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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