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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서너 건씩 꼬박꼬박 상식 이하의 뉴스가 터진다. 이명박 정권의 몰상식한 행태는 갈수록 태산이다. 부패정권의 시커먼 악취가 온 나라를 뒤덮는다. 잔뜩 독이 오른 저 불도저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다 갈아엎겠다는 걸까.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뉴스를 보다가 YTN 주총도 PD수첩도 마음에 걸려서 여의도로 향했다.

 

KBS본관과 여의도공원 사이 차도 양쪽으로 펼침막이 빽빽하다. 촛불을 소중히 여기는 KBS언론종사자들의 것, KBS는 촛불시민이 지킨다는 선언, 촛불을 옹호하는 정연주는 물러나라는 구호까지. 말다툼 하듯 펼침막이 엉켜있다. 촛불에 반대하는 단체 중에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이란 이름이 눈에 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천막을 지난다. ‘토론의 성지 아고라’, ‘공영방송을 지키는 사람들’, ‘광화문에서 만난 사람들’이란 문패가 붙어있다. 증권거래소 앞 코스콤 비정규직노동자 투쟁현장의 그것처럼 낡았다. 비에 젖고 볕에 그을린 천막이 아스팔트에 뿌리내렸다. KBS 계단 입구. 전경차 차벽이다. 어제까지 계단에 앉아 촛불집회를 했는데 이 날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원천봉쇄다. 촛불은 열 개 남짓 켜졌다. 청원경찰과 시민들 사이 고성이 오간다. 시민들 삼십 여명이 흩어져 서성인다. 조금 살벌하고 쓸쓸했다. 광활한 여의섬 한 귀퉁이 촛불무대. 내 자리가 너무 커서 당혹스러웠다. 딱히 볼 것도 할 일도 없다. 요 며칠 집회는 자기주도적 투쟁을 요한다. 길 잃는, 아니 길 찾기다. 촛불 있는 곳이 길이다. 먼저 촛불 하나 켜고 앉는다. 

 

KBS 전경차벽 원천봉쇄... 길거리 촛불집회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자유발언을 시작했다. KBS앞에 차벽이 세워진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한다. 또 어떤 시민은 KBS노조는 왜 시민과 함께 촛불을 들지 않느냐고 서운함을 드러냈다. KBS직원이라는 한 촛불시민은 “오전에 뉴라이트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그때 차벽을 쌓았고 형평성의 원칙상 이 집회도 막는 거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옥신각신 술렁였다. KBS노조는 YTN 좀 본받으라는 손피켓도 보였다. 누가 그랬건 KBS앞에까지 차벽이 놓인 작금의 상황에 촛불들은 어이상실이라며 분노했다. 노란 티셔츠를 입은 한 시민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방금 인터넷에서 KBS앞에 시민과 KBS직원의 몸싸움이 났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상황을 알아보러 왔다고 한다.

 

매주 수요일마다 국회 앞에서 촛불집회를 하는 사람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몸조심하시고 우리 열심히 싸우자고 발언을 마무리했다. “노래해~”라는 요청이 나왔다. 멋지게 ‘불나비’를 부르더니만 “앞으로 발언하는 분들은 노래 한 곡씩 하자”고 제안한다. 박수로 승인했다. ‘앙코르’ 요청에 넙죽 한 곡 더 부른 그는 다시 국회 앞으로 ‘따르릉 따르릉’ 사라졌다.

 

촛불은 좀 늘었다. 오붓하고 화기애애하다. 금세 야유회처럼 흥겨워졌다. 곧 ‘미디어행동’ 주최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말끔한 외모와 능숙한 진행이 돋보이는 사회자가 오태훈 KBS아나운서가 진행했다. 첫 순서는 민중가수 최도운씨. 집회현장에서 나오는 노래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뽀얀 젖살이 오른 세 돌 지난 아들과 같이 나왔다. 

 

"남편 월급과 애들 성적 빼고 다 오르죠?"

 

“5월부터 집회에 아이와 함께 다녔는데... 노래 다 할 때까지 바지에 오줌만 안 싸기를 바란다”라며 손을 꼭 잡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아이는 전자촛불을 들고 놀다가 엄마 마이크 줄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시원시원 노래도 잘하고 또박또박 말도 잘하는 그녀는 “요즘 남편 월급과 아이들 성적만 빼놓고 다 오른다”고 말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어 언론노조에서 제작한 언론민주화투쟁의 역사 동영상을 감상했다. 비장한 민중가요를 배경으로 90년대 초 KBS 앞에 전경들의 난입 장면이 나온다. ‘맞아, 그 때 그랬지’ 한국일보, MBC, EBS, 경인방송, 시사저널 등등 파업투쟁의 수난사가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수많은 선배 언론인의 피눈물 맺힌 언론민주화 가시밭길 20년이 선명한 영상으로 펼쳐진다.

 

집회장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각오의 침묵일까. 언론노동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양승동 한국PD연합회장은 20년 언론민주화의 역사를 언급하며 “그 때는 시민들과 함께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촛불시민들과 이렇게 함께 하니 하나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PD협회장, KBS기자협회장 "권력 장악 음모 맞설 터"

 

“6월 10일부터 촛불집회에 참석은 했지만 방송을 진행하고 있어서 공정성 시비에 휘말릴까봐 조심스러워 시민 앞에 서지 못했습니다. 미디어포커스에서 조중동만 지적한다고 말하는데 야구에서도 심판이 볼을 스트라이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KBS <미디어포커스>의 진행을 맡고 있는 김현석 KBS기자협회장의 발언이다. 그는 이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KBS <뉴스9>에 주의 제재를 내린 것에 대해 KBS 창사 이래 9시 뉴스에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참 진지한 발언이 계속되는 사이 전경들은 방패를 들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집회장 전면에 대열을 정비했다. 무슨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것도 아니고 전경차벽 건너편에는 예의 그 방송차량이 등장했다. 영등포경찰서 ‘방송남’ 목소리가 울린다.

 

“시민여러분 밤늦게 인도를 점거하고 집회를 하는 건 불법...”

 

'최시중 탄핵' 발의 국회의원 100명 동의 필요

 

김유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발언에 앞서 “경찰여러분들도 먹고 살려니 그러는 건 아는데 눈치껏 센스 있게 하라. 목숨 걸고 열심히 막아봤자 이명박은 그런 거 알아줄 사람도 아니다”고 응수했다. 여유로운 대응으로 분위기를 주도한 그는 최시중 방통위원장 탄핵 서명이 7만 명 정도 된다며 상황을 보고했다.

 

“18대 국회에서 최시중 위원장 탄핵을 발의하려면 국회의원 100명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맘에 들지 않더라도 한나라당과 선진당 의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홈페이지를 방문하셔서 탄핵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KBS노조에 대해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떳떳한 공영방송 언론인으로 살 것인지, 조중동 기자처럼 시민들에게 외면당할 것인지 선택해야할 것입니다.”

 

박수와 촛불과 피켓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밤 11시가 다 돼가지만 촛불대오는 흐트러짐이 없다. 경찰의 ‘자진해산 경고’가 CF처럼 중간 중간 삽입되는 가운데 분위기는 무르익고 마지막으로 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이 나왔다. 자신의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주저 없이 “노래해”라고 말해달라며 발언을 시작했다. 

 

"20년 전 빚 갚겠다. 언론노동자가 앞장서겠다"

 

“촛불의 힘은 참 위대한 것 같습니다. 촛불이 많으면 많아서 든든하고, 적으면 오붓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KBS 앞 인도에서라도 자리를 잡고 집회를 할 수 있는 것은 20년 전 민주화를 위해 싸운 시민들 덕분입니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저희 언론노동자가 앞장서서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 음모를 막아내겠습니다."

 

그는 기자가 되고 PD가 되길 바라던 많은 친구들이 민주화 운동으로 젊은 날을 보내고 지금은 학원가와 자영업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공부도 꽤 잘하고 정말 똑똑한 친구들이 자신을 희생해가며 이룬 민주화라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저희가 나서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감옥에 가라면 가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 YTN 주주총회에서 의장 바짓가랑이를 붙잡고라도 저지하겠습니다. 우리 고생하는 카메라 기자들 위해라도 멋진 그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가슴을 덥히는 불꽃같은 발언에 촛불시민들은 묵묵히 오랜 박수를 보냈다. 외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촛불을 켰으나 뭉클하고 결연한 다짐으로 촛불을 내려놓았던, 2008년 7월 16일 여의도 촛불의 기록. 


태그:#언론노조, #공영방송사수, #미디어행동, #최상재, #PD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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