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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시원하고 참 좋다. 이렇게 좋은 걸, 이 무더위에 저 꼭대기까지 꼭 올라가야 할 이유가 뭐있겠어?"

"그런데, 어째 꼭 어렸을 때 학교 가다가 중도에서 땡땡이 쳤던 날 하고 같은 기분인 걸."

 

그동안 우리 일행들이 등산할 때면 거의 대부분 정상까지 올랐었다. 그런데 이날은 낮은 봉우리에 올랐다가 내려와 개울물에 발을 담근 일행 두 사람의 말이 대조적이었다. 지난 15일 관악산 등산은 그야말로 룰루랄라 여유로운 골짜기 피서산행이었다.

 

"이번 등산에선 난 빼줘, 이 무더위에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그래."

 

이번 화요등산도 어느 산악회를 따라 강원도에 있는 오지산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일행 한 사람이 무더위에 지쳐 높고 깊은 산은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관악산 정도라면 한 번 올라 보겠지만."

 

그래도 아주 빠지기는 섭섭했던지 여운을 남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벌써 3년 반 동안 거의 매주 빠짐없이 등산을 함께 해온 그를 빼놓고 그냥 갈 순 없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관악산 등산을 하기로 한 것이다.

 

무더운 날씨엔 정상 등반보다 골짜기 피서산행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바꿔 탔다. 서울대 정문 앞에서 내려 관악산 등산로 입구로 들어섰다. 오전 10시 경이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인다. 골짜기를 타고 흘러온 개울물에서는 아이들 몇이 벌써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몇 백 미터쯤의 골짜기를 걸었을 뿐인데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낮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고 더구나 습도까지 높아 몸으로 느끼는 더위는 삼복더위 저리가라였다.

 

"오늘도 저 꼭대기 정상까지 올라가려고?"

 

관악산을 제안했던 일행이 정상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은근히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그도 얼굴에서 땀방울이 흘러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것 아냐? 관악산에 왔으니 저 연주대까지 올라가야지."

 

산행에는 항상 자신만만한 다른 일행이 말을 받고 나섰다. 그는 일단 산행을 시작하면 적어도 다섯 시간 정도는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너무 덥잖아, 낮은 봉우리 한군데 거쳐서 맑은 물 흐르는 골짜기에서 쉬었다 가는 것이 어때?"

"그게 좋겠다. 저 꼭대기 연주대까지 한두 번 올라간 것도 아니고. 오늘은 피서등산 어때? 내 말이 좀 이상한건가?"

 

피서면 피서고 등산이면 등산이지 피서등산이라니, 자신이 말해 놓고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반문을 한다. 그런데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피서등산, 그거 참 좋은 말인데, 적당히 등산하고 골짜기 맑은 물에 발 담그고 피서하는, 오늘은 우리 그렇게 한 번 해보자고?"

 

다른 일행 한 사람이 반색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또 다른 일행도 그게 좋겠다고 한다. 오히려 머쓱해진 쪽은 정상까지 당연히 올라야 한다던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는 사이 일행들은 자연스럽게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피하여 골짜기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물가에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는 인공호수를 지나자 무성한 갈대가 풀숲을 이룬 개울 옆으로 놓인 작은 다리가 나타났다. 왼편 개울 건너는 서울대 교정이었다.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인지 골짜기를 흐르는 수량이 제법 넉넉해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자 개울가 이곳저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음식을 들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등산복은 차려 입었지만 산행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쪽으로 가면 연주대야. 이쪽 삼막사 쪽으로 가야 돼."

 

골짜기를 타고 한참 오르자 길은 좌우로 갈라졌다. 왼편으로 오르면 연주대가 있는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그쪽으로 향하자 다른 일행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불러 내린다.

 

"그래, 알았어, 어쩌나 보려고 그랬지 허허허."

 

연주대 쪽으로 앞장섰던 일행이 함빡 웃는 얼굴로 돌아섰다. 삼막사 쪽으로 가는 길도 완만한 경사였다. 오른쪽 골짜기로 맑은 물이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자, 이곳에서 조금 쉬었다 가지."

 

힘든 코스가 아니었지만 모두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무더위와 역시 높은 습도 때문이었다. 물가로 다가가자 깨끗해 보이는 맑은 물이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르는 모습이 시원해 보인다.

 

산행 길에서 만난 여성 길동무들

 

바위에 걸터앉아 손으로 물을 퍼서 얼굴과 목에 흘러내리는 땀을 씻어내자 한결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둘러 앉아 간식으로 가져온 음식과 과일을 먹고 있을 때 지나던 다른 등산객 몇이 우리들 곁으로 다가왔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이쪽으로 오르시면 어느 쪽으로 내려가시려고요?"

"예, 우린 삼막사 쪽으로 해서 깃대봉을 거쳐 서울대입구 골짜기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아주머니들이 우리들의 등산코스를 물었다. 이들 여성등산객들도 우리 일행들처럼 오늘 날씨가 너무 무더워서 정상 등반을 포기하고 이쪽으로 오르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려가시면 천천히 걸어서 3시간 코스쯤 되겠는데요."

 

이들 여성등산객들은 관악산 지리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들 여성등산객들 자리가 바로 옆이어서 간식을 나눠주자 그쪽에서도 과일과 차를 나눠주었다. 쉬고 있는 사이 땀이 식는다. 맑은 물가의 나무그늘이어서인지 상당히 시원했기 때문이다.

 

"어때? 이 자리 좋잖아, 그냥 이곳에서 쉬었다가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 그건 안 돼, 깃대봉으로 돌아 내려가도 세 시간 코스라잖아? 자, 그만 일어나자고."

 

정상에 오르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던 일행이 펄쩍 뛴다. 어느덧 쉬기 시작한 지 삼십 여분이 지나 있었다.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하면 한없이 게을러지는 법이야. 이정도 코스도 오르지 않고 그냥 내려가면 어찌 등산했다고 할 수 있겠어?"

 

그는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도록 아예 못을 박았다. 이곳에서부터는 경사가 제법 심했다. 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여성등산객들도 우리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바윗길과 능선을 지나 KT 송신소 입구에서 오른편 능선으로 방향을 바꿨다.

 

삼막사로 가는 고개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자 저 앞쪽 바위봉우리 위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바라보인다.

 

"저 깃대봉 꼭 올랐다가 가야 하는겨? 그냥 골짜기로 내려가면 안 될까?"

 

바위봉우리만 만나면 항상 꽁무니를 빼는 일행이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름 없는 바위들에게 멋진 이름을 지어주다

 

"저 깃대봉 별거 아니에요. 별로 위험하지도 않고요."

 

어느새 가까이 따르던 여성등산객이 괜찮다고 안심을 시킨다. 바위봉우리 오르기는 항상 조심스러운 일행이었지만 여성등산객들이 괜찮다고 하자 더 이상 뒤로 물러 설 수도 없게 되었다.

 

깃대봉으로 가는 능선길에는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뾰족뾰족 솟은 모양이 위험해 보이기보다 귀여운 형제처럼 보이는 바위가 정다워 보인다. '쌍고래 바위'는 커다란 바위가 마치 입을 벌린 고래처럼 보이는 것이 위아래로 겹쳐있는 모습이었다.

 

판판한 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사이에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풀이 자란 '샘물바위'는 산 아래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기에 좋은 장소였다.

 

"저 바위 좀 봐? 험상궂은 얼굴이 조폭 두목의 찡그린 얼굴 모습 같잖아?"

 

일행이 가리키는 제법 커다란 모습의 바위는 작은 눈과 커다란 주먹코에 단단해 보이는 턱을 가진 사람의 얼굴 형상이었다.

 

"저 바위 이름은 '얼굴바위'라고 지어줄까?"

"아니야, 그냥 평범한 얼굴이 아니고 험상궂게 생겼으니까 '조폭바위'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일행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지은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고 우긴다.

 

"그럼 '조폭얼굴바위'로 하면 되겠네요."

 

이번에는 여성등산객이 일행들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럼 저 바위가 몹시 기분 나빠 할 것 같은데요. 왜 하필 '조폭얼굴바위'냐고요. 그냥 '얼굴바위'로 하죠?"

 

바위가 기분 나빠 할 것이라는 말에 조폭 얼굴을 주장했던 일행이 한 발 물러섰다.

 

바위 이름을 지어주고 깃대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봉우리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겁이 많은 일행 한 사람은 상당히 긴장하는 눈치였다. 밧줄이나 사다리 같은 구조물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순전히 바위 모서리를 붙잡고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여성등산객들이 거침없이 올라가자 그도 따라 올랐다.

 

"정말 어려운 봉우리 아니네. 이 정도면 별로 위험하지도 않고 쉬운 편이구먼."

 

바위봉우리에 거뜬히 올라선 것이 스스로도 대견한 모양이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정상에는 이미 다른 등산객들이 먼저 올라와 있었다.

 

"어르신들 내려가실 때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먼저 올라와 있던 젊은 등산객이 내려갈 때 조심하라고 주의를 상기시켰다. 위험한 길은 항상 올라가기보다 내려가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내려가는 길과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우리일행들의 뒤를 따랐던 여성등산객들은 어느새 저만큼 앞장서 내려가고 있었다. 조심조심 바위봉우리를 내려오자 저 만큼 앞서 가던 여성등산객 한 사람이 또 다른 바위 봉우리에 올라 두 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서서 멋진 자세로 환호를 한다. 바위봉우리에서 쩔쩔매는 우리 일행들에게 시범이라도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린 그동안 등산을 제법 많이 했는데 왜 실력 향상이 전혀 안 되는 걸까?"

"그야 당연한 것 아냐? 실력이야 조금씩 좋아지고 있겠지만 그만큼 늙어가고 있으니까 결국 제자리걸음을 하는 셈이지."

 

높지 않은 바위봉우리에 올랐다가 내려가는 길이었지만 힘들고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능선길에서 잠깐 쉬고 일어나 골짜기로 내려섰다.

 

산골짜기 맑은 물가에서 천변정담으로 함께 나누는 피서

 

이쪽 골짜기도 맑은 물이 제법 넉넉하게 흐르고 있었다. 골짜기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불어나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더위를 피해 골짜기를 찾은 것이다.

 

"자, 이제 거의 다 내려왔으니까 마음 푹 놓고 이곳에서 푹 쉬었다가 내려가기로 하지."

 

흐르는 물 가운데 커다란 바위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는 곳에 우리들도 자리를 잡았다. 신발을 벗고 발을 물속에 담그자 서늘한 느낌이 온몸으로 번져 머리까지 올라온다.

 

"어허, 시원하다. 이렇게 시원하고 좋은 걸. 이 무더운 날 생고생을 누가 시켰어?"

"시키긴 누가 시켜. 자신이 좋아서 한 거지. 그런데 낮은 봉우리만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그런지 등산한 느낌이 제대로 나지 않는 걸."

"그러게 말이야, 꼭 옛날 어렸을 때 학교가다 중간에서 땡땡이 쳤던 기분이랑 비슷한 것 같아, 거참!"

 

시원한 골짜기 물에 발을 담그고 바위에 걸터앉아 간식으로 과일을 들며 노닥거리는 것만한 한가함이 또 있을까? 이야기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촛불시위, 대미, 대중국 관계와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에 이어 독도 문제가 나오자 일본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일본 말이야.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도대체 정이 안가는 나라야, 정말. 요즘은 독도 이야기만 나오면 일본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

 

독도와 일본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들 흥분을 한다.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은 일본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도대체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경제도 그렇고 외교도 그래, 실용외교 한답시고 결국 일본에게 뒤통수 얻어맞은 꼴이잖아? 요즘은 외교정책 4전4패라는 말이 나돌더구먼, 미국, 중국, 일본, 북한 어느 한 곳 제대로 하는 곳이 없다는 거야."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고 있었다. 노변정담(爐邊情談)이 아닌 천변정담(川邊情談)이 정담(政談)으로 바뀐 것이다. 쉬엄쉬엄 느긋하게 오른 산행에 쉬는 시간이 길어서 해가 기울고 있었지만 마음 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늙어가는 백수들이 누리는 초라한 자유만끽이었다.

 

"자, 이제 그만 가지, 이제 슬슬 배도 고프고."

 

시간은 어느새 오후 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7시간이 지나 있었다. 3시간 산행에 4시간의 골짜기 피서가 된 셈이다.

 

"그래, 그만 가자고, 이만하면 피서도 충분히 했고."

 

조금 내려오자 길가에 가꾸어 놓은 화단에 원추리 꽃들이 곱게 피어 있다. 그러고 보면 무더위 속에 피어난 꽃들 중에 원추리만큼 예쁜 꽃도 없을 것 같아 카메라에 담았다.

 

"시간이 많이 늦어서 오늘도 점심 겸 저녁이 될 것 같군, 어때? 얼큰한 전주콩나물 해장국에 모주 한잔씩 하는 것이, 힘들이지 않고 느긋한 산행에 골짜기 피서 잘했으니 오늘은 내가 쏘지."

 

봉천동으로 나와 전에도 몇 번 찾은 적이 있는 전주콩나물해장국 집으로 향했다. 매콤하고 뜨거운 콩나물해장국에 인목대비의 비방으로 빚었다는 모주가 입맛을 당긴다. 후후 불며 먹고 마시는 일행들의 콧등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히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름을 시원하게ㅡ응모기사입니다


태그:#이승철, #관악산, #피서등산, #콩나물해장국, #천변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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