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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쪽에서 우리 역사의 흔적과 자취를 찾아 배움과 성찰의 여행을 시작한 지 짧은 몇 해가 되었다. 나는 집 밖을 나서 우리 문화재와 우리 민족이 살아온 역사적 삶의 흔적을 살피고 대면할 때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감동을 얻었었다. 더욱이 작지만, 알차고 야무진 매력을 품은 우리 강산, 우리 겨레의 표정과 숨결이 담겨 있는 우리 역사의 새로운 발견을 통해 얻는 깨달음은 나의 가슴을 겸손히 깊어지게 하였고, 경망했던 행실을 진중하게 다듬을 수 있는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우리 겨레가 살아온 역사의 터전을 찾아 살피려 할 때, 아쉽게도 또 하나의 불행한 역사적 한계를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이른바 ‘원삼국시대’에 대한 답사여행을 계획하려해도 현재의 물리적, 지리적 여건상 남한(한반도의 남쪽)에 있는 백제나 신라의 유적지나 문화재 등은 쉽게 찾아볼 수 있어도,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나 역사적 자취는 직접 자유롭게 찾아가서 살펴볼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북녘(북한)이나, 중국의 동북부지역, 러시아의 남동부지역 등에 널리 분포된 옛 우리 선조들의 나라와 삶의 터전은 아쉽게도 분단의 장벽과 국경의 제한으로 가로막혀 특별한 경로를 거친 경우가 아닌 한 일반인들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눈이 번쩍 뜨이는 반가운 정보를 하나 접하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서울대박물관과 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특별전 <하늘에서 본 고구려와 발해>가 6월 20일부터 8월 23일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너무나 반갑고 흥분되었다. 가능한 한 빨리 적당한 날을 잡아 서둘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만사를 앞질러 마음을 급하게 재촉했다.

 

 

<하늘에서 본 고구려와 발해> 특별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위성사진과 항공사진을 통해 가보기 힘든 고구려와 발해의 대표유적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마련한 매우 뜻 깊은 전시회임에 틀림없다. 마침 나는 그곳으로 지난 토요일(7월12일) 한 무리의 꼬마 친구들과 함께 손에 땀을 쥐어가며 기대로 가득 찬 심정으로 발길을 내어 찾아갔다.

 

마음이 너무 급했던 탓일까. 오전 8시 반에 출발한 자동차가 9시 조금 넘어서 서울대박물관에 도착하고 말았다. 낮은 언덕을 걸어서 정문 계단으로 천천히 오르니 저만치 앞에 아직 굳게 내려진 출입문의 셔터가 가는 빗방울을 촉촉이 맞으며 막아서고 있었다. 그래도 정면 입구 한 쪽 벽면에 내걸린 커다란 한 장의 펼침막 사진(고구려 도읍을 위성에서 찍은 사진)이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겸연쩍게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박물관 정면 한 쪽에 동그랗게 모여서서 문이 열리는 시간(10시)까지 오늘의 관람에 대한 소중한 의미와 하루 일정을 이야기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광활한 만주벌판과 북녘의 드넓은 연해주를 주름 잡으며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당당한 우리 겨레인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도 몰래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어 가는 듯한 체온의 상승, 혈압의 고조가 몸으로 얼핏 느껴졌다.

 

얼마 후 박물관의 자동셔터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가더니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서둘러 오늘의 첫 번째 관람팀이 되어 쪼르르 입장했다. 우리들은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2층 전시실로 향했다.

 

2층에 오르자마자 오른편 벽면에 걸린 옛 고구려의 첫 번째 도읍이었던 압록강 이북의 졸본(중국 요녕성 환인현 부근)에 위치한 ‘오녀산 산성’의 사진이 찍힌 대형 걸개 펼침막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마치 미지의 대륙과 산악의 중원에 우뚝 솟은 천혜의 요새이자, 종교적 피안의 세계인양 신비롭고, 강건하게 그 의연함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여태껏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처음으로 그 면모를 확인하는 짧은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체증으로 막혀있던 내 안의 답답한 그 무엇인가가 훌훌 털어지며 시원하게 뚫리는 듯한 미스터리한 통쾌함과 격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바라보는 순간만으로도 나는 오래 전 북방을 호령하던 내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위의 할아버지,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구려와 발해시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드넓은 광야와 벌판이 아른거리는 한반도와 그 이북의 영토가 표기된 지도 앞에서 문득 멈추어 섰다. 그리고 벽면에 그려진 옛 고구려와 발해의 광활한 초원을 생각하며 상상 속에서 마구 뛰어다닐 수 있었다. 나는 일순간의 거침없는 황홀한 질주를 통해 우리민족, 우리겨레의 숨결을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누구랄 것 없이 커다란 벽면의 지도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배낭 한 쪽 옆구리에 꽂혀있던 ‘똑딱이’ 디카를 얼른 꺼내 그들의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한 장의 역사로 소중하게 남겨 주었다. 아이들의 뒷벽에 널찍하게 표시된 너른 광야가 통통거리며 촐랑대는 까마득한 오늘의 후손들을 위해 너그러운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서 환인일대를 위성으로 정밀하게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이 걸린 곳으로 움직여 갔다. 정말 확연하게 드러나 보이는 산과 강과 지형의 모습이 비교적 선명하고 또렷하게 찍혀 오래 전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더욱이 지구의 높은 하늘 위(우주)에서 위성으로 내려다 본 안학궁과 홍련봉 1보루 등 당시의 궁궐터와 군사기지 등의 모습은 약 130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

 

나는 박물관의 동선을 따라 벽에 걸린 위성사진과 항공사진 등을 꼼꼼히 살피고 관찰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쪽 벽면을 끼고 돌아서려는 순간, 하얀 눈으로 덮인 주변을 평온히 다스리는 엄숙한 피라미드인 장군총을 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당시 장수왕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어렵지 않게 넌지시 짐작할 수 있는 우람하고 강인한 안식의 공간이었다.

 

 

장군총은 그 규모가 자그마치 밑변 길이 31.6미터에 높이 12.6미터로 넓적하고 판판한 돌을 쌓아 만든 계단식 돌방돌무지무덤이다. 겨울에 촬영한 듯 하얗게 눈이 내려 깔린 무덤 주위와는 달리, 장군총의 돌방돌무지무덤은 차갑고 날카로운 하늘을 향해 과묵하고 도도한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 듯 웅장하고 신령스러워 보였다.

 

고구려 후기가 되면서 무덤 내부에는 종교적이며 영혼의 안식을 주는 그림들이 그려졌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사신’이라 불리는 4방위의 수호신이 그려진 강서대묘의 사신도이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그린 것으로 고구려 사람들에게 사신은 저승 세계로 가는 길을 호위해주는 신으로 받아들여졌음이 분명하다. 그렇듯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입었던 의복,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 춤과 놀이,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과 종교, 사상 등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1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고구려 도성으로 향하는 교통로의 주요길목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고구려 성곽(후성산 산성)을 유심히 볼 수 있었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험준한 산줄기를 따라 견고히 축조되어 있는 고구려 성벽은 당시 고구려가 동북아시아를 호령할 수 있도록 한 뛰어난 기술력의 정수이자 저력이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성했던 고구려도 끝내는 세습독재 체제의 문제와, 내분과 배반, 당시의 국제적 변화에 조응하지 못한 뒤처짐으로 서기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정확히 30년 후에 고구려 장수출신 대조영은 당나라로부터 탈출하여 고구려의 옛 땅인 동모산에 고구려를 이어 갈 나라인 발해를 세웠다. 돈화일대의 위성사진으로 보이는 발해도성의 모습에는 발해의 첫 도읍이었던 동모산 인근이 주변과 잘 구분될 수 있도록 표시되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 배포한 자료를 살펴보니 발해의 유적 중에서도 성곽은 1930년대 일본 동아고고학회가 상경성을 발굴조사한 것을 시작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중국, 북한, 러시아 연해주에서 모두 120기가 넘도록 알려져 있다고 하며, 건국 초기에는 발해 성 역시 고구려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문왕 시기부터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제로 전환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옛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사방으로 세력을 뻗치게 되고, 그 결과 무왕 시절에는 고구려 땅의 약 1.5배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항공사진 몇 장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있었던 ‘크라스키노성터와 니콜라예프카성터’ 사진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놀라웠다. 만주뿐만이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를 포괄하는 드넓은 땅이 고구려 영토의 1.5배라니.

 

 

한편 불교문화를 이루었던 발해의 유물 중에는 평소 관심을 가지고 보아왔던 얼마간의 기와 편을 볼 수 있었다. 발해의 기와에는 아주 특이한 점 한 가지가 있는데, 기와를 만든 사람의 다섯 손가락이 찍혀 있는 이른바 ‘손끝기와’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손끝기와는 발해 기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니 당시 와공들의 자존심과 유쾌한 노동(?)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발해의 기와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손끝기와 외에도 발해인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도깨비기와와 기와지붕의 용마루를 장식하는 ‘치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전통 한옥의 지붕 용마루를 새의 깃털처럼 세련되고 용맹하게 장식하는 치미가 우리겨레 건축디자인의 극치가 아닐까하는 내 나름의 자족적 평가를 흐뭇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그다지 넓지 않은 박물관 2층을 천천히 걸어 우리겨레의 옛 고토인 고구려와 발해의 광야를 벅찬 가슴으로 돌아보았다. 이 번 <하늘에서 본 고구려와 발해>특별전은 나에게 행복했지만, 아쉽고 쓰린 무거움을 주기도 했다. 그 무거움의 첫 번째는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지켜내지 못한 후손들의 뼈저린 각성과 의지에 대한 생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반세기를 넘도록 걷어내지 못하고 있는 분단의 철책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반면 오늘의 전시회 관람 속에서 희망과 위안을 주는 분명한 한 가지가 있었다. 1층 전시실에서 6.9미터의 높이로 육중하고 장엄하게 서서 우리겨레의 기개와 강인함을 역설하고 있는 광개토태왕비의 거대한 탁본 비문은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바로 용기이자 힘이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12일 서울대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하늘에서 본 고구려와 발해>전을 다녀와서 작성한 글입니다.


태그:#고구려와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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