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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밀라노 중앙역에서

 

 

연착 때문에 전철이 끊겼다. 느긋하다며 좋아할 때는 언제고 날이 저무니 나도 몰래 긴장이 된다. 사람들은 종종 "혼자 여행하면 무섭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고, 그럴 때면 나는 늘 "다른 사람들이 저를 더 무서워해서요, 오히려 제가 얼굴 들고 다니기 죄송하죠"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허풍스럽기가 마치 세상에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순전히 신체의 강인함이라기보다는 얼굴의 강인함일 뿐이지만, 늦은 밤 낯선 곳에 도착해 당황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낯빛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두껍고 둔탁한 낯짝만으로는 가릴 수 없어 안색은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조금은 두려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얻었던 한인민박의 전화번호만 달랑 들고 왔고, 출발 직전에 예약했던 터라 가야 할 숙소가 어디 근처에 붙어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결제 역시 못한 상태였다.

 

민박집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은 늦은 시간이라 잠긴 목소리다. 죄송스럽게도 내가 잠을 깨웠나 보다. 알아서 오라고 한다. 가는 길을 물었다. 전철로 설명해 줬는데 대중교통은 이제 아침까지 없다.

 

걸어가면 안 되냐고 묻자, 걸어오는 길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전철로 다섯 정거장쯤 가야 한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한다. 택시라니. 그럴 바에는 역 근처 싸구려 호텔에서 자는 게 낫지. '민박'하면 '픽업'이 매력인데 사장은 안한다고 한다.

 

중앙역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판이었다. 중앙역에서 걸어 가기 곤란할 만큼 먼 곳에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익숙한 도시에서도 찾기 어려울 만큼 먼 거리인데 낯선 도시에서, 그것도 야간행군을 감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길을 좀 헤매기라도 한다면 길에서 자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도착한다 해도 아침 전에 가능할지 모르겠다. 사장은 전철은 이미 끊겼는데 어떻게 올 거냐고 되려 묻는다. 예약을 취소하고 전화를 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간의 숙소들은 모두 중앙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밤에도 구경을 다니거나 입실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예약만 해두면 기차역에서 가까운 숙소들은 언제 도착한들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밀라노에는 좀 더 일찍 도착했어야 했다는 것을 내가 알 리가 없었다.

 

그동안에는 운이 좋았는지 숙박을 역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사실 민박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밀라노 같은 대도시에서는 중앙역 근처에서 저렴한 숙소를 운영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굉장히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밀라노라는 도시가 얼마나 큰 도시인가도 모르고 온 내게 잘못이 있고. 원망을 하자면 숙박정보를 충분히 챙겨오지 못 했던 스스로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 인근에 있는 숙소를 찾으러 역 주변을 돌아 봤지만 역시나 저렴한 곳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노숙!

 

그래, 노숙! 노숙밖에 없다. 호텔에 가고 싶지는 않다. 그곳은 내게 외롭고 지겹고 비싸다. 그러면 오늘 밤은 역 앞 광장에 드러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자유롭게 자보자. 떠도는 구름처럼, 집시처럼!

 

날이야 금세 밝을 것이고 날 밝고 사람들만 다니기 시작하면 잠 깨기도 좋을 것이다. 광장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인적이 좀 더 드물어지길 기다렸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돌아다니면 신경 쓰여서 어차피 못 잘 것, 행인이 줄어든 다음 누우려고 했다. 그런데 행렬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역무원이 다가온다.

 

이곳은 밤에 위험하니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한다. 기차 운행도 모두 끝났고 기차역도 문도 곧 폐쇄할 예정이다. 이 근처는 우범지역이니까, 배회하지 말고 갈 길 가라고 한다. 안 그래도 갈 길 막막해 하던 내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리가 없다. 말을 안 걸어줘도 내가 걸었어야 하는데, 마침 잘 걸어줬다.

 

나는 갈 곳 없는 내 처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차가 연착한 것은 특히 강조했다. 연착은 다소 강한 어조로, 본의 아니게 예약했던 숙소에 갈 수 없게 됐는데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숙소를 찾지 못 했다는 것은 다소 불쌍한 어조로. 사정을 얘기하며 지금은 갈 곳이 없으니 그냥 그 자리에 머물게만 해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광장도 역무원의 관할 구역이라고 생각했다.

 

역무원은 자기는 순찰을 도는 것일 뿐 광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본인 책임이 아니라며, 기차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특히 상관 없으니 내 맘대로 하라고 한다. 자기는 분명히 경고했다고 정확하게 못을 박고 돌아섰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위험하길래 그런 소리까지 하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의 말대로 광장은 일찍 떠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 같았다. 신병 시절 자대배치를 받아 내무실 문을 여는 순간, 내무실에 배어 있는 냄새만으로도 내 남은 군생활의 대략적 분위기를 맡아낼 수 있었다.

 

일찍 일찍 좀 깨달아 주면 좋을 것을 꼭 문 앞에 와서야 분위기 파악을 한다. 여유를 부릴대로 부리다가 다급해진 사람은 또 나다. 역무원을 따라 뛰어가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럼 첫 차는 언제냐. 가장 빠른 기차 편으로 이 도시를 떠나겠다."

"당신 말대로 기차를 탈 거면 티켓이 있을 것 아니냐. 역내에 머무르려면 표가 있어야 한다. 티켓을 보여달라."

"지금 이탈리아 기차 티켓은 없지만 유레일 티켓을 소유하고 있어서 언제든지 기차를 탈 수 있다. 유레일이 안 되면 아침에 바로 구매하겠다."

"유레일을 갖고 있나? 그렇다면 역사 안에서 머물러도 된다. 어디 티켓 한번 보자."

 

대합실 같은 것이 있다면 비록 의자일지라도 길바닥보다 낫겠다는 생각에 개시도 안한 유레일 티켓을 보여주고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유레일은 내가 '확실한 여행자'이자 그들의 '고객'임을 단번에 알려주는 신분증 역할을 했다.

 

"문 닫기 전에 어여 들어와~."

 

역 출입구는 경비원과 함께 경비견도 지키고 있었다. 공항도 아니고 일개 기차역을 지키는 데 셰퍼드까지 동원하다니. 경비들은 표정부터 삼엄했다. 불과 몇 분 전의 나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광장 바닥에서 잠을 청하려 했을까? 한 박자 늦게 식겁했다. 역무원의 경고는 확실히 장난이 아니었다.

 

대합실에는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자리를 잡고 자고 있었다. 진작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 곳의 천태만상을 볼 수 있었다. 스티로폼 재질의 쿠셔닝이 있는 돗자리를 깔고 바닥에서 자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사람인가 보다. '저렇게 자면 되는구나'하고 선배들로부터 한 수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자리였다.

 

자리를 잡았는데 눕기 전에 용변을 보고 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화장실을 찾았다. 간단하게 씻는 것도 좋을 것이다. 화장실은 막상 찾을 때는 꼭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관심 없을 때는 잘 보인다.

 

소변은 못 느끼고 있었을 뿐 생각보다 급했다. 그 동안 긴장해서 몰랐는지 안심을 하고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자 급속도로 신호가 왔다. 순식간에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하면 꼭 시야가 좁아져 사물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도대체 화장실은 어디 있는지.

 

화장실을 못 찾겠자 머릿속은 변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 곳이라도 괜찮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텅 빈 기차역에서 구석 아무 데나 소변을 본 들 누가 알까 싶지만 괜히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나 혼자 창피하고 끝날 일이 아니라 그럴 순 없었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나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한국인들이나 동아시아인들의 얼굴에 싸잡아 먹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방광이 터질 것 같은 고통보다 더 참을 수 없는 창피한 일이었다. 지금 만취한 것도 아니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찾아봤다. 화장실이 눈에 들어왔을 때 발걸음이 조심조심 그러나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 '미린다'씨

 

유럽 기차역 화장실은 대부분 유료로 운영된다. 나는 화장실 입장을 위해 양 다리를 살짝 꼬고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소변을 저지하며 지갑을 뒤졌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동전을 하나씩 출입구의 투입구에 넣었다. 갖고 있던 동전들 중에서 투입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다 넣었는데 모자란다. 45센트뿐이었다. 겨우 25센트 모자란다. 헉, 70센트?! 지금까지 살면서 써 본 중 가장 비싼 화장실 요금이었다. 

 

밀라노 물가가 벌써부터 걱정된다. 걱정할 틈도 없이. 어서 돈을 바꿔야 하는데, 바꿀 데가 없다. 등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막막함에 눈물도 찔끔찔끔 나올 판에, 잘못하다가는 바지를 지릴지도 모른다. 유럽에서는 기차든 전철이든 버스든 타고 내릴 때 표 검사를 심하게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화장실들은 철저히 돈을 받고 나서야 들여보내 준다. 그 탈 것들은 가끔씩 승무원이 와서 검표를 한다. 비용 받는 데는 덜 열심히다. 주객전도다.

 

화장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코 앞에 있는데,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동전 몇 개가 모자라는 것 뿐인데, 에누리도 없는 상황은 가혹하기만 하다.

 

담이라도 타고 넘어가고 싶어져서 주위를 살폈다. 그때 화장실 안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청소하던 남자다. 그는 동전이 들어가 있는 기계를 보더니 그냥 들어오라고 눈짓하며 안쪽에서 열어줬다. 전후좌우 볼 것 없이 소변기를 향해 뛰어가서 볼 일을 봤다. 시원하게, 그 어느 때보다도 후련하게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말을 걸어온다. 

 

"한국 사람이세요?"

"예?"

"한국 사람 맞아요?"

"아, 예. 근데 한국 사람인 거 어떻게 아세요? 한국어 할 줄 알아요?"

"한국에서 살아서 말할 줄 알아요. 근데 잘 못해요. 한국 사람들 좋아요."

"와, 한국말 진짜 잘하시네요. 와, 대단하시다. 와."

 

한국어다. 억양이 낯설었는데 팔에 소름이 돋았다. 뜻밖의 한국어에 놀라서인지 소변 때문에 체온이 내려가인지 모르지만 왜 팔에 닭살이 돋았는지 모르겠다. 하체는 변기를 향한 채 끝날 것 같지 않은 볼일을 보며, 상체는 뒤를 돌아보며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하는 우스운 꼴로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란다예요. 근데 저는 먹는 거 아니에요."

"예?"

 

그의 한국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먹긴 뭘 먹어? 왜 먹지? 먹지 말라는 걸 보니 음식 이름인가 보다하고 한참 생각해 본 후에야 어렸을 때 마시던 음료수 이름과 비슷하다는 것이 기억났다. 농담이었는데 웃을 타이밍을 놓쳤다.

 

자기 이름과 음료수 이름으로 말 장난을 하면서 한국어를 잘 못한다니, 겸손한 편인가.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짧고 강한 자기 소개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는 말레이시아 사람이라고 했다. 로마에서 길을 잃었을 때 도와줬던 사람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라 방글라데시 사람이었고, 물조차 어떻게 시켜먹는지 몰랐을 때 길가에 있는 바에서 주문을 도와줬던 사람도 필리핀 사람이었다. 이번 여행을 하며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매번 그들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 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번에도 전처럼 감사 표시를 하지 못 하면 또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나의 모국어로 도움을 줬다. 감동도 고마움도 더 컸다.

 

그가 걸레질을 해야 해서 우리의 대화는 끊겼다. 나는 그에게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커피가 어떤지 의사를 물어봤다. 좋다고 한다. 자판기 위치를 확인하고 커피를 뽑으러 갔다.

 

자판기에서는 인스턴트 커피도 캔 커피도 찾을 수가 없었다. 커피 대신 초코 드링크를 뽑았다. 내가 마실 여분의 물도 뽑았는데 기계가 돈만 먹고 물건을 안 내줘서 2유로를 날렸다. 초코 드링크 가격까지 포함하면, 못 낸 화장실 비용 25센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금액을 써가며 음료를 샀다. 자판기 관리자라도 찾아서 따지고 싶었지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아까워도 할 수 없었다. 작은 답례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이 고마울 뿐이다.

 

몇 CC의 물을 몸에서 꺼내기 위해 비용을 지불했고, 몇 CC의 물을 다시 몸에 채워넣기 위해 비용을 지불한다. 하지만 단지 몇 CC의 액체만 내 몸을 드나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지만,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여전히 일을 해야 하는 그에게 초코 드링크를 전해줄 뿐, 더 이을 말을 나는 찾지 못했다.

 

웃고 있는 그의 표정 너머로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났던 이주 노동자들의 얼굴이 한 둘 스쳐 지나간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필리핀 삼촌들, 내게 요요를 가르쳐 주던 기억이 아직 잊혀지지 않고 떠오른다. "필리핀에는 장난감이 별로 없어서 모두들 요요를 잘하지"라며 자랑스러워 하며 신나게 가르쳐 줬는데.

 

대합실로 돌아갔다. 자리를 다시 잡고 눕우려 하니 역 밖에서 병 깨지는 소리가 난다. 남자가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창 밖을 내려다 보니 술에 취해 흥분한 청년들이 병을 깨고 웃고 떠들며 놀고 있다. 그 옆에서 자려고 했던 게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등줄기로 식은 땀 한 방울이 마저 흐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www.gabson.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년 6월부터 9월까지 여행한 내용입니다.


태그:#이탈리아, #밀라노, #노숙, #두오모, #이주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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