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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과 소련연방, 공산주의의 해체 그리고 러시아연방국, 구 소련소속국들의 연쇄적인 독립선언과 투쟁 등… 격동하는 러시아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체첸의 운명은 마치 내리막을 질주하는 자전거와 같았다. 계속되는 내전의 포화 속에 길거리 즐비한 시체들, 부모를 잃은 고아….

2007년 제작된 러시아 영화 <12명의 배심원>(니키타 마할코프 감독 원제 '12')의 오프닝 장면에 묘사된 부분이다. 오프닝을 비롯하여 영화 중간 중간이 불쌍한 체첸 소년의 처지가 난해할 정도의 수준으로 은유되기는 하지만, 내용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이지 러시아연방 영화청의 지원까지 받아 제작된 처지에 해묵은 체첸 문제를 다시 거들먹이는 것이 이 영화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너무나도 중요한 사건, 그러나 너무 쉬운 평결

12명의 배심원, 영화 초반부에서 이들의 태도에 진지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더군다나 리모델링으로 어수선한 법원 분위기, '간단한 사건'임을 누차 강조하며 빨리 매듭지을 것을 은근히 종용하는 집행관의 태도 등, 이미 소년에게 유죄가 평결된 것과 다름없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결과는 볼 것도 없이 만장일치라며 거수투표까지 진행하던 중 한 사내가 "한 소년의 인생이 달린 일인데, 이리도 간단히 표결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무죄를 표결하게 되고, 뒤이어 그가 군중심리를 없애기 위해 제안한 종이투표에서 무죄표가 한표 더 늘면서 치열한 논쟁과 진실 찾기가 시작된다.

마지막 심리를 지켜보는 배심원들
▲ <12명의 배심원>의 한 장면 마지막 심리를 지켜보는 배심원들
ⓒ M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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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영화의 묘미는 성공한 방송사업가, 카프카스 소수 민족 출신의 외과의사, 유태계 러시아 노인, 이름 모를 극단의 3류배우, 부동산 사업가, 죽은 자의 돈으로 산자를 돕는다는 장의사, 국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택시기사 등 다양한 군상들이 한데 모여 추리 아닌 추리를, 고뇌 아닌 고뇌를 하며, 평결의 초점을 무죄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다.

또 영화 내내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배우들의 열연과 카메라 시점은 마치 실제 배심원실에 온 듯한 그 이상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여기에 보너스(?)로 제공되는 소년과 카프카스 출신 외과의사의 칼춤이 영화에 '감칠맛'을 더 한다.

진실은 일상의 틈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 자체에 있다. - B. 토시아
법은 가장 강력하며 불변의 것이지만, 자비가 법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닐 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B. 토시아

토시아(Б.Тосья, 러시아 작가 보리스 아쿠닌의 법정소설 <더 스테이트 카운셀러>의 등장인물)로 시작해서 토시아로 끝나는 이 영화의 의도는 분명하다. 법리와 자비의 사이에서 배심원들만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할 깊은 고뇌에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자신의 삼촌 사례를 들면서 '법리보다는 인정이 진정한 러시아의 가치다'라고 역설하는 한 배심원, 그리고 소년이 지녔던 칼의 우연성에 대한 공방을 벌이던 중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배심원들을 향해 자기 부모님의 사례를 들며 '불가능한 일'에 대한 인본적 반론을 펼치는 유태계 노인의 대사가 이를 반증한다.

또한 <12명의 배심원>은 영화 후반부에서 범죄의 진실을 힐끗힐끗 드러내며 영화가 담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확인사살'까지 해준다.

다양한 직업, 다양한 계층 그러나 보편적 한계

토의 중인 배심원들
▲ <12명의 배심원>의 한 장면 토의 중인 배심원들
ⓒ M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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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의 배심원>은 다양한 직업,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하나 같이 변명을 늘어놓으며 섣불리 배심원 이상으로서의 선(善)을 행하기를 주저하는 공통된 반응을 보여줌으로써 현대인들이 지닌 보편적 한계와 무사안일적인 세태의 일면을 꼬집는다.

(덧붙여서, 영화속에서 12명의 배심원 중 이름이 거론되는 인물은 단 한사람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들 중 누구라도 저 11명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의도적 설정이다.)

주말이 왔다. 주 5일제가 확대되었음에도 사장의 '똥고집' 때문에 또는 가계(家計)를 위하여 아직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고 있는가? 혹은 매일 새벽, 촛불로 가슴을 불태우느라 피곤에 지쳐 있는가?

그럴 때는 <12명의 배심원>을 보자. 보면서 다음과 같은 '고뇌'를 해보는 것 또한 괜찮을 것이다.

'휴식이 일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닐 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태그:#12명의 배심원, #니키타 마할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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