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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노마드란 "노트북, 휴대전화, 휴대용 컴퓨터(PDA) 등의 각종 첨단 디지털장비를 이용하여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업무도 보고 다른 사람과 접촉도 하면서 생활하는 무리의 사람들(네이버 오픈사전 중에서)"을 말한다.

 

2002년 도심 월드컵 응원전과 뒤이은 '효순이 미선이 추모 촛불집회', 그리고 최근의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를 현장에서 또는 약간 빗겨난 위치에서 바라본 내가 떠올리는 것은  '디지털 노마드'다. 특히 디지털 노마드와 함께  '아고라'를 연상하면 어쩌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아 포기해야 했던 직접민주주의의 부활을 성급하게 예측하기도 한다.

 

"유목민은 성을 쌓지 않을 뿐더러 성을 떠난다. 자신이 태어나고 조상이 출생한 곳이 낡은 사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중략)…'디지털노마드'는 태생적인 진보성을 갖는다. 지켜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쟁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한국의 '인터넷과 이동통신(IC)' 서비스는 '디지털 노마드'가 성장할 최적 조건을 제공한다. "(네이버 오픈사전 중에서) 

 

나는 위의 글이 이렇게 읽혀진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집단지성으로서의 대다수 시민은 진보나 보수의 성을 쌓지 않을 뿐더러 누가 그 성에 가두러 하면 성을 떠난다. 자신의 계급과 계층은 낡은 사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누가 제공하고 선동하는 정보가 아니라 자신이 추려낸 정보를 믿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쟁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디지털 유목민, 새 목초지를 향해서

 

촛불집회의 규모 여부와 그 향방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간다. 디지털 유목민인 대다수 시민은 누군가 성을 쌓아 자신을 가두려고 한다면 그 성을 떠날 것이다. 다만 누군가 풍요로운 상식과 지성의 목초지를 제공한다면 그들은 그 곳에 머무를 것이다. 예로부터 말로만 인정되던 '민심'과 '천심'의 분신과 실체가 바로 그 대다수 시민의 집단지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다수 시민이 최대의 시위효과를 거두고, 물러난 자리에 어느 누군가는 옛날의 '자기 방식대로의 성'을 쌓고자 고분분투한다. 경찰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부추키고, 한편으론 촛불집회 열기를 지속할 조직화를 꿈꾸기도 하고, 새로운 논쟁꺼리를 창출하기도 한다.  아마 그것이 디지털 노마드에게 '풍요로운 목초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기자는 그 대다수 시민의 집단지성의 건전성과 역동성을 비록 상대쪽이지만 현장에서 체험하였고, 또 믿었기에 아고라에서 직접 시민들에게 [경찰 집회시위 대응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달라]는 청원을 하였다. 그런 사실을 오마이뉴스를 통해 알리자, 독일에서 공부하고 계시는 남경국 기자님의 훌륭한 기사와 또다른 독일유학생의 댓글, 그리고 여러분들이 의견을 주셨다.

 

아마 대다수 시민들은 그 논쟁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필요한 정보와 판단을 했을 것으로 본다.  제 기사는 설득과 제압을 위한 글이 아니라, (감히 일개 경찰관으로서) 논의의 장을 열고 그 논쟁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 우리 디지털 유목민들이 필요한 '풍요로운 목초지'를 스스로 찾아가기를 바랬던 것이다.

 

논쟁의 과정과 결과에서 나타난 공약수는 이렇다.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21조,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열람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헌법 37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이런 공약수를 가졌으면서도, 각자의 위치와 시각의 차이에 따라 이견이 있었다.  그리고 있을 수 있는 '오해'와 '편견, 선입견'도 크게 나누어 양측에 있었다.  이는 판단과 의견을 결정하는 '정보'의 양과 판단 시점(촛불집회 초기, 가두시위, 도로점거, 경찰의 과잉진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토론의 결론은 결코 동일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또 실제로 동일할 필요도 없다. 여전히 "경찰이 불법이고, 시민은 합법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나는 이런 주장에 대해 "경찰이 불법인 경우가 있었고, 시민이 합법이 아닌 경우도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 할 뿐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불법 시민은 합법? 꼭 그렇지만은 않아

 

나는 잠시 '경찰제복'을 입고 있는 시민으로서 내가 배운 지식과 양심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 경찰은 평온한 상태가 깨지는 '위험'과 '장애'를 사전에 예방하거나 발생했을 때는 '제거'해야 한다. 

 

- 범죄의 예방과 진압이라고 할 때 그 범죄는 그 위험과 장애가 반복, 정형화되어 국민의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규정해 놓은 가장 심각한 위험과 장애다. 

 

- 법전의 규정은 입법취지에 입각한 평균인의 상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 경찰권 발동의 본질은 물리력이다.(개인적으로는 공인된 폭력이라고 표현해도 기분나빠 하지 않는다.)  즉, 남들을 최종적으로 강제하는 힘이다.  이는 헌법이 일반통치권에 의해  경찰에게 부여한 힘이다.

 

- 그러한 무지막지한 힘을 부여했으므로 법률은 다시 경찰에게 최소침해, 과잉금지, 적법절차, 남용시 가중처벌 등의 제약을 가했다.

 

- 경찰권의 작용은 지나온 과거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상황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것이다.  혹 경찰의 수사와 입건을 떠 올린다면 그것은 경찰권이 아니라 사법경찰권일 뿐이다.

 

- 경찰이 불법(구체적 범죄혐의-누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의 인지)을 규정하고 선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같은 수사기관인 검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오롯이 사법부의 최종적인 판단이어야 한다.

 

- 경찰은 단지 위험과 장애를 경고하고, 이를 예방하거나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상황에 대해 법령에서 부여한 근거와 수단, 방법으로 판단하고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른 조치에 있어 여러가지 이익을 형량하고, 필요최소한의 조치와 결코 과잉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 과거 사법부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한다.  단 그 사법부의 판단은 그 시공간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판단이다.  그것은 다시 어떤 일에 대해 수사를 하고 송치를 할 때 중요한 판단 준거이지만,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경찰작용에 대한 예외없는 잣대는 될 수 없다.  경찰작용은 살아움직이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급박한 결정과 작용이다.  그 작용상 하자가 중대 명백하여 당연무효가 되지 않는 이상, 권한 있는 기관에 의해 취소되거나, 위법으로 판명나지 않는 한 정당, 적법한 작용이다.

 

- 집회시위중 일어난 범죄에 대해, 그것을 당장 막거나 제압하지 않으면 심각한 인명과 재산에 대한 침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면, 구체적인 증거 수집을 통해 사후에 사법작용으로서 처리해야한다.  정확한 신원확인이 없어도 체포영장 발부가 가능하고, 필요하면 공개수배를 하면 된다. 

 

경찰관인 나, 제복 벗고 촛불집회에 나간다면

 

나는 내가 제복을 벗고 난 후 시민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상식이 있다.

 

- 집회시위의 자유는 개인의 고립을 방지하고 인격형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정치·언론 등에서 내가 생각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때, 나는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나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것을 통해 난 내 정치적 요구나 판단을 알리고 싶다.  난 그것이 집회시위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 내가 집회시위를 신고하는 것은 허가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집회시위가 이루어지는데 불가피하게 다소 타인에게 불편과 제약을 가하게 될 것이고 또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싫어할 사람들로 부터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택한 장소가 참가자에 비해 협소할 때 도로에까지 내려서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모든 상황을 보호하고 통제해 줄 공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난 그 공권력이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호불호를 따져 신고를 받아주거나 반려하는 등의 방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대변해 주는 단체나 조직체가 없다면, 인터넷 등을 통해 같이 공감해 줄 사람들을 찾을 것이다.  일상을 떠나 더 자유롭게 더 많이 모였으면 하는 바램에 퇴근 후 야간에, 또 사람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소를 택할 것이다. 

 

- 경우 불명확한 것이 많아 미리 당국에 신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동일한 유형이 계속 반복된다는 확신이 서면 마찬가지로 신고를 할 것이다.  장소가 비좁아 도로에 내려설 때, 나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중 누군가가 무단히 도로 중간으로 뛰어들어 주행하는 차량을 막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집회 규모와 양상에 따라 얼마든지 경찰에게 교통통제와 집회시위중 뜻하지 않는 불상사를 막는 방안에 대해 협상을 할 것이다.  신고서에도 그런 내용을 포함시킬 것이다.  물론 미리 파악된 참가자들로 자체 질서유지인을 선정하여 될 수 있으면 경찰의 도움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집회시위를 진행시키고 싶다.

 

- 난 집회시위가 같은 생각과 말을 하는 세력을 실제로 보여주어, 당국이 오판하지 않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로의 진격과 포위는 폭력이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더라도 그 인원과 위세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그걸 인정한다면 내가 말하고 행동한 것에 반대하는 집단이 나를 향해 진격하고 포위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 내가 만약 어디로 진격하고 포위해서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때는, 나는 무기를 들 것이다. 그 때는 상대가 제압되지 않으면 내가 죽거나 숨죽여 살아야 하는 때다. 제로-섬 게임과 같은 때이다.

 

- 난 이런 생각이 우리나라 최고의 판단기관인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회시위는 '평화의 원칙' '집회장소 이격의 원칙' '상대존중의 원칙'의 3원칙이 있다. 언론의 자유와는 달리 집회시위의 자유는 상대에 대한 물리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집회시위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향하는 것과 상대의 또다른 헌법적 권리를 제약하는 방법은 자제되어야 한다.

 

- 이러한 생각은 내가 혹시 '소수의견' 쪽에 섰을 때, '다수 의견'들이 나를 향해 직접적으로 집회시위를 하거나, 나를 에워싸고 나의 헌법적 권리를 제약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공권력의 과잉은 당연히 비판받고, 사후적으로도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집회시위 참가자들의 과잉은 보호받지 못한다.  넘쳐나는 인원으로 일시 도로를 점거했다고 하더라도, 집회시위의 참가자가 대다수 해산한 상태에서의 일부에 의한 도로점거는 집회시위의 자유가 아니다.  몇몇 때문에 다른 시민의 통행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방종이자 오만이다.  집회시위를 함께 한 사람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집회시위의 목적과 품격을 훼손하고 심하게 말하면 잠재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다.

 

- 폴리스라인은 경찰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집회시위의 대표자들과 협상하여야 한다. 집회시위의 자유와 여타 기본권의 충돌지점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은 집회를 통제하거나 관리하는 법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다소의 안녕과 질서를 훼손하더라도 공권력으로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 내가 집회시위의 주도자라면 집회시위의 목적과 그 영향력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참가자들을 배려하겠다.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이 끊기지 않는 시간안에 집회시위를 종료할 것이며, 불필요한 공권력과의 충돌을 야기하여 부상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

 

경찰은 사회 갈등 사이 스펀지 되고싶지 않다

 

남경국기자로 인해, 독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물론, 경찰의 범죄정보 수집, 내사의 문제점과 그 개선방안 등의 논문을 준비하면서 독일의 법치주의에 대한 관심이 있던 터라,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법은 대륙법계, 즉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독일의 집회시위의 변천에 대해서 비록 많지 않는 문헌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극심한 학생시위·청년시위를 거쳐, 계층을 불문하고 참여하는 생활 시위시대로 바뀌었다. 이에 대응하던 경찰도 시위대의 문제제기와 국민의 요구에 따라 "시위대의 행진을 3열로 제한하는 등의 엄격한 시위관리 규정과 함께 조금이라도 규정을 어기면 가혹하고 폭력적인 대응을 해왔던 강경진압" 방식에서 탈피하기에 이른다.(이창무, 공안학회, 각국 경찰의 집회시위 관리방식의 변천과정에 대한 비교연구, 21면)

 

경찰한테 필요한 것은 시위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움 자체를 피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경찰에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질서와 폭력행위까지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2003년 노동절 시위 등 과격한 폭력시위는 끊이질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경찰의 조심스러운 대응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고 있지만, 독일경찰은 경찰의 강경대응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폭력시위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중시해 불필요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폭력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가능하면 관용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의적인 여론 확보를 위한 홍보활동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이창무, 앞의 글 22면)

 

나는 현재 집회시위에 대한 정책이나 정책집행을 하는 부서에 있지 않다.  이러한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 몇건의 살인사건 등 사건현장에서 사체에서 나오는 냄새와 땀냄새를 맡으면서 현장수사(CSI)를 하였다. 그래서 살인범이 검거되는 쾌감을 맛보기도 하였다. 

 

경찰은 정말 사회갈등에 어쩔 수 없이 끼이게 되는 스펀지이고 싶지 않다. 죽은 자의 입이 되어주고 싶고, 범죄피해자를 돌보는 역할을 하고 싶으며, 평온한 질서의 수호자가 되고 싶다. 이런 역할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정부와 시민사회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해 주었으면 한다.

 

본 기자는 이런 생각을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빌어 아고라에 청원을 하였다. 현실적인 집회시위를 주도하지는 못하지만, 온라인에서라도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끝까지 읽어 주신 분중 에 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은 아래에 링크되어 있는 '아고라 청원'에 서명해 주시길 바란다.

 

대다수 시민이 집회시위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주자         

덧붙이는 글 |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과학수사계에 근무하는 현직 경찰관입니다.  


태그:#집회시위, #촛불집회, #야간미신고집회, #야간집회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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