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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자인 만큼 역사 기억 중 많은 부분이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이전 글에서 다루었던 유태인 관련 기념시설도 전쟁의 기억과 직접 연결된다. 그러나 수많은 독일인들 역시 전쟁 와중에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가해자라는 이유로 드러내놓고 추모하는 것을 자제해 왔던 독일인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노이에바헤와 콜비츠

한국 민중미술 특히 판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콜비츠의 목탄 작품
▲ 콜비츠 작품 한국 민중미술 특히 판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콜비츠의 목탄 작품
ⓒ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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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아마도 노이에바헤가 될 것이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왕의 경비초소로 쓰인 이 건물은 동독 시절 '파시즘과 군국주의 희생자 기념관'으로 바뀌었고, 통일 이후에는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독일의 상징 공간이 되었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이곳을 찾아 공식 헌화를 하기도 했다.

작은 공간에 영감이 가득차 있다.
▲ 노이에바헤 작은 공간에 영감이 가득차 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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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가의 중심도로인 운터 덴 린덴에 위치한 노이에바헤는 독일 근세건축의 거장인 칼 프리드리히 싱켈이 지은 고전주의 형식의 석조 건축물이다.

통일 이후 이 곳은 모든 번잡함을 벗어버리고, 케테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들을 감싼 어머니'라는 피에타상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전쟁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이곳은 작지만 영감이 가득 찬 곳이다.

텅 빈 공간 중앙에 놓인 피에타상,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천장이 방문자의 옷깃을 절로 여미게 만드는 노이에바헤는 추모를 예술로 형상화할 때 시도할 수 있는 훌륭한 양식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독일인이 자신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은 아무리 높은 상징성과 예술성을 지닌다 해도 유태인 기념공간이나 추모공간만큼 크지는 않다. 이것이 그들의 방식이 아닐까.

자세히 보면 콜비츠의 얼굴을 하고 있다
▲ 피에타상 자세히 보면 콜비츠의 얼굴을 하고 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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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고 작품 속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 콜비츠 자화상 그녀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고 작품 속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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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바헤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케테 콜비츠다.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콜비츠는 위대한 화가인 동시에 1차대전에서 아들을 잃고 2차대전에서 손자를 잃은 어머니이며 할머니이기도 하다.

민중을 담은 예술, 진보적인 활동가로 평생을 보낸 콜비츠의 삶은 그 자체가 노이에바헤의 상징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권위주위 체제 하에서 뜨거운 울림을 담았던 80년대 우리 민중미술계의 판화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콜비츠의 작품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민중미술계열 작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의 작가들에게 콜비츠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유리 안에 흰색의 빈 책꽃이가 놓여있다
▲ 베벨광장의 기념물 유리 안에 흰색의 빈 책꽃이가 놓여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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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관련해서는 노이에바헤 길 건너편 베벨 광장도 매우 특별한 곳이다. 이 곳에는 히틀러 시절 이곳에서 일어난 소위 불온서적을 불태운 '독일판 분서갱유'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특별한 기념물이 있다.

넓은 광장 가운데 폭 1m 가량의 유리 덮개가 있고, 그 밑에 밝은 지하 공간이 있다. 내부에는 흰색의 텅 빈 서가가 이성과 기억을 학살하고자 했던 한 때의 사건을 말없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앞 동판에 새겨 있는 시인 하이네의 글이 인상적이다.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그는 결국 인류도 태우게 된다.

통일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상징, 동독 정치범 수용소

수용소 내부 모습
▲ 슈타지 수용소 수용소 내부 모습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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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통일. 독일 통일은 공식적으로는 1990년 10월 3일이지만 실제로는 1년 전인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동서를 가르던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은 자유총선거를 주장하며 운집한 200만 동독 주민들의 민주화시위를 통해 그 최후를 맞게 된다. 통제 불능의 위기상황에 빠진 동독정부가 11월 9일 자유통행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시 뉴스에서 망치나 곡괭이로 장벽을 부수며 환호하던 독일인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느꼈던 부러움 그리고 가슴 한편에서 치오르던 씁쓸함이란…. 아무튼 그 후로 한반도는 2차대전이 남긴 분단의 상처를 지닌 단 하나의 땅이 되었다.

통일 이후 독일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분단의 기억을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게 된다. 대표적인 곳은 동베를린에 있던 정치범 수용소이다. 이 곳은 1938년에 만들어졌는데 처음부터 수용소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수감자들이 사용하던 방
▲ 독방 내부 수감자들이 사용하던 방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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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까지는 전쟁 와중에 굶주리는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무료 급식소로 기능했다. 그러다 1945년 독일이 패전한 후 베를린이 4개국에 분할 점령되면서 점령지마다 전범 수용소를 두었는데, 이곳은 소련이 점령한 동베를린 지역이어서 1945년 5월부터 1946년 9월까지 소련군이 운영하는 전범수용소가 되었다.
  
그 뒤 소련정보기관이 운영하다 1951년 동독의 국가보위부가 인수해서 통일될 때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기능했다.

독일 통일 이후에는 한동안 방치되다가 1996년 기념시설로 남기기로 결정해서 현재는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역사기념관이 되었다.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운영하던 이 곳에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가려던 사람들을 비롯해 소위 불순분자, 혹은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리 나라의 서대문 형무소를 떠올리면 되는데, 수용자들이 처한 여건은 서대문보다 더 열악했다.

운동장이나 운동장이 없던 수감자들은 10평 남짓한 이 공간을 걸으며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 지하 산책공간 운동장이나 운동장이 없던 수감자들은 10평 남짓한 이 공간을 걸으며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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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 곳에 수감되었다는 자원봉사자의 열정적인 설명은 듣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다. 한줌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방, 자해를 막기 위해 사방에 고무를 붙인 방, 일상적인 폭력, 상호(다중) 감시, 강제노역, 수용자들끼리 절대 마주칠 수 없도록 한 공간 배치와 운영 방식, 운동장조차 없어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그것도 한 사람씩만 거닐 수 있던 지하 공간 등은 차마 형언하기 어렵다.

바로 맞은 편에는 도청이나 '도촬'(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모습을 몰래 촬영하는 일) 등 스파이들을 위한 장치를 개발하는 곳이 있다. 여성의 브래지어를 이용한 카메라 등 우수한 성능의 첩보장비를 개발한 어느 여성이 영웅 칭호를 받았다는 설명이 따른다.

동독 시절 이 지역은 수용소를 포함하는 일종의 억압과 감시의 복합공간이었다. 인근 일대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통제지역인 이곳에 일반인이 접근하려면 그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당시 수용자들이 철망을 통해 올려다봐야했던 10평짜리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타락한 계급타파의 이상에 회한이 밀려온다.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서글픔을 차마 누르기 어려움은….

덧붙이는 글 | 김종철 기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장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성취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민주주의전당' 건립을 추진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기념, #과거청산,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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