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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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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숙
 

지난 5월 끝자락에 개성공단과 북한문화유적을 탐방했다. <한겨레신문> 20주년을 기념하여 잠시 리포터로 일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나로서는 아주 특별한 여행이었고, 또 그곳이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더 그러했다.

 

개성은 500년 고려 역사가 살아있는 역사문화유적의 도시다. 내가 살고 있는 대전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2시간이 걸리는데, 서울에서 개성은 불과 7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서울에서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가장 가까운 북측 도시가 개성이다.

 

서울에서 새벽 5시부터 움직여 오전 7시, 집결지인 도라산에 도착했다. 8시 즈음해서 경의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에서 발권과 출경수속을 밟고 관광버스에 올랐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시'라는 이정표가 보이는 순간 가슴 한켠이 싸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평양은 얼마나 멀까? 반세기도 더 되는 세월, 이산가족을 그리워하는 친정아버지 모습이 겹쳤다. 

 

현대아산 관광버스에 올랐다. 출발하기 전에 북측 안내원 둘이 버스에 함께 탑승했다. 한 사람은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그곳에 얽혀있는 전설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개성공단을 거쳐 '개성시 통일거리'를 지나면서 북측안내원은 새벽부터 움직이느라 졸고 있는 관광객들에게 '찔레꽃'과 '나의 살던 고향은'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를 치자 안내원은 "노래를 부르니 활짝 웃으십니다"라고 말했다.   

 

 

 

송도삼절(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의 하나인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중 하나다. 박연폭포 주변으로 우거진 녹음이 볼 만하지만, 물이 말라 물줄기는 가냘펐다. 박연은 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의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서 생긴 못이며 이 박연에 담겼다가 떨어지는 것이 박연폭포라고 한다. 폭포 위로 구름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폭포는 맑은 가을하늘을 이고 있는 것 같았다. 

 

관음사 가는 길에는 우리나라에서 약초로 쓰이는 목단꽃이 활짝 피었다. 꽃 속에 꽃이 있는 듯 탐스럽게 핀 목단을 사진에 담느라 사람들은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댔다. 관음사는 고려 광종 21년(970년) 처음 세워졌고, 이후 여러 차례 중주를 거쳤다. 한모금을 마시면 10년씩 젊어진다는 관음사 약수터에 많은 이들이 줄지어 서서 물을 받았다. 그냥 작은 박바가지로 한 모금 떠먹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다.

 

점심을 먹기 전, 박연명승지 안내도 계단에서 몇몇 사람들은 위생소(화장실)를 다녀오기도 했고 안내원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었다. 개성 13첩 반상으로 차려진 화려한 개성음식은 놋으로 만든 반상기에 담아 정갈하고 담백했다. 싸리버섯 무침과 약과는 특별히 맛있었다.

 

밥을 먹고 나오자, 식당 근처에 있는 민속여관의 가지런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통 기와집을 개조한 민속여관 아래에는 실개천이 흐르는 산책로가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길을 따라 내려갔다. 매점은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숭양서원을 안내해 주는 북측 여성안내원은 한복을 곱게 입고 나팔처럼 생긴 마이크를 어깨에 멨다. 숭양서원은 고려의 학자인 정몽주가 살던 집터에 문충당이란 이름으로 세워져 정몽주와 서경덕의 위패를 모셨다가 1575년 선조 8년에 '숭양'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숭양서원은 임진왜란 이전의 목조건물로 서원 건축양식의 전형적인 배치와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죽교에 이르자 사람들은 정몽주가 흘린 붉은 피를 기대했는지 "돌바닥에 핏자국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다가 그의 아들 이방원에게 철퇴를 맞아 숨진 곳이 '선죽교'다. 본래 이름은 '선지교' 였으나 정몽주가 살해 당한 뒤 그의 선혈이 얼룩진 자리에 대나무가 피어났다고 해서 '선죽교(善竹橋)'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죽교의 선죽교비는 한석봉이 썼다고 한다.

 

표충각에 있는 표충비는 정몽주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조선의 임금인 영조와 고종이 각각 세웠다. 암수 거북이 위에 새겨진 표충비는 예로부터 자식을 낳는데 효험이 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하여 관광객들이 한 번씩 만지고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거북이 코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조선시대 성균관과 구분하기 위해 '고려 성균관'으로 부르고 있는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고려 성균관'은 1988년부터 고려시대 유물을 한데 모은 고려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고려박물관 야외에 설치된 석등도 볼만하다.

 

하루 일정으로 박연폭포와 관음사, 숭양서원, 선죽교, 고려박물관, 개성공업지구를 돌아보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 마치 먼 나라를 다녀 온 것 같았다. 버스가 이동하면서부터는 사진촬영이 안 되고 관광지에서는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관광지 사진만 남았지만, 그 틈새로 입력된 기억은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고 써 있는 글을 보았다. 남과 북은 너무 가깝고 너무 멀다. 그곳에 우리이웃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친근하다. 붉은 아까시 꽃이 바람에 떨어지고 찔레꽃이 하얗게 핀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언니 같고 동생, 조카들 같다.

 

개성시 '해선동'이라는 동네는 그 이름이 3·8선이 풀어졌다는 의미와 통일 염원의 뜻이 담겨있다고 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남북이 함께 어우러져 개성공단에 200여개 공장용지가 분양되어 제품생산과 공장건축이 진행 중이다. 남과 북을 오가는 우리의 걸음들이 통일을 염원하고 다져지는 길로 점점 가깝게 이어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태그:#개성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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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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