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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형상을 밟으면서 유태인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 낙엽 얼굴형상을 밟으면서 유태인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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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역사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현재를 통해 재구성된 기억이라고 일컬어진다. 역사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 혹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며, 때로는 기억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기억을 흐리게 하며, 가끔은 기억의 근거 자체를 소멸시킨다.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가 기록만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기억은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되살리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보존되거나 복원된 시공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는 기억을 해석하는 혹은 해석된 기억과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 전체를 기념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기에 몇 해 전부터 기념 공간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수많은 기념 공간이 자리하고 있는 유럽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된 것도 이같은 연유에 기인한다.

지난해 11월 보름 동안 다녀온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 번에 나뉘어 기술될 이 글은 특정 기념 공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분석이나 건축의 특성 등에 대한 기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글쓴이가 찾아봤던 기억의 공간 속에서 느낀 감회를 풀어 놓음으로써 감성적 공감을 함께 나누는데 그 뜻이 있다.

그럼에도 부족한 글을 통해 과거를 둘러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들이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과연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작은 계기나마 될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기억, 그리고 장소-독일의 유태인 기념시설을 둘러본다.  <기자 주>

관 모양의 시멘트 구조물이 늘어서 있다
▲ 유태인기념관 외부 전경 관 모양의 시멘트 구조물이 늘어서 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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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 두배 넓이를 관으로 꾸민 베를린 유태인기념관

독일은 전국 방방곡곡마다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 산재해 있다.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유태인 관련 기념 시설인데 외부인의 눈으로 보자면 너무 많다 싶을 정도이다. 그 중에서 독일 연방의회 앞에 있는 유태인기념관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곳이다.

이 곳은 과거 나찌 시절 총독부 건물이 있던 곳이라는 점에서 장소성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독일연방의회 바로 앞이라, 베를린시로 보자면 요지 중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이같은 곳에 대규모 역사기념공간을 그것도 이미 전국 각지에 많이 들어서 있는 유태인추모 공간을 만들겠다는 발상이 과연 독일인답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곳은 역사적 의의나 장소성뿐만 아니라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매우 특이하다. 지상의 기념물은 수백 개의 관이 놓여 있는 형상을 띄고 있어서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를 만드는 비용이 600억원 가량이 들었다는데 한국이었다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기념물의 형상 때문에도 반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전체 면적은 축구장 두 개 정도의 규모. 여기에 관이 가득 차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비참했던 역사가 절로 느껴지는 듯하다. 바닥 면적은 비슷하나 높이는 제각각인 관 사이로 걸어다니게 되어 있어서 중간에 들어서면 누워있는 관과 서 있는 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꼴이 된다.

지하 공간의 특성을 살려 어둠 가운데 조명을 잘 활용하고 있다
▲ 유태인기념관 지하전시장 지하 공간의 특성을 살려 어둠 가운데 조명을 잘 활용하고 있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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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물을 건립하고자 하는 제안은 90년대 초 의회를 통과했다. 처음 제안된 건립안은 기록이 남아있는 모든 유태인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벽면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 2차대전 때 학살당한 희생자가 유태인에 국한되지 않는데 유태인만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었고, 당시 콜 수상은 이를 이유로 초기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콜 수상이 거부한 근본적인 이유는 직접적인 표현방식, 즉 치부를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거부감에 있었다는 평이다. 그래서 여러 논의를 거치는 가운데 상징성은 지니지만 구체성을 배제한 관 모양을 띈 조형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찌 시절 총독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는 역사적 상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소에 기념물을 설치한 뜻은 높이 살 수 있지만, 실현 과정에서 정치적 입김을 완전히 배재하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고나 할까.

티타늄 소재의 외관에 불규칙한 창들로 기이한 형상을 보여준다
▲ 유태인박물관 외부 티타늄 소재의 외관에 불규칙한 창들로 기이한 형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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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에 대한 정확한 기억이 아니라 기억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에 따라 다시 조합된 기억이라는 사실은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전시관은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들어가면서 특이한 점은 최근 다시 늘어나고 있는 인종주의와 반유대정서로 인한 테러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공항을 통과하는 듯한 절차를 거친다는 것. 금속탐지기를 거쳐야 하고 가방 안을 뒤지기도 한다.

이런 사정은 다른 유태인 관련 시설들도 비슷하다.

전시 공간은 최근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법과 구성에 있어 상당히 잘 만들어진 곳이란 느낌을 준다.

지하라는 특성을 이용해 전반적으로 어두운 공간에 빛과 조명을 최대한 이용,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전시된 콘텐츠에 집중할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유태인의 한과 슬픔이 느껴지는, 베를린 유태인박물관

위의 유태인기념관이 희생자 추모공간으로 만들어졌다면 유태인박물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태인의 역사와 삶을 보여주는 곳이다.

원래 있던 오래된 박물관에 붙여서 옆에 독특한 양식의 현대식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유태인 출신인 설계자는 이 작품 하나로 세계적인 건축가 반열에 들어가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날카로운 직선이 불규칙적으로 드러난 외관. 벽면 소재 또한 일반 건축에 잘 쓰이지 않는 티타늄 합금이어서 고풍스러운 옆 건물과 대조된다.

온갖 모양으로 뚫어놓은 창들도 독특하다. 이 창은 안에서 보면 온갖 광선들이 제 각각의 모습으로 실내를 비추어 햇빛에 따라 내부 모습을 바꾸고 밖을 내다보는 조망 또한 창문마다 다른 모양을 만들어낸다.

외관만큼이나 내부 역시 상식을 넘어선다. 무엇보다 평탄하거나 규칙적인 공간이 전혀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모든 바닥은 미세하게나마 기울어져 있고, 통로는 좀 더 심하게 뒤틀어 놓았다. 이런 특징 때문에 완공된 후 처음 2년 동안은 아무런 내부 콘텐츠 없이 건물 자체를 볼거리로 제공했다는 일화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불규칙한 내부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 유태인박물관 내부 불규칙한 내부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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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역사박물관답게 유태인의 희생을 추모하는 개념도 있지만 유태인의 역사와 위대함을 보여주는 내용도 많다. 유태인 가운데는 유명한 인물이 많아 이들의 사진, 소장품, 자료들도 볼 수 있으며 상당한 양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낙엽이란 작품과 추념의 방이라 할 수 있다.

낙엽은 주철로 만든 얼굴 조각들을 바닥에 늘어놓은 방이다. 밟고 다니도록 되어 있어서 걸을 때 부딪치는 쇳소리를 듣게 되는데, 유태인의 한과 슬픔이 귓가에 울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추념의 방은 높은 천정의 컴컴한 방에 아무런 장치 없이 한 구석에서 어렴풋한 빛이 비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들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묵상에 빠져들게 한다.

추념의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는 구조
▲ 추념의 방 추념의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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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을 둘러보면서 대부분 반듯하고 거대하며, 화강암 외벽으로 장식되어 있는 국내의 기념관과 박물관을 떠올리게 된다. 역사를 담은 공간이 좀 더 생각할 수 있는 공간, 예술적인 가치나 건축학적 가치를 지닌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좀 더 많이 고민하고 연구해야겠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대량학살과 생체실험이 이뤄진 작센하우젠 유태인수용소

쇠창살로 만들어진 문에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 수용소 정문 쇠창살로 만들어진 문에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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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는 유태인수용소를 주로 독일 밖에 설치하였는데 가장 악명 높은 곳은 대규모 가스실을 운영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수용소이다. 한편 1936년 경부터는 중부 독일의 부켄발트와 남부 독일의 다카우 등을 포함하는 독일 내의 수용소 체계를 만들게 된다. 작센하우젠 수용소도 이 체계의 하나로 북부 독일에 만들어졌는데 베를린 인근에 있어서 비교적 찾아보기 쉽다.

이 수용소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나찌의 인종정책이나 전쟁에 반대한 독일내의 정치범들 그리고 집시, 동성애자 등을 수용 학살한 곳이며, 다카우수용소와 함께 생체실험을 행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2차대전 막바지에는 2만~3만 5천명 가량을 수용했는데, 패전할 때까지 수용했던 20만 명 중 10만 명이 대부분 질병이나 강제노동으로 사망하거나 처형되었다. 히틀러 암살계획을 꾸미다 발각되어 처형된 폰 회퍼 목사도 여기에 수용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나찌의 대량학살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 짚어야할 대목이 있다. 희생자가 유태인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흔히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2차대전에서 사망한 희생자는 대략 500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되는데, 그 중 소련인이 2600만 명으로 가장 많다. 상당수 피학살자도 소련인들과 폴란드 등 독일이 점령했던 나라의 국민들이었다. 흔히 집시로 불리는 로마(스스로는 ROMA 또는 ROM로 부른다) 희생자 역시 대략 6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유태인 희생자와 맞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밖에의 소수인종, 장애인, 동성애자, 정치범 등 수많은 희생자가 존재한다. 학살과 희생의 한 측면만이 부각된 것은 대량학살을 뜻하는 홀로코스트란 단어가 유태인 학살이란 배타적인 뜻으로 독점된 것과도 연결된다. 그 이면에는 전후의 지배질서가 반영되어 있고, 이는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근저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이 곳에서 생채실험이 행해졌다
▲ 병원 건물 이 곳에서 생채실험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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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창살에는 다른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ARBEIT MACHT FREI)'는 글귀가 있다. 이 곳에서는 생체실험을 하고 위조지폐를 제조했다. 상대국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책으로 1942년 인쇄업자와 사진사 출신 유대인 기술자 30명을 조직해 총 6억 파운드의 위조지폐와 우표 등이 만들어졌다. 다행히 전쟁 후반 독일이 제공권을 상실하면서 공중살포계획은 무산됐지만 일부는 육로를 통해 유럽 전역에 유통되었다고 한다.

한편 나찌는 여기서의 생채실험을 통해 D-IX라는 약물을 개발했다. 이 약은 전투원에게  '무제한의 전투력'을 부여하기 위해 개발한 일종의 마약인데, 1944년 11월 최초의 투약실험이 이루어졌다. 실험 대상자들은 중량 20kg의 배낭을 메고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90km를 주파할 수 있었다는데 대부분은 실험 후 탈진해 처형장 행이 되어야 했다.

베를린 반제기념관

조용한 호숫가의 저택이다
▲ 반제기념관 조용한 호숫가의 저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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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Anti) 제국주의가 아니라 1942년 1월 20일에 반제가(街)의 한 저택에서 열린 회의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기념관이다.

반제회의는 유태 인종을 유럽에서 완전히 말살하려는 이른바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를 결정한 회의이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악명 높은 인물들 가운데 친위대 사령관 히믈러를 포함한 대부분은 전후 전범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은 도망쳐서 세계 곳곳을 전전하다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의 모사드 요원에 체포되어 1962년 사형에 처해졌다. 모사드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사건이기도 하지만 반민족, 반인륜 범죄자는 끝까지 추적해서 반드시 처벌한다는 전범적인 사건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종철 기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장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성취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민주주의전당' 건립을 추진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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