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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봉우리가 닳아 없어진 묘가 눈에 들어온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묘 위로 올라갈 것이다. 얼마나 자손들의 영달이 소중했으면 하는 생각에 가슴을 밀고 차오르는 연민의 정이 양 눈을 통해 공중으로 흩어진다.

 

한쪽에 자리 잡은 우리는 옥수수 빵과 감자전으로 점심 판을 벌였으나 팍팍하여 먹히질 않는다. 억지로 우겨 넣는 듯한 점심을 마치고 그늘에 누우니 산성터와 정상의 묘지에 대한 상념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난다.

 

2시 40분, 점심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한 나와 집사람은 청옥산을 향해 출발한다. 등반 출발 후 5시간 20분이 지나고 있다. 두타산 정상을 지나 청옥산 쪽으로 접어들자 가끔 보이던 등산객들이 뚝 끊어진다.

 

7.8km의 긴 능선 위에는 우리밖에 없는 듯하다. 3시 35분 용추폭포로 하산하는 갈림길인 박달령에 도착한다. 이곳을 지나치면 아직도 3.0km 남은 청옥산 정상까지 가야 한다. 물은 적은 병으로 한 병 남았다. 계획대로 산행하자는 나의 몸짓에 집사람은 역시 몸짓으로 대답한다. 바람은 거의 없지만 가끔 얼굴에 와 닿는 고산의 냉기는 더 없이 상쾌한 청량제이다.

 

가끔 나무 사이로 보이는 전망을 즐기면서 집사람과 나는 묵묵히 청옥산을 향해 걷는다. 문바위 부근에 이르자 지금까지 능선의 마루금을 밟고 난 등산로가 능선의 8-9부로 나 있다. 주위를 볼 수 없어 직감으로 나아가다가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고 청옥산 뒤쪽에서 정상을 향해 오른다고 착각하였다.

 

뒤쪽에 있는 산이 두타산이 분명하다는 집사람과 내가 느끼는 방향이 정반대이다.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여 지도를 정치해보니 집사람 말이 맞다. 그러나 내 방향감각은 지도와 정반대이다. 지도와 일치하는 방향감각을 가지려고 노력해도 쉽게 바뀌질 않는다. 청옥산 정상에 이르러 무릉계곡 쪽을 확인하니 비로소 지도와 나의 느낌 방향이 일치한다. 새로운 경험이다.

 

출발 후 7시간 만에 청옥산 정상에 섰다. 청옥산이라 새겨진 비석 말고는 1400m 고지 정상이라 여길만한 증표가 없다. 한쪽에 설치된 통신 시설물이 을씨년스럽고 짜증난다. 나와 집사람은 두타와 청옥산이 크고 깊은 계곡, 거대한 바위 봉우리들로 수려한 모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청옥산 정산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마지막 남을 물 한 병을 마시고 하산 길로 접어든다. 하산 길의 분기점인 연칠성령까지는 3.5km, 40분의 등반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이다.

 

우리 부부는 언젠가 백두대간 종주를 시도할 계획이다. 그 때 다시 보게 될 산야이니 잘 봐두라고 하면서 언젠가 시작할 백두대간 종주에 대한 얘기로 산행의 무료함을 달래본다. 연칠성령에 이르는 40여분 산행 도중에 혼자 등반을 즐기는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고적대와 무릉계곡으로 갈리는 지점인 연칠성령에 이르자 무릉계곡 12.3km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시간은 5시 10분이다. 이제 해가 있는 8시까지 3시간 안에 매표소에 이르면 된다는 생각에 약간 여유가 생겼다.

 

연칠성령에 쌓아놓은 석탑 앞에서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원을 빌어본다. "나와 집사람이 살아있는 날까지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조금 쉬다보니 집사람은 마음이 급해진 것 같다. 산은 어둠이 일찍 오고 특히 어두운 숲속은 더욱 그렇다. 앞서서 부지런히 하산을 서두른다. 이제 피곤이나 지쳤다는 말이 필요 없다. 무사한 하산을 위해 한 방울의 마지막 힘까지 써야할 판이다.

 

부지런한 하산한 덕분에 6시 5분이 되자 능선의 마지막이요 계곡의 시작점인 칠성폭포에 이르렀다. 심한 가뭄 때문인지 물줄기는 가늘지만 맑은 계곡물이다. 집사람과 나는 그동안 충분하게 마시지 못한 물을 맘껏 마시고 옷 위로 물을 끼얹는 여유까지 부렸다.

 

이제 8.3km 거리를 2시간 안에 도착하면 계획대로 등반을 마치는 것이 된다. 칠성폭포-대피소-문간재에 이르는 코스는 화강암의 넓고 깨끗한 암반위로 계곡이 연결되고 경사가 심하지 않아 거의 다 하산한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로 걷다보니 8.3km 하산길이 그렇게도 멀고 먼지...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이어진다. 도무지 끝이 없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즈음에야 삼화사에 도착하였다. 7시 40분이다. 11시간 동안에 33km 에 이르는 먼 장정의 등반을 무사히 마쳤다. 집사람과 나는 서로의 손을 잡으며 축하인사를 교환하였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등반하였다고 누가 우리에게 상을 주는 것도 또 무엇이 바꿔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해낸 일이 자랑스럽고 대견하여 우리 자신들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첫째, 금난정 앞 무릉반석 위에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말릴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바위는 희고 깨끗했으며 물을 따뜻했고 저녁때 바람은 살랑거렸다.

 

둘째, 금난정 앞 양사헌 석각 의미를 새겨볼 수 있는 영광을 받았다.

 

무릉선원(武陵仙源) ; 도교(신선)사상,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염원과 무소유 지향의 유일성

중대천석(中臺泉石) ; 불교 또는 유교사상,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통일을 추구

두타동천(頭陀洞天) ; 불교사상,

                             번뇌의 티끌을 없애어 이 땅에 불교정토를 이루고자 하는 염원

 

셋째,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묵호항으로 달려가 놀래미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먹고 마실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넷째, 연인들의 속삭임 같은 파도소리와 코끝에서 살랑거리는 바다 바람 그리고 흔들거리는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과 함께  잠들 수 있는 축복을 부상으로 받았다.


태그:#등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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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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