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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 내 우산 못 봤어?"

"아이고, 너 우산 또 잃어버렸니? 오늘은 그냥 신발장 옆에 있는 거 가져가."

"엄마, 검정 스타킹 못 봤어?"

"그걸 왜 지금 찾니? 미리미리 좀 챙겨놓지. 넌 꼭 아침에 정신없이 찾고 그러더라."

"몰라! 나 지금 바쁘단 말이야. 잘못하면 지각이야!"

"참나, 화장대 오른쪽 서랍에 있으니까 일단은 그거 신어."

 

아침마다 우리집 엄마와 딸은 전쟁을 벌인다

 

오늘도 우리 집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나치게 꼼꼼한 우리 엄마 서문순 여사와 덤벙대는 나의 아침은 항상 조용할 날이 없다.

 

나는 옛날부터 집에서 단 한 번도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내가 뭐든지 칠칠맞게 잘 흘리고 잊어 버리기 일쑤인 반면 엄마는 항상 완벽하게 챙겨두기 때문이다.

 

부엌 찬장에는 항상 엄마의 비장의 무기가 있다. 설탕이든 간장이든 동생이 좋아하는 케첩이든 뭐든지 떨어졌다 싶어도 찬장에는 항상 하나씩 더 숨겨져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필요할 때 설탕이 없어 당황한 적이 없으니 엄마의 꼼꼼함을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까.

 

엄마는 언제나 부족한 것을 싫어한다. 차고 넘치면 모를까 필요한 것들이 제때 준비되지 않으면 초조해한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에 비해 나는 당장 필요할 때 물건을 찾기에 급급하기 때문에 항상 잔소리 공격의 대상이 된다.

 

"미리미리 좀 챙겨두라니까. 너는 왜 그렇게 꼭 닥쳐야만 걱정을 하니?"

"아 몰라, 내가 뭐 필요할 줄 알았나?"

 

속이 상한 내가 방안에 콕 박혀 있으면 엄마는 툴툴거리면서도 내가 그렇게 찾아도 없던 것을 짠하고 손에 들고 나타난다. 어느새 화가 풀린 내가 반쯤은 신기해서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엄마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저번에 사뒀어".

 

"엄마, 왜 엄마는 물건을 미리 사둬?"

"글쎄, 엄마는 뭔가 필요할 때 없으면 화가 나고 불안하고 그러더라. 미리 사두면 재료가 떨어져도 금방 꺼내서 쓸 수 있으니까 좋잖아."

"옛날부터 그랬어?"

"아니, 엄마도 옛날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사두고 있더라고."

 

엄마는 재료가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이 싫어서 그냥 미리미리 다음을 준비해 둔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가 워낙 꼼꼼한 성격인 것을 잘 아는지라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나는 며칠 뒤 방문한 이모에게서 엄마의 옛 이야기를 듣고 '꼼꼼함'이 생겨난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모와 삼촌들의 '엄마'였던 우리 엄마

 

"네 엄마가 얼마나 부지런했는지 알아? 새벽부터 일어나서 식구들 일어나기 전에 앞마당부터 대문 앞길까지 매일 쓸어 댔어."

"어머 얘는, 내가 부지런했던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게을렀던 거야. 하긴, 조금 유난스럽긴 했나 보다. 동네 어르신들도 우리집 앞에는 풀 한 포기 못자랄 것 같다고 했었으니까."

 

이모는 나에게 엄마가 일찍부터 철 들었던 여자애였다고 했다. 한 살 터울인 오라버니가 동네 제일의 개구쟁이여서 맏딸인 엄마는 일찍부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10살 때부턴 본격적으로 외할머니 대신 이모와 외삼촌들을 챙기고 젖먹이 막내이모를 업어서 키웠다고 한다.

 

외갓집은 바닷가 옆 작은 마을에 있었다. 넉넉한 형편도 아니어서 항상 모든 것이 부족했고 자연히 맏딸인 엄마는 동생들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았다. 형제는 다섯인데 계란이 4개뿐이면 엄마 몫은 으레 없었다. 새 연필이 4자루뿐이면 언제나 몽당연필은 엄마 차지가 되었다.

 

"이모, 그럼 엄마는 뭔가 갖고 싶어도 늘 참았던 거야?"

"응. 아무래도 그땐 다들 가난했고, 네 엄마는 첫째라서 더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지금 같으면 나도 한번쯤은 언니한테 양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왜 내 욕심만 채웠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진짜 갖고 싶어 했던 건 뭐였어?"

"이모가 볼 때 언니는 별로 욕심이 없었어. 아마 욕심을 낼 수 없었던 거겠지. 언니는 그래도 불평 안 했어. 언제나 양보했지. 근데 가끔 언니도 조금은 화가 났던 거야. 줄줄이 동생들 때문에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자기도 갖고 싶었겠지. 왜 안 그렇겠니?"

 

부족한 살림에 욕심을 채우자고 자기 몫을 따로 챙겨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신 엄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항상 조금 더 사두는 것. 그것이 엄마의 방법이었다. 계란이 4개일 땐 엄마가 양보해야 하지만 남은 계란이 한두 개쯤 있다면 엄마도 계란 1개를 당연하게 차지할 수 있었다.

 

새 연필이 4자루면 몽당연필이나 차지하겠지만 여분의 연필이 있다면 엄마도 새 연필을 가질 수 있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골똘히 생각해 낸 방법이 오랫동안 굳고 굳어져 지금의 꼼꼼한 성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내일 필요한 건 오늘 저녁에 챙겨 둬야지. 너 만날 그렇게 잊어버려서 앞으로 어떻게 살래."

"미리미리 좀 사다 놔. 필요할 때 갑자기 없다고 하지 말고."

 

서 여사님, 여유 좀 가지고 삽시다

 

그동안 그냥 듣기 싫은 잔소리로 치부해 버렸던 말들이 갑자기 생각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필요하면 사면 되지 뭐"라고 쉽게 되받아쳤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 옛날 뭐든지 조금씩 더 준비해 두던 작은 소녀가 생각나면서 뭐든지 필요할 때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과제 좀 미리미리 해둬. 밤마다 그거 하느라 밤새지 말고."

"열쇠 잃어버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찾았니?"

"통장 필요하다며 그건 만들었니?"

 

오늘 하루도 어김없이 엄마의 잔소리로 시작한다. 나는 꼼꼼한 엄마 덕분에 여전히 걱정 없이 살고 있지만 엄마 눈엔 태평한 내가 영 못마땅해 보이시나 보다. 엄마의 성격이 꼼꼼한 이유를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가슴 한구석이 짠해지지만 나는 언제나 웃으면서 엄마에게 대답한다.

 

"어이, 서 여사님! 여유 좀 갖고 삽시다. 너무 빡빡하면 이 세상 너무 재미없잖아요."

 

너무 다른 엄마와 나. 완벽한 엄마와 부족한 딸의 전쟁이 매일매일 벌어지지만 엄마와 내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존재란 생각에 항상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는 엄마가 미처 갖지 못한 여유로움을 선물하고, 칠칠치 못한 나를 엄마가 도와주면서 사는 게 정말 행복하다. 엄마와 나의 행복한 전쟁은 앞으로도 쭉 계속되겠지.

덧붙이는 글 | <가족 인터뷰> 기사공모


태그:#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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