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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선(84)옹은 '알렉산더 리'라고 불리는 한국 최초의 마술사다.
 이흥선(84)옹은 '알렉산더 리'라고 불리는 한국 최초의 마술사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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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할아버지인 이흥선(84)옹은 마술사다. 자랑을 덧붙이자면 '한국 최초'의 마술사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외할아버지 곁에서 마술을 많이 봐 왔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입 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고, 가슴 속에서 비둘기들이 날아오르는 일에도 아주 익숙하다.

'마술계의 에디슨'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소가 두 곳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다섯 살이었을 무렵의 롯데월드다. 그 당시 할아버지는 롯데월드에서 마술을 했고, 나는 할아버지가 계신 롯데월드 분장실을 자주 방문하곤 했다.

분장실에 들어가면,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이제는 할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자주색 깃털이 달린 은색 터번에 커다란 귀걸이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공연을 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를 맞이하기 바쁘게 곧 무대로 나갈 준비를 마쳐야만 했다.

할아버지가 무대로 나가면,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공연장에 가서 진기한 마술쇼를 구경했다. 하지만 공연할 때의 할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지는 묘기를 펼치면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계신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전문 마술사였다.      

기계 체조를 하던 이흥선옹의 젊었을 적 사진. 왼팔에 문신이 새겨져 있다.
 기계 체조를 하던 이흥선옹의 젊었을 적 사진. 왼팔에 문신이 새겨져 있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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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할아버지는 기계 체조를 하셨단다. 옛 사진 속에는 청년 시절 근육이 울퉁불퉁한 할아버지가 서 있다. 왼쪽 팔에는 자신을 꼭 빼닮은 남자의 문신을 새기고서. 기계 체조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를 기념하고자 한 것이란다. 팔순을 넘긴 할아버지의 모습은 젊은 시절과 크게 다르지만, 문신은 그대로 남아 할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증명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대중매체가 등장하기 전 여러 서커스단을 전전하며 다양한 차력과 묘기를 펼쳤다. 여러 개의 막대로 접시를 돌리고, 불이 붙은 루프 사이를 통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도 고달픔은 있었다. 눈이나 비가 와서 사람들이 서커스를 보지 않아 돈을 벌지 못하면, 서커스 단원들은 죽을 쑤어먹거나 아예 끼니를 거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는 그 아픔이 할아버지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알고 지내던 엽청강('미스터 엑스')이라 불리는 대만 마술사가 마술을 권했고, 이것이 할아버지의 삶을 180도 바꾸어놓았다. 그는 나이가 들면 건강하던 몸도 언젠가는 노쇠해지고, 결국 차력을 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 말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고, 결국 1943년부터 대만 마술사로에게 약 6개월간의 마술 수련을 받았다.

이흥선옹은 여러 서커스단에서 다양한 차력과 묘기를 펼쳤다.
 이흥선옹은 여러 서커스단에서 다양한 차력과 묘기를 펼쳤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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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할아버지는 마술사로서 '알렉산더 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공연을 본 가수 고 김정구씨가 '알렉산더 대왕처럼 한국 마술계의 대왕'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수련 이후에도 꾸준히 마술 연구를 했다.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만큼 할아버지의 앞에는 개척되어야 할 척박한 땅뿐이었다. 그 당시는 보수적인 50년대, 마술사로 나섰다가는 길거리의 '딴따라'나 '굿쟁이(구경거리인 사람)' 취급을 받는 등 쉽사리 천대 받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힘든 건 없었어"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설마 싶어서 같은 의미의 다른 질문을 던져도 할아버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결국 나도 할아버지도 인정했다. 마술은 할아버지에게 '천직'이었다고.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줄 아니까, 더욱 힘이 나고 신이 났다"고 말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열심히 마술 공부를 했고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할아버지의 마술은 6·25시절 인민군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한번은 경찰로 일하시던 할아버지의 가족이 인민군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인민군들은 체포한 사람들을 차례대로 총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내와 딸 앞에 사람 3명이 남아 있었던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인민군 한 명이 현장으로 오더니 귓속말로 총살하던 다른 인민군에게 할아버지의 가족을 살려주라고 했던 것이다. 그 인민군은 할아버지가 비록 경찰로 일하지만, 유명한 마술사이며 인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마술로 큰 덕을 보기도 했다.       

이흥선옹은 1949년부터 마술계에 입문하여 다양한 마술을 선보였다.
 이흥선옹은 1949년부터 마술계에 입문하여 다양한 마술을 선보였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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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에 대한 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열정과 집념은 TV와 유흥업소들이 대거 등장하던 때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 최고의 마술사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마술에 대한 할아버지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열심히 연습을 해가지고 하는 마술이래서 못 따라와. 그 당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었어."

하지만 할아버지가 성공한 이유는 일반 위인전에서도 볼 수 있듯, 단순히 '열심히' 마술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객석에 앉은 아내로부터 꾸준히 조언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하는 건 구경하는 사람이 더 잘 안다. 마술사가 더 잘 알지 구경하는 사람이 더 잘 아느냐고 거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마술계의 에디슨'이었다. 약 60년 전부터 마술 연구와 더불어 자신만의 마술도구를 꾸준히 발명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단상이 시작됐다.

손으로 창조한 마술 세계

이흥선옹의 방. 그는 이곳에서 만여가지의 마술도구를 개발했다.
 이흥선옹의 방. 그는 이곳에서 만여가지의 마술도구를 개발했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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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또 다른 장소는 할아버지의 집이다. 초등학생 시절, 할아버지 집에서는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비둘기 냄새가 났다. 마당 한 구석에 비둘기가 가득 들어있는 새장이 놓여 있었는데, 하얀 비둘기들이 그 안에서 구구 거리며 소리를 냈다.

조금 시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두운 저녁, 마당에 켜놓은 작은 등 아래서 비둘기가 내는 소리는 어린 내게 은근히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매번 마당 앞 작은 방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곤 했다. 조그마한 방 안은 공구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안에서 할아버지는 '마이더스의 손'보다 더 위대한 손으로 마술도구들을 만드는 중이었다. 집 바깥과 마당에는 할아버지가 만든 크고 작은 마술 도구들이 어지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가족인 나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가끔 할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마술도구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내 앞으로 오더니 작은 마술을 선보였다. 할아버지의 손바닥 위에 놓인 천 원짜리 지폐가 스스로 접히는 것이었다. 신기했던 나는 그것을 받아 며칠 뒤 친구들에게 보여주었지만, 친구들은 금세 나의 묘기를 알아차렸다. 간단한 마술이라도 일반 사람들은 묘기를 부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술을 시작했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마술도구는 수련할 때 갖고 있던 것 뿐 다른 데서 새로 구해올 수도 없었다.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손재간이 좋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자신의 마술을 직접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마치 뉴턴이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듯, 할아버지도 물건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저것을 마술에 이용할 수 있을까' 밤낮으로 골몰했다. TV에서 유명 마술사들의 마술을 보며 할아버지 식대로 마술도구를 변형하여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의 마술도구를 만들어내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할아버지는 마술도구 재료를 구하기 위해 마포에 있는 온갖 고물상을 뒤지기도 했다. 하나의 마술도구를 완성하는 데 1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다. 그 결과 할아버지의 손을 거친 깡통 안에서는 쌀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고, 꽃병에서는 화려한 꽃이 저절로 피어났다.

할아버지가 약 60년 동안 만든 마술도구는 약 2천여 개, 자잘한 것까지 포함하면 약 만여개가 된다. 마술도구를 만드는 데 오랜 노고가 있었기에, 할아버지는 마술도구들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마술도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나에게 기쁨을 주는 만큼, 나도 마술도구들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이흥선옹이 가장 좋아하는 마술도구는 태국산 하얀 비둘기다.
 이흥선옹이 가장 좋아하는 마술도구는 태국산 하얀 비둘기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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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마술도구 중 특히 직접 기르고 있는 하얀 태국산 비둘기를 좋아한다. 비둘기들은 길들인 강아지처럼 새장 문을 열어도 나오지 않고, 주인의 말을 잘 따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새장 속의 비둘기들을 보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얘네들이 나를 알아봐서 다른 사람들 옆에는 가지도 않아."

할아버지는 다양한 마술을 하지만 그 중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비둘기 마술이란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새장 속의 비둘기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텅 빈 모자 속에서 비둘기들이 날아오르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비둘기들이 "내가 마술계의 정상에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준 보물"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마술도구 개발 능력은 외국 마술사들과 교류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마술을 가르쳐 준 대만의 엽청강, 홍콩의 리기는 할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유명 마술사들이다. 할아버지는 마술사들이 찾아오면 마술도구를 고쳐주기도 하고, 서로가 알고 있는 마술 비법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할아버지는 일곱 명의 마술사들이 터득한 마술 기술을 알고 있다. 그래서 TV에 나오는 웬만한 유명 마술사들의 마술 비법은 다 알아본다고 한다. 

마술 비법을 사람들에게 쉽게 공개하지 말았으면

알렉산더 매직 바. 1996년에 이흥선옹과 수제자들이 함께 '알렉산더 리'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더 매직 바'를 개설했다.
 알렉산더 매직 바. 1996년에 이흥선옹과 수제자들이 함께 '알렉산더 리'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더 매직 바'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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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현재 높은 연세 때문에 마술계에서 은퇴한 상태다.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어 마음이 매우 든든하다. 1996년에 할아버지는 수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더 매직 바'를 개설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외손자인 김정우씨는 차세대 마술사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할아버지는 전국에서 활동하는 마술사들의 공연을 보면 탄복을 금치 못한다.

"예전에는 깡통에 불 지르고 담뱃갑을 꺼내도 사람들이 좋아했는데, 요새는 마술사들이 많이 연구를 하는 것 같아. 세상 많이 발전했지."

하지만 현재 마술사들의 활동을 보며 아쉬운 점도 발견한다. 이제는 필요한 마술도구가 있으면 언제든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기 때문에, 마술의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다른 마술사들의 마술을 흉내 내는 것을 뛰어넘어서, 자신의 마술을 창조하는 사람이 진정한 마술사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안타까운 점은 마술 비법을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공개한다는 것이다. 특히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시청률을 위해 시청자들에게 마술을 보여주고 그 비법을 공개하는 일이 잦다. 할아버지는 시청자들이 이 방법을 통해 마술의 매력을 느끼기보다는 마술사와 경쟁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비법을 알고 나면 마술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마술 비법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마술 자체를 즐기기 바란다. 마술은 요술이 아니며 눈속임이란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니 마술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마술을 보기 보다, 마술사가 얼마나 훌륭하게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지 더 주의 깊게 봐달라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마술사'보다 '가장 마술을 사랑하는 마술사'로

마술 공연을 펼치는 이흥선옹. '한국 최초의 마술사'로 기억하기보다는, '가장 마술을 사랑하는 마술사'로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술 공연을 펼치는 이흥선옹. '한국 최초의 마술사'로 기억하기보다는, '가장 마술을 사랑하는 마술사'로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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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은퇴 후 높은 연세에도 다양한 마술 공연을 펼쳐왔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마술 실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공연비로 받는 돈으로는 양말이나 수건 등을 사서 사람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곤 했다. 할아버지는 '봉사를 하면서 또 다시 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따뜻한 마음씨를 간직하고 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여전히 건강하다. 팔순을 넘었는데도 젊은 사람보다 손놀림이 빠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마술공연을 하기에는 손놀림이 많이 느려졌다며 걱정한다. 그래서 현재는 마술대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마술 사랑을 꾸준히 표현하고 있다.

할아버지에게 언제가 가장 행복하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좋아해 주는 것.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지!"라고 말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해맑은 미소에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도전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손녀의 입장에서, 단순히 할아버지를 '한국 최초의 마술사'로 기억하기를 보다는, '가장 마술을 사랑하는 마술사'로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그:#이흥선, #알렉산더 리, #마술,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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