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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주민중항쟁 28주년이 되는 해다. <오마이뉴스>는 1980년 5·18 당시 고교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한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를 연재한다. 세월이 흘러 '고교생 시민군'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직 미흡한 상태다. <오마이뉴스>는 이 연재가 '고교생 시민군'의 활동 내용을 통해 5·18을 성찰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주>

 

비상! 계엄군이 오고 있다

 

우리들은 비상대기 상태에서 강당 마루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청했다. 비록 새우잠이라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잘 수 있었다. 밤 10시가 지나자 자원한 시민군들도 곳곳에 누워 졸고 있었다. 재남이와 나는 같은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서 잠을 깼다. 시계를 들여다 보니 새벽 2시가 조금 지났다. 다른 시민군 자원자들도 일어났다.

 

5월 27일 새벽. 이날만큼은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새벽'이라는 단어가 절망과 피비린내 나는 살상을 나타내는 단어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시민군 기동타격대 차의 엔진소리, 도청 시민군 본부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시민 동참 호소가 한데 어우러져 적막했던 광주의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오고 있습니다.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하기 위해 계엄군이 오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즉시 도청으로 모이십시오."

 

도청 건물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절규하듯 처절하게 외치는 여자 시민군의 목소리가 계속 메아리쳤다.

 

"비상! 비상!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모두 투쟁대열에 나섭시다!"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대기하던 YMCA 강당에서 금남로로 나가봤다. 기동타격대 순찰차인 군용 지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숨 가쁘게 상황이 변하고 있는 듯 기동타격대의 무전기에서는 시민군들간에 계속 대화가 오갔다. 다른 시민군 차들도 도청에서 바삐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여러분! 자원자 여러분! 모이십시오. 비상입니다."

 

우리에게 총기사용법을 가르쳤던 시민군 중대장이 외쳤다. 바싹 긴장하고 모인 우리들에게 중대장은 말을 이었다.

 

"여러분! 드디어 계엄군이 우리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 외곽을 둘러싸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모이셨겠지만, 다시 한번 결사항쟁을 다짐합시다. 어제 오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만 도청을 사수하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도청을 사수합시다."

 

중대장의 말에 장내는 숨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잠시 적막감이 감돌았다.

 

"자, 이제부터는 전에 편성한대로 분대별로 행동하십시오. 분대임무를 부여하겠습니다."

 

중대장의 한마디 한마디는 백제 최후의 오천결사대를 이끈 계백 장군의 마지막 다짐처럼 비장했다.

 

"1분대와 2분대는 백운동로터리, 3분대와 4분대는 광주공원, 5분대와 6분대는 기독교 병원, 7분대는 전대병원, 8분대는 화순가는 길목인 지원동 …."

 

이밖에 도청, 산수동 5거리 산장가는 길목, 금남로 끝인 유동 3거리 등 광주전역을 지키도록 했다.

 

재남이와 내가 속한 분대는 도청 담 안쪽에 설치된 초소를 맡았다. 계엄군과의 결전장이 될 장소였다. 시민군 지휘부는 우리 시민군 자원자 중에서 절반쯤을 도청에 배치했다. 왜냐하면 시민군 지휘부가 있는 도청을 빼앗기면 시민군의 상징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분대별로 총과 실탄을 받기 위해 광주YMCA를 나와 도청을 향했다. 당시 도청 정문 옆 수위실에는 총이, 민원실 건물 지하식당에는 실탄이 각각 보관돼 있었다.

 

분대별로 줄을 맞춰 도청을 향해 뛰는데 언제 알았는지 기자들이 취재에 열중이었다. '번쩍번쩍'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려 사진을 찍으면서 영어로 뭐라고 말하는 백인 기자, 우리 분대에 껌을 주면서 담배도 권하던 동남아인처럼 보이는 기자 등등. 이들은 시민군의 바쁜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면서 뛰었다.

 

도청을 사수하라!

 

도청 앞 분수대를 지나서 도청 정문 왼쪽에 붙어있는 수위실에 도착했다. 총과 실탄을 지급받으려는 시민군들로 붐볐다. 우리 분대원들은 수위실에서 칼빈 소총 한 정씩을 받았다. 수위실 방에는 1m 높이로 총들이 쌓여 있었다.

 

이어 도청본관 옆 건물에 있는 민원실로 이동했다. 우리들은 줄을 서서 시민군들이 민원실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의 환기창문(가로 150㎝, 세로 50㎝)을 통해 건네주는 탄창을 하나씩 받았다. 탄창에는 실탄이 세발뿐이었다. 실탄을 나눠주던 시민군은 탄창을 줄 때마다 실탄이 부족한 만큼 아껴 쓰라고 당부했다. 민원실 지하는 식당으로 쓰던 곳이었는데,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뒤에는 각종 탄약을 보관한 탄약고였다.

 

배운 대로 칼빈 소총에 탄창을 꽂아 실탄을 장전했다. 이어서 자물쇠를 풀고 당기면 발사되도록 해두었다. 우리 분대의 실탄 분배가 끝났을 때, 도청시민군 지휘부 사람이 우리를 각각 4명, 5명으로 나눠 도청 앞 쇠파이프로 된 담장의 초소로 배치시켰다.

 

재남이와 나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금남로 쪽에서 도청을 바라볼 때, 오른편인 충장로 1가 입구인 지금의 전남도의회 건물 앞 초소에 배치됐다. 한 평도 안 되는 블록으로 만들어진 초소에 4명이 들어가니 비좁았다. 재남이와 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두 사람은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아직도 수위실과 민원실 앞에는 총과 실탄을 분배받으려는 시민군들로 왁자지껄했다. 높이가 1.5m 정도 되는 초소는 계엄군의 총탄을 막지는 못할 것 같았다. 다행히도 초소 앞에 있는 한 아름이나 되는 가로수가 방패역할을 해줄 것 같아 안심도 됐다.

 

우리는 한 명씩 교대로 전방을 주시했다. 다른 사람들은 초소 안에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애를 썼다. 초소는 블록 한 장 크기의 경계구멍이 4개가 있었다. 우리는 경계구멍에 총을 넣어 거총해 놨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초소 뒤에는 전남도의 정책을 알리는 대형 입간판이 있었다. 보리 증산을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지금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홍보관(구 전남도의회 건물)이 있는 곳은 당시에는 공터였는데 시민군의 차량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한 시간쯤 시간이 흘렀다. 도청 주위는 비교적 조용했다. 뒤편의 시민군 지휘부 상황실도 얼마 전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우리는 설친 잠 때문인지, 계엄군이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졸기 시작했다. 물론 한명은 경계근무를 섰다. 가끔 전남 남부지역으로 가는 길목인 백운동 방향에서 총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새벽 4시쯤 됐다. 금남로 방향에서 총성이 들렸다. 조금 전 들었던 총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계엄군이 가까이 오고 있음이 총소리로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바싹 들었다. 모두 잠에서 깼다. 우리 초소에 있는 네 명의 시민군은 초소의 경계구멍으로 거총한 채로 전방을 주시했다.

 

아직도 어둡기 때문에 눈을 크게 뜨고 물체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초소 오른편에 있는 도청 본관 쪽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새벽 하늘을 가르는 총성도 연속 이어졌다.

 

"개새끼들, 모두 나와!"

 

계엄군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드디어 계엄군이 도청 가까이에 진군해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 초소 부근은 너무 조용했다.

 

"핑-핑 쉬-이."

 

갑자기 우리 초소에도 총알이 날라 왔다. 초소 뒤 철판으로 된 대형 도정 상황판에 총탄이 맞고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수류탄이 터진 줄 알았다. 반사적으로 우리 시민군들은 초소바닥에 엎드렸다.

 

이제는 죽었구나. 괜히 집에 있을 걸 나와서 죽게 되었구나. 옆에 있는 재남이가 밉게 보였다. 내가 상무관에서 분향한 뒤 YMCA에 남아 있자고 말할 때, 그냥 집에 가자고 우겼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어젯밤 시민군 중대장이 유동 삼거리와 금남로 3가 부근, 전일빌딩, 전남대 의대 병원 등에 시민군 측에서 기관총을 설치해 놨기 때문에 계엄군이 금남로 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중대장이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벌써 계엄군이 도청주위를 포위할 리가 없는데….

 

총탄을 피해 초소바닥에 엎드려 있는 잠시 동안, 온갖 잡념이 머리를 스쳤다. 도청 본관 쪽에서는 계속 총성과 유리창 깨지는 소리, 비명소리, 시민군을 제압하려는 계엄군의 악에 받힌 목소리 등이 뒤섞여 들렸다.

 

부끄러운 탈출

 

우리는 총탄이 날아오지 않자, 일어나 경계구멍으로 앞을 내다봤다. 다시 용기가 났다. 계엄군들이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망설이지 않고 쏴버리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몸을 웅크리고 초소전방을 주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커먼 물체가 우리 쪽으로 서서히 오고 있지 않는가. 내 경계 구역인 충장로 1가 입구방향 쪽에서 맨 처음 계엄군을 발견한 것이다. 재빨리 옆 동료들에게 말했다. 모두 총구를 충장로 1가 입구 쪽으로 향했다. 이때 시간은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새벽 5시가 채 되지 않았다. 멀리 있는 물체의 확인은 어렵지만, 50m 정도의 전방에 있는 물체는 희미하게 보였다. 검은 물체가 충장로 1가 입구를 지나 우리 쪽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가로수에 몸을 숨겼다가 다시 이동하곤 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검은 물체의 움직임을 자세히 주시했다. 잠시 후 검은 물체는 도로를 가로질러 조심스럽게 도청으로 다가왔다. 계엄군과 우리 초소간 거리가 30여m 정도 되었을 때, 철모에 흰색 띠를 두른 모습이 보였다. 확실한 계엄군이었다. 초소에 있던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기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답 대신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자물쇠를 풀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바싹 다가온 계엄군을 향해 총을 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방아쇠에 걸려 있는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손가락이 마비증세를 일으킨 것이다. 함께 있던 시민군들도 다가오는 계엄군을 확인하고도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처럼 겁에 질려 손가락이 마비된 게 틀림없었다. 계엄군과 우리 초소간 거리가 10여m쯤 됐다. 앞에 총 자세의 계엄군은 이제야 시민군을 발견한 듯 멈칫거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했다.

 

"예, 총 버리고 나와요. 빨리 나와요."

 

계엄군은 주눅이 든 표정으로 명령도 아니고 높임말도 아닌 어정쩡한 말투로 말했다. 계엄군도 우리처럼 겁에 질려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 초소에서 4정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으니 겁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로 상대방 쪽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어서 그런지, 잠시 멍하니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권투 시합 때 선수끼리 눈싸움하는 격이었다. 엉겁결에도 살아야겠다는 공포가 다시 엄습해왔다. 어제 오후 도청을 사수하겠다던 다짐이 부끄럽게도 도망칠 궁리만 했다.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 옆에 있던 재남이에게 말했다.

 

"재남아, 뒤로 도망치자."

 

초소 뒤편 광장(지금은 아시아문화전당 홍보관 건물이 들어섰음- 도청이전 전에는 전남도의회 건물)에는 시민군들이 노획한 차들로 가득했다. 재남이는 광장 쪽을 돌아보고 상황을 봐서 도망치자고 말했다.

 

계엄군은 다시 총을 버리고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조금 전과 다르게 목소리도 크고 힘이 있었다. 계엄군은 대치상황이 지속되면서 날이 밝아오자 겁에 질린 시민군의 표정을 읽은 것이다. 함께 있던 시민군 두 사람이 한손에 총을 들고, 또 다른 한손은 머리위로 올린 채 초소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낮게 쳐진 쇠파이프로 된 도청 담장을 넘으려 했다. 재남이와 나는 손들고 나가는 척하다 뒤로 도망쳤다. 우리의 행동은 순식간의 일이었고, 앞에는 손들고 나가는 시민군 때문에 계엄군은 총을 쏘지 못했다. 

 

재남이는 빽빽이 세워진 버스와 트럭 밑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총을 든 채 도청 안에 있던 이발관 옆으로 냅다 달렸다. 이발관 옆 담장은 벽돌담이었다. 옆에 쌓여있던 각목들을 이용해 훌쩍 뛰어 담 위에 걸터앉았다. 밑으로 뛰어내리기만 하면 됐다. 밑에는 도청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개인 집이었다. 숨어있기도 좋을 것 같았다.

 

"야, 멈춰! 꼼짝 마라!"

 

담 위에 걸터앉자마자 등 뒤에서 계엄군의 살기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잖아도 간이 콩알만 하게 놀라있는데, 계엄군의 몇 마디는 나의 넋을 빼놓다시피 했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고 마치 외줄을 타고 곡예를 하는 곡예사마냥 좁은 담장위에서 몸의 불균형과 놀란 마음에 부르르 떨면서 뒤를 돌아봤다. 초소 앞에서 우리와 기 싸움을 벌였던 그 계엄군이었다. 같은 초소에 있다가 항복한 두 시민군은 계엄군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계엄군은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야, 담에서 내려와!"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담을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좁은 담장이라 몸의 균형을 쉽게 잡지 못했다. 더구나 총을 들고 있어서 더욱 불편했다. 순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힐끗 계엄군을 쳐다보면서 담을 내려가기가 힘든 척하며 일부러 몸을 기우뚱거렸다.

 

아래를 내려다 봤다. 단단한 비닐로 된 지붕이었다. 계엄군은 여전히 사격 자세로 있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어차피 잡혀도 죽을 것이 뻔한데 뛰어 내리자.' 마음을 가다듬고 한 손에 총을 든 채 그대로 뛰어내렸다. 뭐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쿵"하고 맨바닥에 떨어졌다.

 

스테인리스 강(鋼)으로 된 그릇(속칭 스텐 그릇)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찬장에서 쏟아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식당 주방이었다. 원래는 기와지붕인데 공간 활용을 위해 처마 끝에 비닐지붕을 연결해 주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뛰어내리면서 비닐지붕이 부서지고 주방찬장에 쌓여있던 각종 식기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했던 것이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식당 방을 통해 도청뒷길로 통하는 대문으로 갔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뒤편 도청에서는 총소리가 요란했다. 대문에 기대어 골목길 좌우를 살폈다. 계엄군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계엄군이 뜸한 틈을 이용해 뛰기 시작했다. 50m쯤 뛰어가다 서석동 전남공고(현 동구청) 4거리 방향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군인복장이 아니라 안심이 돼 숨지 않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인 청년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 청년은 총을 들고 서 있는 나를 보고 시민군임을 알아차린 듯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는 거요?"

"전대병원이 계엄군에게 빼앗겼소. 그래서 지금 도청본부에 알리기 위해 뛰어가는 중이오."

 

아직도 숨이 차서 심호흡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당시 전대병원과 기독교 병원 등에는 계엄군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시민들의 시신을 수십여 구씩 안치해 놨다. 계엄군이 사망자수를 줄이기 위해 강탈해간다는 소문에 시민군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도청에 갈 필요 없소. 도청도 계엄군이 점령했소. 나도 도청에 있다가 도망치는 길이오. 빨리 도망갑시다."

"예?"

 

그 청년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와 행동을 같이했다.

 

 

너는 진짜 폭도다!

 

그 청년과 함께 골목길을 뛰어가다 대문이 열려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계엄군의 도청 진압을 예상했던지 모두 피난 가고 아무도 없었다. 정원의 간이 연못에는 피비린내 나는 바깥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잉어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청년과 나는 골목보다는 지붕을 타고 도망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 담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을 오르면서 가지고 있는 칼빈 소총을 연못에 던져 버렸다. 담을 오르기도 거추장스럽거니와 혹시 도망가다 계엄군에게 발각되더라도 집에서 나오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둘이 행동을 함께 하니까 계엄군의 감시망을 피해 도망가기가 수월했다. 먼저 한 명이 지붕을 타고 건너서 중간 지점에 도착, 망을 보면 나머지 한 명이 뒤를 따라갔다. 한 블록내 집들의 연결이 끝나면 또 다른 골목길이 나왔다. 그때마다 같은 방법으로 건넜다.

 

날이 환하게 밝았다. 나는 그 청년과 함께 어떤 지붕은 종단하고 어떤 지붕은 횡단하여 광주천변 부근까지 갔다. 이곳은 술집이 많은 골목이었다. 우리는 술집에 숨어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았다.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반 평도 되지 않는 부엌을 통해 방으로 들어갔다. 술집 출입문은 잠겨 있었고, 창문 커튼은 내려져 있었다.

 

우리는 방에서 두 다리를 펴고 오랜만의 휴식을 가졌다. 벽시계의 시침은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청년은 전남대 상대 2학년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나도 이름을 밝히고 고교 3년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형이라고 불렀다.

 

골목과 접한 집이어서인지 가끔 계엄군들이 뛰어가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공중에서는 헬기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도청 상공을 선회했다. "폭도들은 투항할 것과, 폭도를 숨긴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여자음성의 선무방송이 선명하게 들렸다.

 

대학생 형과 얘기를 나누다 두 평쯤 되는 술집홀로 나왔다. 커튼 사이로 밖의 상황을 살폈다. 일반 시민들도 한두 명씩 나와서 서성대고 있었다. 거의가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들이었다. 아직도 헬기는 선무방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시민군들의 투항을 권유한 유인물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틈을 봐서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방에 다시 들어갔다. 심심하기도 하고 지루해서 방에 있는 물건들을 만지작거리고 놀았다. 조그만 장롱도 열어봤다. 장롱에는 잡다한 옷들과 손님맞이용 홀복이 걸려 있었다.

 

내 체구에 맞는다싶은 홀 복을 골라 걸쳐 입었다. 대학생 형은 홀복을 입은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요염한 자세를 취한다고 허리선을 좁히는데 손에 두툼한 감촉이 와 닿았다. 꺼내 보니 만원권 지폐였다. 횡재한 기분이었다. 30만원이 넘었다. 견물생심이라던가. 대학생 형에게 이 돈을 나눠 갖자고 말했다.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 우리들이 투쟁하는 목적이 뭔데. 그러면 너는 계엄군이 말하는 진짜 폭도다. 폭도!"

 

대학생 형의 단호한 마음가짐에 돈을 다시 넣고 홀복을 벗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돈에 미련이 남았다. 그러나 정부와 계엄군이 떠들어대던 폭도가 되지 않기 위해 원래대로 놔두었다.

 

무사 귀가

 

대학생 형과 나는 술집을 나와서 여기저기에 서너 명씩 모여 있는 일반시민들과 합류해 인근에 사는 주민처럼 행동했다.

 

27일 광주의 새벽을 직접 맞이했던 도청 인근 주민들은 도청상황이 궁금하고 걱정됐는지 이집 저집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도청에서 빠져나오면서 지붕을 건너 뛸 때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인기척이 없었는데 말이다. 밤새 방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설쳤을 것이 분명했다. 시민군과 계엄군간 총격전 때는 또 얼마나 떨고 있었을까.

 

남도극장(지금은 헐리고 없음)과 지근거리인 불로동에 있는 큰집 사촌형님의 슈퍼마켓으로 갔다. 형님 댁은 오전 10시가 넘었는데도 가게 문을 닫아놓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형님 내외분은 갑작스런 출현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시내가 시끄러운데 일찍 나왔다고 나무랐다.

 

나는 오늘 새벽 도청에 있다가 이제야 도망쳐 나오는 길이라고 말씀드렸다. 형님 내외분은 더욱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시내 상황이 호전되면 집에 가라고 했다. 점심식사를 한뒤 시내상황이 궁금해 하숙집에 간다면서 나왔다.

 

형님 집에서 1㎞정도 거리에 있는 도청과 금남로 부근을 구경하고 싶어 적십자 병원(현 서남대 의대 부속 병원)을 지나 도청으로 갔다. 미국문화원(현 광주시 공용 주차장) 부근부터 계엄군들이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도청 앞 광장에는 군 탱크와 계엄군들이 있었다. 방향을 돌려 황금동 콜박스 4거리를 지나서 중앙로를 건넜다. 금남로와 중앙로가 교차하는 광주은행 본점 4거리에도 군 탱크가 대로를 막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농성동 하숙집으로 갔다. 불현 듯 도청에서 같이 있었던 재남이 생각이 났다. 재남이는 도청을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됐다. 나를 따라서 도청 밖으로 도망친 게 아니고 초소 뒤에 있던 버스 밑으로 숨었기 때문이었다. 계엄군에게 잡혔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딩동 딩-동"

"누구세요."

"예, 영상입니다."

 

대문이 열리자마자 하숙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아줌마, 큰일 났어라우. 오늘 새벽까지 재남이와 도청에 같이 있었는데 나 혼자만 도망나왔소. 재남이가 계엄군에게 붙잡혔던지 계엄군 총에 맞아 죽었던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오."

"오메, 살아있었네. 정말 살아 있었어. 재남이가 거짓말 해부렀구나. 재남이가 오늘 아침에 집에 와서 자네 죽었을 것이라고 하든디."

 

아주머니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예? 재남이가 왔소?"

"그래, 아침 일찍 와서 도청상황을 말하고는 자네 죽었을지 모른다고 걱정 많이 했네."

"그래요?"

 

재남이와 나는 서로 죽었거나 잡혔다고 말한 것이다. 내 방이 있는 2층에 올라갔다. 하숙생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재남이도 있었다. 하숙생들은 나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재남이는 더욱 반가워했다. 재남이와 나는 서로의 도피경로를 얘기하면서 하숙생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줬다. 재남이는 도청에서 도망칠 당시, 차 밑에 숨어 있다가 계엄군의 경비가 소홀한 틈을 이용해 도망쳐 나왔다고 말했다.

 

하숙생들은 우리가 도망쳐 나온 얘기를 호기심과 재미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재남이와 나는 죽음을 무릎 쓴 일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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