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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부부 팀 '실부플레'의 '우스꽝스러운 흰옷 커플'은 쿠하처럼 아주 어린 아이들의 웃음까지 자아내게 합니다.
 일본인 부부 팀 '실부플레'의 '우스꽝스러운 흰옷 커플'은 쿠하처럼 아주 어린 아이들의 웃음까지 자아내게 합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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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마임' '안개' '요잔 손민규'.

'춘천' 하면 떠오르는 존재들입니다.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이 없었다면 오늘날 춘천이 문화적이고 조용한 이미지의 도시가 되었을까요? 저를 포함해 춘천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사해야 할 분입니다.

연극보다 더 연극적인 마임은 절제된 언어 때문인지, 과장된 몸짓 때문인지 보고 나면 여운이 오래 갑니다. 동작 하나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서는 두고두고 곱씹으며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어 좋아합니다. 일부러 춘천까지 와서 볼 만큼 충분한 매력이 있습니다.

춘천의 명물 안개는 사람을 차분하게 합니다. 외지에서 놀러왔을 때는 강가에 퍼진 안개가 괜히 뭔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 잡기 좋은 무대 배경 같았습니다. 지금은? 자동차 전조등과 미등을 줄곧 켜야 하는, 매캐한 기운이 아이 감기에 안 좋을 것 같아 귀찮고 피하고 싶은 우울한 날씨일 뿐입니다. 너무 많이 변했죠?

마지막으로 요잔 손민규님은 오늘날 쿠하네 집이 만들어지는 데 적잖은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오쇼 라즈니쉬의 제자로 왕성한 번역 작업을 한 명상인입니다. 류시화 시인과 함께 라즈니쉬를 알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는데, 두 사람을 생각하면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이 떠오릅니다. 류시화 시인의 글이 여성적이고 유려해서 다보탑 같다면, 손민규님의 글은 남성적이고 간결한 힘이 잘 살아있는 석가탑입니다.

명상서적 번역자와 쿠하네 집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쿠하 아빠와 저는 요잔님이 번역한 책을 빌려 주면서 친해지기 시작했고, 몇 년 간 그 분이 만든 홈페이지에서 놀며 연애한 끝에 결혼에 성공했으니까요.   

조용한 도시에 벌어지는 몸짓의 난장  

춘천에 사는 기쁨 가운데 산과 물이 많이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다양한 축제입니다. 사람 많이 모이는 곳과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지만, 축제장에서는 소음마저 즐겁습니다.

해마다 5월 마지막 주에는 호반의 도시 춘천에 도깨비 난장이 벌어집니다. 도시 곳곳에서 길거리 공연을 볼 수 있고, 고슴도치 섬에서 밤새 공연을 볼 수도 있습니다. 집 앞에서 벌어지는 축제지만 그림의 떡입니다. 실내 공연이 5세 이상 관람이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마음'만 있다면 '마임'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닭갈비 골목으로 유명한 춘천 명동이나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거리 공연에는 나이 제한이 없습니다. 

실부플레의 공연 중 테니스 라켓 두 개로 날개를 만들어 날아가는 연기를 진지하게 보네요.
 실부플레의 공연 중 테니스 라켓 두 개로 날개를 만들어 날아가는 연기를 진지하게 보네요.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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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된 공간과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관객들 속에서도 공연에 집중하던 '실부플레'.
 개방된 공간과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관객들 속에서도 공연에 집중하던 '실부플레'.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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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날씨마냥 더웠던 지난 일요일(5월 25일). 낮 12시 30분부터 춘천시 명동 일대에서 벌어진 '아!水라장' 거리 축제는 물을 쏘는 공연도 있다고 해서 갈아 입힐 옷까지 챙겨 나섰습니다.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아빠에게 "엄마랑 마임 축제 갈 거야"라고 말하는 쿠하. 축제 기분을 낼 겸 일본인들이 여름 축제에 입고 가는 옷 '유카타'를 입혔습니다.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 되는 옷이지만 한낮의 햇빛은 삼십 분 만에 '땀순이 쿠하'로 만들어 버립니다. 기념품도 살 겸 들른 '아!水라장' 인포센터에서 1만 원 짜리 노란 티셔츠를 사줍니다. 지금 입기에는 크지만, 올해는 원피스로 입히고 내후년쯤 반팔 티셔츠로 입힐 수 있겠지요.

길을 막는 고깔보다 한뼘 더 큰 쿠하. 작년 마임축제 때는 안고 다녔는데 올해는 혼자서도 잘 걸어갑니다.
 길을 막는 고깔보다 한뼘 더 큰 쿠하. 작년 마임축제 때는 안고 다녔는데 올해는 혼자서도 잘 걸어갑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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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쿠하와 함께 거리 공연을 보려던 엄마는 첫번째 팀 공연부터 쿠하가 무서워하면서 울어 버리는 바람에 하나도 제대로 볼 수 없던 전력이 있습니다. 얼굴에 하얗게 칠을 하고 나온 공연 팀이 무서웠는지 엄마 목에 원숭이처럼 꽉 매달린 자세로 현장을 뜰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열두 달은 아기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춘천에 휘영청 달은 밝은데~ 춘천에 휘영청 마임이 떴네~"

몇 번 듣더니 마임송을 흥얼거리며 언덕 길을 내려갑니다. 어찌나 빨리 뛰어가는지 임신 8개월의 배쟁이 엄마는 따라가기도 벅찹니다.

쿠하가 달려간 곳은 가면 만들기와 풍선을 나눠주는 체험 행사장. 한쪽에는 어른 키보다 훨씬 큰 도깨비 캐릭터 '몽도리'가 서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은 줄 서서 몽도리와 사진을 찍는데, 한 프린터기 업체가 그 자리에서 인화해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사 아저씨의 "자연스럽게 웃으세요~" 주문에, 둘이 나온 사진이 별로 없는 쿠하모녀는 일부러 "히히히" 소리내 웃어가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2분쯤 기다렸더니 두 사람 얼굴이 한 장에 나옵니다. 이벤트 판에 사진을 걸어두니 쿠하가 자기 얼굴이 거기 있다며 신나 합니다.

부대행사는 아이들을 즐겁게 합니다. 현장에서 몽도리를 배경으로 쿠하와 엄마도 사진찍기 이벤트에 참여했습니다.
 부대행사는 아이들을 즐겁게 합니다. 현장에서 몽도리를 배경으로 쿠하와 엄마도 사진찍기 이벤트에 참여했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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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정신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거리 공연은 배우들에게는 힘든 작업이겠지만, 관객들에게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시간입니다. 폐쇄된 극장에서는 기침 소리나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민망하고 미안하지만, 먹고 마시고 소비하던 그 길 위에서는 전혀 부담될 게 없습니다.

투명한 벽 안에 갇힌 남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일상 생활을 재현합니다. 쿠하가 좋아하는 분홍색으로 그림을 그리자, 아이는 "핑크색이다!" 소리치며 배우의 연기보다 색깔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엄마, 핑크색 컴퓨터야. 나두 사줘."

요새 뭐든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한 녀석은 남자가 그린 분홍색 컴퓨터도 갖고 싶은가 봅니다.

거리극 전문 단체 '경계없는 예술센터'의 '일상의 벽'. 투명한 벽 안에 갇힌 남자의 분주한 행동에 심각한 해석 대신, 아이들은 웃음으로 관객의 대답을 보여주었습니다.
 거리극 전문 단체 '경계없는 예술센터'의 '일상의 벽'. 투명한 벽 안에 갇힌 남자의 분주한 행동에 심각한 해석 대신, 아이들은 웃음으로 관객의 대답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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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P.P의 '하이'는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공연이었는데, 음향이 너무 커서인지 쿠하가 무서워해서 끝까지 볼 수 없었습니다.
 K.Y.P.P의 '하이'는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공연이었는데, 음향이 너무 커서인지 쿠하가 무서워해서 끝까지 볼 수 없었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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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게는 별 것 아닌 소리도 아이한테는 공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타다다다" 지나가는 배기량 큰 오토바이, 아스팔트 도로를 뜯어내는 파괴 해머 드릴의 굉음이 그렇습니다.

K.Y.P.P의 공연 시작을 알리는 메트로놈이 움직이자 쿠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음악이 따라옵니다. 움찔하는 녀석의 시선이 꽂힌 곳은 아이스크림 가게. 한낮의 더위는 관객들을 에어컨 바람 시원한 매장으로 불러들입니다. 평소 손님이 드문드문 드나드는 가게는 대목장이 따로 없습니다. 줄이 이중 삼중으로 겹쳐져 있습니다.

여름날씨 같은 더위를 피해 '아!水라장'이 펼쳐지는 명동의 한 백화점으로 고고싱~. 거울만 보면 장난기가 발동합니다.
 여름날씨 같은 더위를 피해 '아!水라장'이 펼쳐지는 명동의 한 백화점으로 고고싱~. 거울만 보면 장난기가 발동합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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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이나 더 기다려야 하는 물의 난장 '아!水라장'을 기다릴 요량으로 메인 무대가 설치된 백화점으로 갑니다. 얼마 전 새 단장을 마친 명동의 한 백화점에는 우유 1천 원, 생과일주스도 2천 5백 원에 파는 키즈 카페가 생겼습니다.

마음껏 그림책을 볼 수 있는 키즈 카페에서 쿠하는 엄마가 사주지 않는 뽀로로 그림책도 실컷 보고, 집에서는 사주지 않는 오렌지주스도 마실 수 있습니다. 비록 기대하던 아이스크림은 없지만 책과 주스에 신이 난 아이는 방금 전의 지친 표정도, 무서웠던 소리도 말끔히 지워냅니다. 거울 속에 나타난 제 모습을 보면서 뽀뽀를 하기도 하고, 악수를 청하기도 합니다.

관광객이 아닌 춘천 시민으로 본 두 번의 마임축제는 엄마에게도 특별한 기억이 됩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거리에서 마임을 보는 아이를 훌쩍 자라게 했으니까요. 어떤 아버지는 해마다 어린이 대공원 분수 앞에서 같은 날짜에 아이의 사진을 찍어줬다고 합니다.

십여 년 그렇게 하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열 명의 다른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저는 쿠하가 청소년이 되어 스스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하기 전까지는 해마다 마임 축제에 데리고 다니고 싶습니다. 말 없이 많은 말을 전하는 마임을 보면서 아이의 마음을 키워주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해마다 반응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엄마로 사는 1년이 아깝지 않다는 사실을 제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태그:#춘천마임축제, #걷기, #쿠하, #이철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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